#14. 잃어버린 기억

그것도 황제와 황녀가 내 남편이고 딸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걸 어떻게 부정할 수가 있을까.

황녀는 나랑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황제와 판박이였는데.

놀리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제국의 황제와 황녀가 할 짓이 없어서 내게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혼란스러움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이미 결혼을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그것도 애까지 있는.

“애초에…제가 누군가와 엮여있다는 사실이…현실성이 없게 느껴져요….”

[괜찮다. 나의 아이야. 네가 굳이 그 녀석과 엮이고 싶지 않다면 무시해도 된다.]

“…그치만 황제인데 어떻게 무시를 해요?”

[네가 멀어지길 바란다면, 무시하는 태도가 효과가 없지는 않을 거다.]

“…….”

[황제가 싫다면….]

“싫지는 않아요!”

정말로 싫지는 않았다. 이유도, 원인도 알 수 없었지만, 싫은 감정은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 간질거리는 감정이 결코 부정적인 감정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의하기가 어려운 감정이었지만, 피하고 싶지만은 않았다.

“다만…이 현실이 무척 당황스러울 뿐이에요.”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신님. 그럼 저는 정말 한 번 죽었던 사람인가요?”

내가 어쩌면 죽은 사람이라서, 나를 처음 봤을 때 사제들이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낯선 이가 나타나서 당황한 게 아닌, 죽은 사람이 돌아왔으니 그런 반응을 보인 걸 테니까.

“그것만 알려주세요. 정말 제가 제국의 황제를 사랑해서 결혼했고, 황녀가 제 아이인지.”

[그래. 너와 황제는 사랑했고, 황녀 역시 네 아이가 맞단다.]

그거면 됐다. 이거면 충분했으니까. 굳이 피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아까야 무척 당황해서 그런 거지, 내 과거를 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을 뿐.

이제 알았으니까. 정말로, 황제가 나를 보던 그 눈빛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 눈빛이 애정이라는 것에 확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 피하지 않고 현실과 마주한다면 무엇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신은 분명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제 잘래요.”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다.]

“그냥…자고 일어나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침대에 몸을 뉘이니 조금 나았다. 머릿속은 아직도 복잡했지만, 몸은 편안했다.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머릿속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없던 남편과 아이의 존재는 무척이나 사람을 당황시키니까.

*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싱숭생숭했던 복잡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생각보다 일찍 일어난 것 같았다. 실제로 창문 밖은 태양이 뜨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아, 램프를 들고 조용히 바깥으로 나갔다. 신전의 정원으로 나오면서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후우….”

그 심장을 간지럽히고 두근거리게 했던 그 감정이 사랑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보통 사람들을 보고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 두근거리는 감정은 아마도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은 한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보다도, 알기 어려운 애틋함이 묻어났었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기억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에휴….”

한숨 밖에 나오질 않았다. 조금이라도 과거와 관련된 기억이 떠오르길 바랐다. 그게 결코 쉽지는 않은 희망이겠지만, 원래 인간이란 희망과 기적을 바라는 이기적인 생물이니까.

정원을 걷고 또 걸었다. 무언가라도 떠오를까 싶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해서, 정원을 맴돌고 또 맴돌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렇다고 잠이 쏟아질 정도로 피곤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이나 남은 것 같은데.

어두운 하늘이 놓아진 별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

램프를 들고, 다시 방 안으로 돌아왔다. 산책을 나갔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아마도 이 방에 뭔가가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서.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별반 소득이 없어서 괜히 힘만 뺐나 싶어 다시 침대에 누웠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말 내가 황제랑 사랑하던 사이가 맞았는지. 신께서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니셨기에, 믿지만.

그래도 어색하다는 건 맞는 표현이었다.

“하아…잠이 안 와….”

어린 황녀 역시 황제의 장단을 맞춰주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황제보다 먼저 나를 보고서 엄마라고 했으니까. 착각했다고 보기란 어려웠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신전 밑에 연결되어있던 그 게이트는 그럼 황성에 연결된 걸 텐데.

한 번 가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겨 게이트가 있던 곳으로 내려갔다.

“…분명 처음 보는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머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머리로는 낯설지만 몸은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게 아니라는 듯.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굳이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

낯설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곳을 따라 향했다. 그리고 어느 방문 앞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며 날뛰고 있는 건지. 슬쩍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

숨이 멎을 뻔 했다. 황제가 잠든 것 같았는데,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꼭 악몽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악몽도, 신의 권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미약하게 신의 권능 중 하나인 치유의 권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표정이 한결 편해진 게 눈에 보였다.

눈꺼풀이 살짝 움직이더니, 검은색 속눈썹 사이로 영롱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혹시 깨기라고 한 걸까?

“아리에나…?”

나른한 목소리였다. 아직 잠결에 취해있는 듯한 정신이 제대로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눈빛에,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런 내 손을 황제는 꼭 잡았다. 가지 말라는 듯, 무척이나 애절한 목소리로.

“또다시 내게서 떠나지 말아줘….”

“…….”

그 말에 차마 매몰차게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을 쳐낼 수가 없었다.

내 손을 간절하게 잡은 그가 갑자기 힘을 주며 당겼다.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의 품에 갇혀버렸다.

그의 숨결이 바로 뒤에서 느껴졌다.

“너를 이제 더는 잃고 싶지 않아요…네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고통은 2번으로 충분하니까….”

“…….”

두 번? 내가 죽은 적이 1번이 아니었던 걸까.

“더는 네가 나를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아리에나….”

낮에 봤을 때와는 다른 말투였다. 그 때는 정중함을 지키기 위해서 존댓말을 썼다면, 잠결에 내뱉는 저 말들은.

원래 쓰던 말투 같았다. 아이 같아 보이지만, 그만큼 친밀했던 사이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약간 장단에 맞춰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고 싶었어?”

“응. 네가 없는 세상은 지옥과 같으니까.”

“아이가 있잖아.”

“샤샤가 있어서 널 따라 죽지 않았어. 네가 샤샤를 부탁한다고 했었으니까…너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

아이 같았다. 역사서에 나왔던 피도 눈물도 없다던 그 황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너를 하루라도 생각하지 않은 적 없어, 아리에나.”

“…….”

“다시 돌아온 너는 나를 모른대…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어…하지만 살아 돌아왔으니까. 죽은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그걸로 충분해.”

“어떻게 할 건데?”

“다시 내가 다가가면 되겠지. 살아서 와줬으니까.”

“어서 자.”

빨리 재워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질 않았다. 어서 신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어차피 잠결일 테니, 금방 잠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맞췄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를 움직이게 하지 못하게 하는 그의 팔의 힘은 무척이나 세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황제가 깨어날 때까지 그의 품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걸까.

“가지 마…아리에나….”

잠결로 잔뜩 떨면서 새어나오는 절절한 목소리가, 심장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차마 그의 품에서 억지로 나오고 싶은 마음을 사그리 녹여버렸다. 어쩔 수 없이 체념했다.

황제의 품은 생각보다, 익숙했다.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락하고 편하다는 게 옳았다.

이대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있어야 하는 걸까. 사람의 체온이 고스란히 닿아서 그런 건지. 따뜻한 감각에 두 눈이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

결국 황제의 품에 갇힌 채로, 잠에 들었다.

*

그냥 아리에나를 봤기 때문에 그런 걸까. 오늘은 꿈에서 아리에나가 나타나지 않았다.

늘 피곤과 악몽에 시달렸는데, 지금은 그 누적되어있던 피로들이 해소된 것만 같았다. 마치 아리에나와 함께 잠들었을 때처럼.

누군가 내 품에 안겨있는 것 같았다. 샤샤가 온 건가 싶어서 시선을 내렸는데, 검은색 머리카락이 아닌 은색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꿈인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현실이었다. 쌕쌕 거리며 곤히 잠들어 있는 아리에나의 얼굴이 무척이나 편안해보여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물론 그게 중요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내 품에 안긴 채로 잠들어 있다는 거였다.

가볍게 안아서 제대로 눕혀주고, 이불까지 제대로 덮어주었다.

“…변함없네.”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 살아 돌아온 지금이나, 무척이나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점은 네게 있어서 불변의 법칙인가 봐.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네가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자면, 웬만큼 깨워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너라는 걸 알아서.

“네가 왜 이곳에 온 건지 모르겠어, 아리에나.”

어쩌면 신이 운명의 장난을 친 건지 모르겠다. 기억을 잃은 네가 이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온 적은 거의 드물었으니까. 그것도 내게 잠든 사이에 다녀간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네가 편안한 얼굴로 잠에 든 모습을 본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정말 얼굴에 혈색이 돌아서 다행이다. 핏기 하나 보이지 않던 네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만 같아서.

“나를 기억하려고 이러는 거야?”

“…….”

“사랑해, 아리에나.”

대답이 들려 올 리 만무했다. 곤히 잠에 빠져 있었으니까. 이유가 어찌되었든, 제 발로 황성 안으로 들어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할 테니까.

네 기억이 없더라도, 내 기억이 온전하니까. 내가 더 많이 너를 사랑하고, 그 감정을 온전히 보여준다면 너는 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줄까.

기억이 없는 네게 있어서 나는 불편한 사람일 텐데, 이렇게 왔다는 건. 내가 기대해도 된다는 뜻일까.

“네게 기대해도 될까.”

네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인데, 욕심이 나고 있다.

너와 다시 예전처럼 사랑하길 바라는 내가. 네가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고, 네가 나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지만, 추억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감정만은 기억해주길 바랐다.

이게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더 많은 걸 바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서.

“…아리에나.”

너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아니 사랑스럽지 않은 모습이 없는 그런 무척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생명체였다.

이제는 온기가 느껴졌다. 그 때처럼 차갑지 않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니까 더는 불안해 할 필요도 없는데.

왜 이렇게 먹먹한 기분이 드는 건지.

“…….”

너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너만을 사랑할 거야. 사랑해, 아리에나.

*

꿈을 꿨다. 기억은 제대로 나질 않지만,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던 꿈을 꾼 것 같았다.

분명 새벽에 일어났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 샌가 또 잠든 모양이었다. 일어나려니 밝은 햇살이 눈을 뜨기 힘들게 만들었다.

늦은 아침인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랐다. 분명 익숙하게 느껴지면서 기억이 나지 않는 장소였으니까.

“깼어요?”

뒤에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가 익숙했다. 머릿속에는 없지만, 알 수 없게도 무척 익숙하게 느껴졌다. 낯설지 않고 이질적이지도 않고 늘 있던 일처럼 느껴졌다.

기이할 따름이었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울 수가 없었어요.”

“…….”

“잘 잤어요?”

목소리나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황제는 무척이나 다정한 웃음을 지은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책상에는 무척이나 많은 양의 서류들을 올려두고 있는 채로.

“예전 생각이 나서요.”

“…….”

“낯설지 않을 거예요. 아리에나와 늘 함께 쓰던 곳이니까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거든요.”

할 말을 잃었다.

“당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에요. 저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면, 그 궁금증을 제가 해소해 줄 수 있어요.”

“…정말요?”

“네. 저는 결코 당신한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정말…황후였나요…?”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긴 했지만, 확답을 듣고 싶었다.

“네. 제국의 황후였고, 제가 사랑하는 부인이었습니다.”

“…….”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먼저 방 밖으로 나갔다. 어서 나오라는 듯, 문을 잡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당연히 성 안을 둘러볼 줄 알았다. 그런데 바깥으로 나갔다. 정원으로 가서는 의자를 손수 빼내더니 나를 의자에 앉혔다.

“아리에나가 좋아하는 걸 먹다 보면, 나름 기억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바로 내 맞은편에 앉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녀들이 트레이와 차를 가지고 왔다. 테이블 위에 전부 올려 두고서는 정원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