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나를 기억해줘

돌아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 있어서 우선순위는 이안보단 샤샤였다.

이안이 어떤 생각이던, 적어도 날 죽일 생각은 없단 것 정도는 알겠다. 그렇다 해도 샤샤는 꼭 숨겨야만 했다. 샤샤의 존재는 내게 있어서 전부였으니까.

“네게 아이가 있는 것도 안다.”

“…….”

모든 걸 다 알고서 왔다는 걸까. 그럼 언제부터 내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이미 알면서 왔다면,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황족으로 키워주겠다.”

“…….”

“누구의 아이던 네 아이라는 건 변함없겠지.”

네 애야. 내게 있어서 너 말고 누가 있겠어. 내가 사랑한 사람은 너라는 단 한 사람뿐인데.

“그러니 돌아와라.”

“…어디로 돌아가요?”

“짐의 곁으로.”

좀 놀랐다. 이안이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그 말을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날 죽이면 죽일 사람이지, 돌아오라고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나를 기억 못한다는 조건 하에. 그래서 저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나를 농락하는 말인지 의심을 했다.

“네가 짐의 곁에 있어준다면, 원하는 모든 걸 주겠다. 네가 바란다면 이 나라도 줄 수 있다.”

“…….”

“네가 원한다면 네 아이에게 황실의 성을 붙여주겠다.”

당황스러웠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과 행동들이어서.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해 준비를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제가 바란다면 다 해줄 수 있어요?”

“그래.”

“폐하와 더는 얽히고 싶지 않다고 해도요?”

“…곁에만 있어준다면, 뭐든 해도 좋다.”

일 년 전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인 것 같던 살기가 어린 흉흉한 눈이 아닌. 간절함이 가득한 온순한 강아지 같은 눈이었다.

“네가 사치를 일삼아도 되고, 네가 사람을 죽여도 된다.”

“그건 너무 극단적인 거 아니에요?”

“그저 곁에만 있어다오.”

정말 이 모습을 나는 믿어도 될까. 이 모습이 정말 날 사랑해서 하는 순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믿어도 되는 걸까.

이렇게 행동하면서 사실은 나를 죽일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기억이 없는 이안은 신뢰도가 없었다.

“그럼. 로즈마리를 풀어주세요.”

“그래.”

거짓말처럼. 내 말 한 마디에 로즈마리를 풀어주었다.

“짐이 거짓말을 한 건줄 알았나.”

“…….”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줄 수 있다. 그러니 짐의 곁에만 있어다오.”

“…저는.”

“네가 바란다면 뭐든 해줄 테니, 곁에만 있어다오.”

곤란했다.

“짐의 황후가 되어줄 수 있겠나?”

“…….”

“그대가 바란다면, 그대의 아이도 황녀로 입적시켜줄 수 있다.”

“제 아이는 대피를 시켰….”

말을 채 이어서 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항구에 도착했어야 하는 샤샤가 제복을 입은 기사의 품에 안겨 있었으니까.

“그대의 아이를 해칠 수는 없지 않은가.”

“…….”

섬뜩했다. 정말로 다 알고 온 게 분명했다. 치밀했다.

“아리에나.”

나긋하게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잠시 내가 아는 이안이 떠올렸다. 저렇게 나를 부를 때 다정하게 속삭였었다.

전과 같은 그런 서늘한 음성이 아니라,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사랑해 마지않은 그런 목소리였었다.

“황성으로 돌아가지.”

“…….”

“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되지?”

이름은 모를 수도 있겠다. 아무리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름까지 알아내긴 쉽지 않았겠지.

“샤를. 샤를이야.”

굳이 착하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존대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어차피 이안은 날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안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기분 좋아보였다.

그래서 그냥 기분이 나빠졌다.

“내 아이한테 손대지마.”

“그대의 아이라면 짐의 아이기도 하지.”

“…….”

무슨 개수작을 부리는 건지. 기억이 없다면서, 날 기억 못하면서. 아니 기억이 없어서 그런 건지, 내가 기억하는 이안보다 더 막나가는 것 같았다.

“황족의 일원으로 키워주겠다.”

“…….”

“짐의 아이가 아니더라도, 황족으로 키워줄 테니 괜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말을 할까? 샤샤는 네 애가 맞다고.

아니.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가 없다. 아니면 또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날 죽이려들지도 모른다. 정확히는 이안의 정신 상태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짐의 자식처럼 키워주겠다.”

신녀가 아니니, 미래를 볼 수도, 예언을 할 수도 없었고, 다쳐도 살려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안이 내뱉는 저 말이 진실인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

“짐의 황후가 되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의 답을 들을 수 있느냐 물었다.”

“폐하.”

황후가 되어달라는 말,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었다.

확실히 기억을 잃은 이안과 내가 알고 있는 이안은 정말 다른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극명한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안이 싫어하는 걸 찾았다.

이안은 자신을 폐하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것 같지만, 그런 건 안 해줄 생각이라. 좀 더 화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도 황후가 되어달라는 말을 했었는데…왜 내가 황후가 아닌지 몰라?”

“이제 더는 신녀가 아니니, 황후 자리를 거절할 명분도 없지 않느냐.”

어떻게 그걸 알았지?

그 때는 정말 이안을 사랑했지만, 신녀라는 벽에 가로막혀서 결혼이라는 것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황후가 되어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기뻤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네가 황후가 되고 나서, 황실에 먹칠을 해도 좋다.”

“…….”

“네가 짐의 이름으로 횡포를 부려도 된다.”

“…….”

“네가 짐을 원망하고, 증오한다면 죽일 각오로 황후 자리에 있어서 곁에 있어다오.”

황제는 한 쪽 무릎을 굽혔다. 당황스러움에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기억이 없는 이안이 무릎을 굽힐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당황하던 말 던, 이안은 내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새까만 밤하늘과 달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다. 홀린 듯이 따라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널 두 번 다시 죽이려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

“…….”

“그러니 짐의 황후가 되어다오.”

“…날 사랑하긴 해?”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그 같잖은 미련이 네 발목을 붙잡기라도 한 거야? 그도 아니라면 그냥 감정의 잔재가 널 이렇게 움직이게 만드는 거야?

무엇이던 상관없었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네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황후라는 자리를 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네 손에 죽어서, 나중에 기억이 돌아올 너를 후회로 가득 물들여주고 싶었다.

네 손으로 날 죽이는 것보다 더 널 아프게 하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

“거 봐. 대답하지 못하잖아.”

그냥 미련이었고, 감정의 잔재에 집착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나도 헛된 희망을 갖지 말아야 했다. 이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희망이 나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날 사랑하지 않으니까. 날 황후로 맞이하고 싶다는 건, 그냥 기억나지도 않는 감정의 잔재일 뿐인 거잖아!”

“…그대는!”

“황후라는 자리 필요 없어.”

기사가 안고 있던, 샤샤를 품에 소중하게 안았다. 이제 더는 볼 일이 없었으니까. 항구 쪽으로 달리면 제국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대로 영영 이안을 보지 않으면, 아니 이제 이안을 봤으니까 충분했다.

더는 이안을 그리워하면서 바보 같이 기다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젠 모든 미련을 이곳에 떨구면 될 것만 같았다.

“멈춰.”

“…….”

무시하고 그냥 가려고 했다. 이안이 내게 칼을 뽑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이안이 날 사랑하지 않더라도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확신이 존재했다.

죽일 거라면 이미 진즉에 죽였을 테니까. 아직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건, 죽일 생각이 없거나, 죽이지 못하는 게 분명했으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라, 네가 상처 받길 바랐다. 널 상처주고 싶었다.

“사랑하고 있다.”

뒤에서 들려오는 그리 자상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이안에게서 너무나도 듣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다. 죽이고 싶은데 죽일 수가 없다. 이따위 말들이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너무나도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말을 내뱉어서, 결국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떠나려던 의지조차 멈추게 만들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황후가 되어달라는 말도.”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이안이 아주 가까이에 있을 것 같아서.

“짐의 아이가 아닌 네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워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널 죽였겠지.”

이안이 뒤에서 날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단단한 이안의 몸이 등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안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내 심장 소리거나.

“널 사랑하니까. 널 곁에 붙잡아 두고 싶어 하는 거다.”

이안의 숨결이 목덜미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빠르게 뛰는 소리가 이안에게 들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널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처음 본 순간에 죽였겠지.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 망설이지 않고 널 죽였겠지.”

“…….”

“그러니 짐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런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너는 나를 간절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내게 있어서 더는 네가 1순위가 아니라서.

내게 있어서 1순위는 샤샤였다. 더는 내게 있어서 네가 우선이 아니었다. 그래서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널 사랑하지만, 너보다는 샤샤를 더 사랑했다.

“샤를을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도록 해주겠다.”

“…….”

“너 없이는 더는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애원이었다. 그것도 나를 뒤흔들 만큼 간절한 애원이었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다.

“네 아이에게도 황족으로 살아가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샤샤를 통해 내 발목을 붙잡을 생각인 걸까. 샤샤를 황족으로 키우면, 내가 샤샤의 곁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날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걸까.

“황족으로, 짐의 자식처럼 키워줄 테니…황후가 되어 짐의 곁에 있어다오.”

명백한 애원이었다. 가슴이 절절해지는 그런 간절하고 처절한 애원이었다. 이안은 샤샤가 자신의 친자식인 걸 모르는 상태에서 저렇게 말을 할 정도라면, 그만큼 간절하다는 거겠지.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으마. 그저 옆에만…곁에만 있어다오. 네가 바란다면, 네 아이를 후계자로 키워주마.”

“…진심이야?”

너는 샤샤가 네 아이인 걸 모르면서도 그렇게 쉽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있어?

심장이 쿵쿵 거렸다. 심장이 꼭 터질 것 같았다.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몸을 돌렸다. 이안과 시선을 마주보기 위해서. 이안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다소 충동적으로 몸을 돌렸고, 고개를 들어 이안의 얼굴을 보았다.

“진심이다.”

눈동자만큼은 애절했다. 나는 어떤 선택을, 아니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이안을 거절하는 게 맞는 걸까? 막상 또 저 눈을 보니 거절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거절하고 싶어도,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그런 간절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어서.

“네가 바라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

“내가 바라는 건 뭐든지?”

이안에게 아주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내 뺨에 이안의 손이 닿았다. 마치 체온을 확인하는 듯 했다. 뺨을 쓰다듬는 손길마저도 조심스러웠다.

“그래. 뭐든지.”

애틋한 눈동자를 하고서, 그 눈에는 오로지 나만을 담아내고 있었다.

“네가 짐의 옆에 있어준다면, 이 세상의 땅을 모두 네 손에 쥐어주겠다.”

사탕 발린 너무나도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예전에도 저렇게 말을 해서, 그 때와 겹쳐보였다. 마치 이안이 기억을 되찾은 것처럼, 예전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러니 돌아가자.”

내가 기억이 없었을 때, 이안이 나를 향했던 눈빛과 똑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술이 쉬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이안.”

결국 움직여지지 않던, 입술 사이에서 내뱉은 말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거였다.

품 안은 샤샤를 더욱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눈에 띄게 좋아하는 게 얼굴에 환하게 드러났다.

“내가 따라가면, 정말 했던 말 지킬 수 있어?”

“모든 걸 걸고 맹세하마.”

“정말?”

“그래. 짐의 심장을 걸고, 맹세하마.”

너무 가까웠다. 이안의 손이 내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러고서는 내 옆 머리카락을 내 귀 뒤에 꼽아주었다.

“예쁘군.”

나른한 웃음을 지은 채로, 낯 뜨거운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진짜 말을 하는데 망설임이 전혀 없는 걸 보니 이안은 이안이라는 느낌이 강렬했다.

이안은 겉에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더니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리고서 내가 안고 있던 샤샤를 데려가서는 나를 대신해서 안았다.

“밤바람은 차가우니, 걸치고 있어라.”

“…….”

이안이 걸쳐 준 겉옷을 손으로 꽉 잡았다. 체온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따뜻했다. 곤히 잠든 샤샤를 안고 있는 이안의 모습이,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핏줄은 핏줄인 것 같았다.

샤샤도 깨지 않고 잘 자는 걸 보니까, 이안은 알아보지 못해도 샤샤는 무의식적으로 이안을 자신의 친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젠 대답을 듣고 싶군.”

“…어?”

“짐의 황후가 되어줄 텐가?”

신녀였던 시절에, 황후가 되어달라는 말에 수도 없이 고민을 했었다. 신녀라서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