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거짓말이야

아침이 온 건지, 햇빛이 감긴 눈을 찔렀다. 그러다가 나를 꽉 껴안고 있는 단단한 팔과 함께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고개를 돌려서 옆을 보니, 이안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 대부분의 기억이 돌아왔다. 완벽히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기억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떠올린 기억들로도 충분히 내가 이안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안의 잠들어있는 얼굴마저도, 잘생기긴 했다. 내가 과거에 이안을 사랑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저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납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저런 조각 같은 얼굴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만 신전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는데, 온몸을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전신에 근육통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움직임 하나하나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사제들이 내가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에 돌아가야만 했다.

베일을 쓰고 옷을 다시 껴입었다. 아직 방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부 위로 남은 생채기들은 신의 권능을 사용해서 전부 흉터 하나 없이 치료했다.

“…이안.”

적어도 네가 악몽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악몽을 꾼다고 했지만, 이제부터는 악몽을 꾸지 않아서 네게 불면증이 온전히 완치가 되었으면 좋겠어.

이제는 너한테 잘 찾아올 테니까.

“먼저 가볼게.”

곤히 잠들어 있어서, 들리지는 않겠지만 그냥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다. 혹여 이안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이안이 제대로 잠을 잘 수 있는 날은 별로 없다고 들었으니까. 모처럼 잠에 든 것 같으니 스스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게이트를 이용해서, 신전으로 돌아갔다.

다행인지, 아무도 내 방 근처에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도 얼얼한 몸을 이끌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내 방으로 돌아가서 누웠다.

“끄응!”

신의 권능을 빌려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근육통이었다. 이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신의 권능은 외상을 치료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근육통 같은 경우에는 치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고통은 고통으로 무마한다는 생각으로 운동이 아닌 운동을 했다.

이안은 확실히 몸이 좋긴 좋았다. 전쟁터에서 살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누가 보아도 탄탄한 근육과 흠잡을 곳 없던 몸. 새로운 기억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애써 그런 불순한 생각을 접고, 순수한 생각을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신녀의 신분으로 무슨 짓을 한 건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정말 신의 앞에서 무슨 일을 한 건지. 전혀 떳떳하지 못할 일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음…신께서 다 아시려나…?”

요즘 잘 안 오셔서 그런 거다. 그러니까 심심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한 거였다. 이건 전지적으로 나의 신 탓이 분명했다.

너무 억지스러운 생각이려나. 여기서 기도를 한다면, 신께서 내 기도에 응해주실 게 분명했지만, 먼저 신을 불러낼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신께서는 전지전능한 분이시니 분명 말을 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계실 거였다.

그러니까 굳이 먼저 신께 말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신이시여.”

죄송합니다. 신의 아이인 제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러니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신께서 이런 저를 용서하십시오.

흑흑. 역시 그래도 이렇게 기도하며 사죄를 하는 게 옳은 거겠지? 신녀만 아니었어도 전혀 이렇게 사죄할만한 행동은 아닌데.

“제가 잘못 했어요….”

두 손을 꼭 모아 기도했다. 사죄의 기도를.

[네 잘못이 무엇인데 그러하느냐.]

“…신님?”

아…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는데. 아직 진실을 털어놓을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시다니. 꼭 이럴 때만 빨리빨리 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정말요?”

[그래. 네가 바라는 대로 하거라. 네가 걷는 그 길이 곧 네 운명일 테니.]

“…진짜요?”

[그래. 머뭇거리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네 편이니까.]

나의 신께서 저렇게 말을 해주니 안도했다. 혹여 신께서 반대를 하면 어쩌나 했지만, 오히려 내 편을 들어주어서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신녀님. 식사 준비 해왔는데 일어나셨나요?”

“네, 일어났어요!”

다급히 문을 열고 음식을 받았다. 아침을 먹기에 조금은 늦은 감이 있었지만, 아마도 아까 왔었을 때 내가 황성에 있을 때 왔던 것 같았다.

허기를 면할 정도의 아침을 먹고, 씻었다. 그래도 씻고 나니까 몸이 확실히 개운했다. 근육통도 조금 완화된 것 같은 착각이 든 것 같기도 했다.

이제 할 일은, 로즈마리가 말한 자선 파티에 참여하는 것뿐인데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조금 화려한 예복을 입는 게 맞을지, 아니라면 평소 입는 수수한 예복을 입는 게 맞을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다른 사제님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녀님?”

“아…오늘 신전으로 기부금을 주겠다는 귀족 가문에 참석을 해야 하는데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요.”

“그런 건 저희 전문이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기분 탓이길 바랐다.

“저희한테 맡기세요!”

“자선 파티예요….”

“네네! 그러니 화려한 예복을 입어야지요!”

사제님들한테 둘러싸였다.

“예복만 입고 오시면, 저희가 머리도 전부 만져드릴 테니 어서 준비하고 오세요!”

등이 떠밀려서, 가장 화려한 예복은 좀 과하다 싶은 감이 있어서 평소에 입는 것보다는 화려한 예복을 꺼내서 입고 나왔다.

사제들은 마음에 안 차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옷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옷에 대해서는 체념을 한 듯 하고 나를 의자에 앉히고서는 다들 내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늘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었다면, 지금은 사제들의 손을 빌려서 올려 묶었다.

“신녀님만 아니었어도 더 화려하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자선 파티였고,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아니에요. 이 정도면 훌륭한 걸요.”

딱 신녀의 위치에 딱 맞는 선상에서 최대한 꾸민 듯한 모습이었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신녀라는 것을 알리는 듯한 신성함과 절제된 화려함이 조화를 이루었다.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셀린 공작저에 가야만 했으니까.

“이만 가볼게요.”

“네! 잘 다녀오세요!”

“몸조심하세요!”

무슨 다들 내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처럼 말을 했다. 그냥 셀린 공작저에 가는 것뿐인데. 아니 다들 저러는 것이 이해가 가긴 갔다.

일단 나는 이방인이었으니까. 망국의 왕녀 출신인 것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망국 출신의 이방인이니 제국인이라면 당연히 배척할 것이 당연했다.

지금 교단이 커지지 못하는 이유 역시, 망국 출신의 국교였기에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할지라도, 거리낌 없이 개종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황제인 이안이 팍팍 밀어준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까지는 바꿀 수 없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 괴로움은 셀린 공작가의 기부로부터 끊어낼 수 있을 테니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이제는 진짜로 가야해요.”

“다녀오세요, 신녀님!”

모두가 손을 흔들며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었다. 웃음이 터져 나올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마차에 탔다. 이 마차 역시, 로즈마리가 보낸 마차였다.

“다녀올게요.”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화답하듯 나 역시도 손을 흔들었다. 지금의 평화로움이 좋았다.

느껴지는 안정감이 좋았다.

마차에 어느 정도 있었던 걸까. 체감 상으로는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 조금 빠르게 도착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차에서 조심스레 내려오자, 많은 귀족들이 이쪽으로 시선이 몰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는 내 갈 길을 갔다.

나 역시도 손님 자격으로 방문한 것이 맞으니까.

다들 나를 보는 것 역시 이해가 되었다. 이방인도 그냥 이방인이 아닌 소문이 무성한 평범하지 않은 이방인이었으니까. 그것도 황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런 이방인.

귀족들이 흥미로워하는 것이 당연한 자극적인 소재의 주인공이었으니까.

“어서 오세요, 신녀님.”

나와 로즈마리는 겉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운명을 읽을 줄 아는 내가 로즈마리의 운명을 읽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그런 정도의 친분으로 다른 이들이 알고 있을 터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셀린 공녀님.”

예의를 한껏 차린 모습이었다. 스스럼없던 사적인 만남과는 서로가 사뭇 달랐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한 것을요.”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정말 로즈마리의 말대로 이곳은 온전히 귀족들만이 존재했으니까. 신전의 후원자를 얻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니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 해야만 했다.

신께서는 내가 걷는 길이 곧 내 운명이라고 했으니까. 내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내가 개척하는 거라고 말하는 거였다.

파티가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는 약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다른 귀족들 역시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눈치였다.

눈치가 빠른 로즈마리는 잠시 할 일이 있으니, 곧 돌아올 거라면서 이곳에서 퇴장했다.

가장 큰 권력자가 사라졌으니, 다른 귀족들이 내 근처로 다가왔다. 딱히 나는 거절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들이 움직임에 껄끄러워하지는 않았다.

이 모두가 신전의 자금줄이 될 테니까.

“신녀님이시면…제 운명을 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미래를 예견하신다는 것을 소문으로 익히 들었는데, 제 미래를 봐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이방인이기 이전에, 유명한 신녀였다. 그래. 로단테 왕국에 존재하는 신녀는 타국에서도 유명했으니까. 전혀 무시할 수가 없는 존재와도 같았으니까.

이방인이라는 것에는 분명한 거부감이 있지만, 신녀라는 존재가 그들의 호기심을 자아냈다.

“미래나 운명은 제가 보고 싶다고 함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확정된 미래는 알려드릴 수 있지요.”

싱긋하고 자본주의적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오늘 형제분이 돌아오시겠고…그대는 그대의 강아지의 운명이 오늘 달리할 것이니 오늘만큼은 곁에 있어주세요.”

변치 않을 미래이니, 아마도 내일 신전에 사람들이 넘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예감이었다.

재정적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아서.

“여러분! 다들 기다리셨나요?”

주최자는 로즈마리였던 것 같았다. 공작도, 공작부인도, 공자도 아닌 오로지 공녀인 로즈마리의 독단적인 행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 액수의 금액이 신전의 기부금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여러 가지 물품들이 쭉 나열되기 시작했다. 어차피 셀린 공작가에서 주는 기부금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될 거였고, 신전의 자금은 여기 있는 귀족들에게 뜯어낼 요량이었다.

그러니 자선 파티는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고, 자선 파티 속에서 로즈마리가 소공작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카드를 쥐어주어야만 했다.

물품들이 오고가고, 자선 파티의 주요 행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입을 열었다.

“셀린 공녀님은 강한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신녀님?”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공녀님께서는 가문의 부흥을 부르실 겁니다.”

이미 짜고 맞추는 거였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연기를 능숙하게 해냈다. 그리고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기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람은 이안이었다. 분명한 황금빛 눈동자였으니까.

부정하려해도 부정할 수가 없을 만치 선명한 금빛 눈동자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일단 로즈마리와 짜놓았던 시나리오가 있으니, 갑자기 볼 일이 생겼다고 해도 멋대로 사라지면 서로에게 곤란한 상황이 닥칠 게 분명했다.

말과 행동을 미리 계획했던 대로 이행하고서, 로즈마리한테 양해를 구하고 다급히 이안이 있었던 곳으로 달려갔다.

혹여 내가 잘못 본 것일지도 몰랐지만, 내가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잘못 본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금색 눈동자였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정말, 로즈마리의 말대로 이안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던 거였을까?

그래. 근데 예전이면 저렇게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 피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이는 결코 평범한 사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끝까지 갈 때까지 간 사이인데, 왜 피하는 건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억…헉….”

내 체력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평소에 강행군을 한 적도 없고, 신전은 오로지 평평한 대리석들로 되어있었고, 계단은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오르막조차도 신전 외부에만 존재했기에, 이렇게 많은 계단을 오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정말 나약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몸이라고 욕을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벌써부터 헉헉거리며 벅찬 숨을 토해내는 내 몸이 정말 약해 빠졌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숨이 턱 아래까지 턱턱 막혀서 더는 움직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다리 힘은 풀려서 그 자리에서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머리를 벽에 기대고 숨을 고르는 사이에 내 주변으로 누군가 온 것 같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그 인기척의 주인이 이안일까 싶어서 고개를 들었지만, 새까만 머리카락 대신 밀 색 머리카락이 보여서 예상을 빗나가서 그런지 실망감이 배로 들었다.

그래도 한숨이 터져 나올 법했던 것만큼은 참아냈다.

“신녀님이시죠?”

자세히 보니 로즈마리와 똑같은 밀 색 머리카락에, 녹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형적으로 생긴 또래의 성인 남자였다.

이안처럼 예술품이나 조각상을 연상시킬 정도의 완벽하게 잘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특별히 모난 구석이 없고, 반반하게 생겼다고 정의를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생긴 얼굴이었다.

최종적인 평으로 이 정도의 외모라면 영애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었을 거라는 정도.

“패트릭 셀린이라고 합니다, 신녀님.”

뭐, 대충 예상을 하긴 했었다. 셀린 공작가에 내 또래의 성인은 딱 둘 뿐이니까.

나와 친분이 있는 로즈마리와 셀린 공자. 단 둘 뿐.

“…저를 아시는 모양이니 굳이 제 소개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다소 쌀쌀맞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셀린 공자는 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저 손을 잡고서 일어나라는 의미겠지.

거절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그 호의적인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다. 딱히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