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라졌다

“샤샤. 나오니까 어때?”

“좋아요! 엄마랑 같이 와서 더 좋아요!”

“그래? 다행이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였다. 아이에게도 자신의 친아빠가 누군지 알 권리가 있었다. 이안에게는 아직 털어놓지 못한 진실을 아이에게는 털어 놓아도 되지 않을까.

이안에게 곧 진실을 털어 놓을 생각이니까.

“샤샤.”

“네?”

“아빠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안 알려주셔도 괜찮아요!”

“이 제국의 황제가 네 친아빠가 맞아, 샤샤. 그러니 불안해 할 필요 없단다.”

“…….”

“오늘 돌아가면 말할 거란다. 네가 이안의 친딸이라고 말할 생각이란다.”

참 오래도 걸렸다.

“너는 황가의 핏줄이 맞으니까…남들 말에 신경 쓸 필요 없어, 샤샤.”

“엄마.”

“그러니, 남들이 네게 황족이 아니라고.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고 욕해도 흘려들으렴. 네가 황족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 진실이니까.”

“…엄마.”

“엄마가 샤샤를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아주 많이 너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네가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어요, 엄마.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잘 알아요!”

“…그래. 내 딸.”

마차가 멈췄다.

“이제 도착했나 보네. 이제 내리자.”

“아빠가 엄마는 햇빛을 보면 몸이 안 좋아진다고 했는데….”

“괜찮아. 겨우 하루뿐인걸.”

샤샤의 손을 잡고서, 마차에서 내렸다.

“…룬?”

“오랜만입니다. 이제는 황후 폐하이시죠.”

“…….”

“호위 임무를 배정받았습니다. 황제 폐하 다음가는 실력자는 저 뿐이니까요. 뭐…황제 폐하와 비교하자면 격차가 무척이나 크지만요.”

늘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이안의 눈동자는 금색이었지만, 그 금빛은 금을 녹여낸 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룬의 머리카락은 레몬을 녹여낸 것 같지만, 분위기는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직 그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룬. 샤샤를 못 본지 꽤 됐죠?”

“제가 직접 찾아뵈었어야 했는데…황후 폐하와의 알현이 통과가 되지 않아서 불가능했습니다.”

“괜찮아요. 샤샤, 엄마 친구야.”

샤샤는 룬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서는 사랑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가 어렸을 때는 많이 봤을 텐데, 아마 아주 어릴 때라서 기억은 나지 않을 거야. 룬, 샤샤는 못 본 사이에 많이 자랐지?”

“네. 이제 보니까, 아리에나보다는…다른 사람을 더 닮았네요.”

아마 이안을 말하는 거겠지만, 이곳에서는 보는 눈이 많으니 돌려 말한 것 같았다.

룬의 말대로 샤샤는 나보다는 이안을 많이 닮았다. 그것도 꽤나 많이. 머리카락 색만 검은색으로 돌려내면, 누가 보아도 이안을 닮았을 터였다.

“아직 사실을 말하지 않으셨나요?”

“오늘 돌아가면 말할 생각이에요. 이제 그도 알아야 하니까요. 너무 오래 진실을 숨겨왔죠.”

“분명 가장 기뻐하실 분이십니다.”

“네. 룬이니까, 가까이서 호위하는 걸 부탁할게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편해서 떨어져 오라고 했겠지만, 룬은 제 친구잖아요.”

“네. 정말 영광스럽네요.”

룬은 가끔 보면 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찬란한 머리카락 색을 가졌다.

“가끔 보면 룬이 저보다 신의 사랑을 더 받았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네?”

“저만큼 밝은 외향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잖아요.”

이안만 하더라도, 빛보다는 어둠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천사와 악마 중에 굳이 꼽자면, 악마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럼 로즈마리는 잘 지내고 있나요?”

“네. 셀린 공작님께서는 요즘 가문의 일 때문에 바쁘셔서 황후 폐하를 만날 시간이 없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에 대한 알현 요청은 전부 거부하셨거든요.”

이안의 행동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편은 아니었다.

아마 내 건강이 노출되면 위험할까봐 아예 사전적으로 차단을 한 것 같았으니까.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제가 아파서 그런가 봐요.”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황후 폐하는 좀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최근 들어서 이상한 종교 집단이 생긴 모양입니다. 세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악마를 추종하는 집단이라는데….”

“에이. 그게 저와는 관련이 있을 리가 없죠. 그냥 제국민들이 그들과 연관되지 않게 빨리 죽이거나 잡아서 심문해요.”

룬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뇨. 이런 모습을 보면…황후 폐하께서도 황제 폐하를 많이 닮으신 것 같아서요.”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이죠?”

“네. 행복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죽기 전까지는 행복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죽더라도 여한이 남지 않도록, 미련이 없도록, 행복에 겨워 살다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서 죽고 싶었다.

그게 내 죽음에 대한 바람이었다.

“룬. 예전에 룬이 제게 기사의 맹세를 했던 거 기억해요?”

“네. 아직도 유효하답니다.”

“그럼 그 맹세 제가 아니라 샤샤한테 해줄 수 있나요?”

“…네?”

“저는 오래 못 살아요. 제가 죽음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신께서 정하신 제 운명이에요.”

“…….”

“제가 죽으면 샤샤를 지켜줄 수 있을까요? 이안이 잘 지켜주겠지만…혹시라도 이안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그러겠습니다.”

“제가 죽으면 이안의 정신이 또 무너질 것 같아서…네? 그렇게 하겠다고요?”

“네. 못할 이유도 없죠.”

룬은 정말 흔쾌하게 수락했다. 정말 수락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다.

“진심이에요?”

“네. 저는 늘 진심이었습니다.”

아무리 진심이라지만, 정말 쉽게 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다. 늘 그랬다. 어쩌면 룬은 이안만큼이나 내게 헌신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감정은 조금 다르겠지만, 룬도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었다.

“제가 죽어도…아니 이안은 늘 제가 우선일 테니…룬에게 있어서는 샤샤가 우선이 되어주면 좋겠네요. 조카처럼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그러겠습니다.”

정말. 내가 죽으면 이안은 모든 것들을 다 내팽개치고, 전쟁을 일으키러 전쟁터로 향하거나.

혹은 그도 아니라면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죽으면 가장 상처 받을 사람은 샤샤일 테니까.

내가 있다면 샤샤를 우선적으로 챙기겠지만, 이안에게 있어서 우선은 샤샤가 아니라 나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룬은 이안과는 달랐다. 샤샤를 우선시 해줄 수 있는, 샤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로즈마리한테도 전해줄 수 있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즈마리한테도 제가 죽으면 짧게 슬퍼하고, 샤샤가 혹여라도 곤경에 처하거나 위험해지면 한 번 정도는 도와달라고…그 정도는 전해줄 수 있을까요?”

“그러겠습니다. 오늘은 당장 힘들고, 아마 황후 폐하께서 황성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말을 하러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그거면 충분해요.”

샤샤의 손을 꼭 잡았다.

“바로 뒤에 붙어서 와도 되고, 나란히 걸어도 돼요.”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해야지요.”

룬은 무릎을 굽혀서 샤샤에게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는 제가 황녀 전하를 지켜드릴 수 있는 황녀 전하의 칼날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룬. 샤샤를 나보다 우선순위로 두어주면 좋겠어.”

나는 이안에게 있어서 1순위니까. 샤샤는 내게 있어서 1순위지만, 내가 죽음을 맞이하면 아무도 샤샤를 1순위로 사랑해줄 것 같지가 않았으니까.

“샤샤. 이 사람은 엄마 친구고,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위험하면 이 사람이 널 구해줄 거야.”

“네….”

“그리고 이젠 엄마랑 시장에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구경도 하면서 놀자. 이렇게 바깥에 나올 수 있는 날은 드물어서 그래.”

“…네!”

어차피 오늘 한 번 만이었다.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아마, 죽을 때까지 바깥을 즐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안은 내 죽음을 원치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국에 나는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이미 내 죽음을 나는 예견했다. 아마도 오래 살아야 금년이 최대일 것 같았다. 병의 증세는 약화됐지만, 운명은 변치 않을 테니까.

룬은 정말로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뒤에 졸졸 따라왔다. 아마도 주변을 경계하면서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듯 싶었다.

“닭 꼬치 3개 주세요.”

하나는 샤샤의 손에 들려있고, 하나는 뒤에서 호위하고 있는 룬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내가 먹었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무척이나 행복했다.

“샤샤 엄마랑 이제 옷 사러 갈까?”

“네! 엄마랑 함께라면 뭐든 좋아요!”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차에 다시 탔다. 그리고서는 미리 봐두었던 부티크가 있는 곳으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멈췄다. 아마 목적지 앞에 도착했다는 신호겠지.

샤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부티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마차에 황실 문양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그래서 시장에서 내렸을 때도 시선이 집중이 되었던 걸까. 그래 호위들이 그림자가 되어 보이지 않게 따라다녔을 텐데.

그렇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이상한 게 맞긴 했다. 문을 열고 부티크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황후 폐하이십니까…?”

“…네.”

솔직히 신분을 숨기고 싶었다. 이안이 이렇게 요란하게 했으니까. 신분을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어쩔 수 없지만.

룬은 부티크 밖에서 기다리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겠다며 바깥에서 호위하겠다고 했으니 그리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드레스를 보러 왔습니다.”

“네! 잠시만 앉아 계시면 차와 드레스를 내어오겠습니다!”

“네.”

마담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파로 샤샤와 나를 안내했다. 그래서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드레스를 기다리는 동안, 마담은 금방 차와 다과를 내어왔다. 드레스를 꺼내오는 동안 먹으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즐겨 마시는 차는 아니었다. 그래서 빠르게 마시지는 못하고 짧게 짧게 여러 번을 번복해서 마셨다.

“흐음….”

마담은 이내 드레스들을 가득히 꺼내오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건 파스텔 톤의 연보라색이었다.

저기에 프릴을 조금 더 달고 리본을 더 추가하고 벨벳으로 장식을 덧대면 무척 사랑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드레스가 될 것 같았다.

“거기에 소매와 밑단에 프릴을 추가해주고, 치마 밑에 쪽에 리본을 추가해주고 끈은 벨벳으로 수정하면 무척 사랑스런 드레스가 될 것 같네요. 그렇게 수정해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샤샤, 너는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니?”

몇 벌이던 상관없었다. 샤샤가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당연히 구입하는 게 맞았다. 어차피 청구는 황실에다가 할 테니까.

“엄마가 사주는 거라면 다 좋아요!”

“그래?”

“네!”

샤샤를 보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말 말도 예쁘게 했다. 몇 가지의 드레스들과 신발까지 주문을 하고서, 제작 후에 황성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마치고 이제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어지러웠다. 세상이 일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이 일그러지는 게 아니라 내 시야가 일그러진 거지만.

“엄마!”

“샤…샤….”

몸에 힘이 없어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았다. 샤샤의 애칭을 제대로 부를 수 없을 만큼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햇빛을 보았기에 나타난 증상이었을까.

타들어가거나 죽을 것만 같은 끔찍한 통증은 없었다. 오히려 수면제를 먹어서 그런 것처럼 졸음이 파도처럼 쏟아지는 감각이었다.

“밖에 호위들을 불러….”

말을 더는 잇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새까만 암흑만이 나를 반겼다.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혹시 라는 마음과 아쉬운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

아리에나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맞았다. 숨 쉬는 것조차도 경배해야 할 만큼, 무척이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예쁜 그런 살아있는 것이 축복인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고, 우는 얼굴도 예쁘지만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는 않으니 울릴 수는 없었다.

“…….”

요즘 들어서, 예전보다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살이 빠진 건지, 아니면 햇빛 아래에 나가는 것을 자제해서 뼈가 약해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오늘 바깥에 나가도 되냐는 물음에 긍정의 답을 해준 거였다.

대답을 할 때 약간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도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그동안 실내에서만 지냈던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너무 어둠 속에서만 살 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아리에나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날개를 잃고 지상에 떨어진, 빛 그 자체인 천사였다.

그러니 햇빛이 없는 어둠 속은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조차도 빛이 나는 사람이긴 했지만.

“후….”

그녀에 대한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걸렸다. 웃는 아리에나의 얼굴은 정말 천사를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 만약 천사가 존재한다면, 아리에나는 분명 날개를 잃고 떨어진 천사가 맞을 터였다.

그녀가 천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누구를 천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겉으로 보이는 성격은 천사에서 멀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도 여리고 애정을 갈구하는 무척이나 잡아먹고 싶은 충동을 들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생명체였다.

품에 안기는 모습조차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하는 모습도 애정하지 않고서는 살아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잠들어있는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지만, 나를 괴롭게 하는 건 잠든 아리에나는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잠을 자면서도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모습이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나약한 내가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