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우리가 사랑했던 그 때

모든 게 지루했다. 흥미도 없었다. 이름 모를 왕국의 신녀라는 존재가 내게 예언을 했었다지만, 별로 감흥이 없었다. 재앙의 운명이라나 뭐라나 말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나태하게 지냈다.

외국의 왕족들이 제국에 오기 전까지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또래의 애들이 있는 것이 창문 밖으로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애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았다. 여러 명이서 한 명을 괴롭히다니 저열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는 저 여자애 한 명을 물에 빠뜨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래도 당황은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물에 젖은 여자애를 보면서 웃는 모습을 보니 가증스러웠다. 그냥 신경을 끄려했었다.

그런데 이어서 보인 광경은 조금 충격이었다. 울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애는 우는 대신에 자신을 물에 빠뜨린 형제로 추정되는 남자애들의 머리채를 잡아서 물에 빠뜨리고, 자매로 추정되는 여자애들은 친절하게 물에 떠밀어 주었으니까.

처음부터 저렇게 할 깡이 있었다면, 굳이 괴롭힘을 당해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

너무나도 맑은 하늘을 담아낸 듯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대로 모든 것이 멈추었다.

아주 멀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서 가깝지도 않았다. 저 애는 나를 보고서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렇게 눈을 마주쳤었고 내게 웃어주었지만, 이내 나를 무시하고서는 물에서 기어 나오는 남자 애들의 머리를 발로 잘근잘근 밟는 모습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런 행동을 하면서 나를 향해 지었던 미소와는 다른 웃음을 짓고 있는 표정을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성격이 결코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

어쩌다가 또 마주친 것인지, 되도록 피하고 싶었었는데, 의도된 바 없이 이렇게 마주쳐 버렸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지만, 왜인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얼굴이 왜 그렇습니까.”

어제 자신을 괴롭히던 이들을 똑같이 응징하면서 웃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하고 왜 얼굴에 자잘한 상처가 생긴 것인지 물었다. 그리고 얼굴은 생채기 정도만 난 거였다.

팔목 부분에는 멍이 든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한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누가 이랬습니까.”

이름도, 어느 나라 사람인 줄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제국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한 말을 과연 알아들었을 지가 의문이었지만.

“말할 수 없어.”

“…….”

“말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생각 외로, 제국어를 제법 구사했다. 나랑 또래로 보이는데, 2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게 제법이었다.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왜?”

“말해줄 수 없어.”

어차피 계속 물어봐도, 대답은 같을 것 같아서 따라 오라고 손짓했다. 원래는 산책 정도만 하려고 나왔었는데, 이 애가 다친 걸 보고서 다시 돌아왔다. 혼자 나갔는데, 누군가와 같이 돌아왔다. 그리고 궁의를 불렀다.

“제국어는 언제 배운 거야?”

일단 의자에 앉혔다.

아까 보니까, 다리는 드러나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걷는 움직임이 살짝 이상하던 것을 보아, 다리도 다친 것 같았다.

“말만 할 줄 알아.”

“누구한테 배웠어?”

다리를 다친 사실까지는 모르는 척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까 이런 일이 아주 없는 일 같지는 않아보였다. 주제는 다른 쪽에 두었다.

“내 엄마가 제국 출신이야.”

“귀족?”

“아니. 연극배우 출신.”

하긴, 귀족의 딸이었다면, 이런 대우를 받았을 리가 없겠지. 아마 대충 눈어림으로 보기에 이 상처는 어른의 폭력으로 생긴 상처 같았다.

“안 아파?”

“아파.”

“…….”

상처 부분을 살짝 건드리자, 얼굴을 찡그리는 게 엄살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엄살일 수가 없겠지. 한 눈에 보아도 옅은 상처는 아니었으니까.

작정하고 때린 것 같았다.

“아프면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라, 궁의를 찾아갔어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

“내가 다쳐도 상관하지 않아. 다들 내가 사라지는 걸 원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에 왼쪽 가슴 부근이 욱신거렸다. 위로해주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았다. 왜일까. 정말 예쁘게 생긴 천사처럼 생겨서 이런 이름 모를 감정이 쏟아 오르는 걸까.

“그럼 왜 나를 찾아왔어?”

“찾아왔다기 보단….”

“…….”

“길을 잃은 거야.”

어쩌면 저 말이 이 애다웠다. 아직도 어제의 그 소름끼치는 웃음이 떠올랐으니까.

“너 이름이 뭐야.”

“알고 싶어?”

그냥 알려줘도 될 텐데,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건지.

“아냐. 갑자기 알고 싶지 않아졌어.”

“이안.”

“응?”

“내 이름이라고.”

“예쁜 이름이네!”

환한 웃음이, 무척이나 예뻤다. 마치 꽃이 활짝 피어나는 과정을 두 눈으로 담아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웃음으로 사람을 홀릴 수 있다면, 수도 없는 사람을 홀려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는 네 이름은?”

“나?”

“어.”

이 때, 방문을 열고 궁의가 들어왔다.

“이 애가 많이 다쳤어.”

“…전하?”

“내가 다친 것도 아니고. 내가 다치게 한 것도 아니야.”

혹시라도 궁의가 괜한 오해를 할까봐. 오해의 소지는 접어두기 위해 미리 말을 했다.

“치료해줘.”

“네.”

얼굴에 있던 자잘한 생채기들에 약을 발라 주고는 궁의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저 애도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눈빛으로 뭐냐고 말을 할 거면 하라고 궁의한테 눈치를 줬다.

“…그게 전하께서 함께 계시면 곤란할 것 같아서요.”

“왜?”

“팔이랑 다리만 성하지 않은 게 아니라 서요.”

“…알겠어. 나가 있을 테니까, 다 끝나면 말해.”

“네.”

방 밖에서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팔이랑 다리만 다친 게 아니라면, 어디를 더 다쳤다는 건지. 나도 어리긴 하지만, 누가 저 어린 애를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한 것인지. 일단 친엄마라는 사람은 그럴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본 적은 없지만, 눈빛에서는 그 때의 그 미친 듯한 광기가 전혀 섞여있지 않고, 오히려 슬픔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으니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아니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의문이 들었다. 이 정도면 내가 해줄 수 있는 도리는 다 한 건데.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전하. 다 끝났습니다.”

제 갈 길을 간다고, 치료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궁의를 보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적어도 이름은 알아야 할 것 같았으니까.

“고마워.”

“…….”

“진심이야.”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어색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고맙단 인사말이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가 있는 건지 오늘 처음 알았다.

“너.”

“응?”

“이름이 뭐야.”

“내 이름?”

“어.”

“궁금해?”

드레스 소매 자락 사이로는 이제 시퍼런 멍 자국 대신, 붕대가 보였다. 아마도 내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나는 이름 알려 줬잖아.”

“알고 있었어. 원래부터. 혹시나 해서 확인 차에 물어봤던 거야.”

“허….”

“벨리아르 제국의 황족이잖아. 신탁을 받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신녀님은 좋은 분이거든.”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아마 제국어가 서투른 편이라서 온전한 의사 전달이 어려운 것 같았다. 그래도 이해가 됐다. 아마 신녀라는 존재가, 저 애한테 있어서 안식처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아마 본국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치료해주는 사람은 궁의가 아닌, 신녀라는 존재 같았으니까.

“그래서 너 이름이 뭔데.”

“아리에나 로단테.”

“…….”

로단테라면, 나한테 예언의 말을 한 그 정체 모를 사람이 있는 왕국 이름인 것으로 기억이 났다.

“그게 내 이름이야.”

“의외네.”

“…뭐가?”

“이상한 이름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생각보다?”

“예뻐서.”

왠지 말을 잘못하면, 어제 머리채를 잡힌 채로 물속에 집어던지던 이 애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저절로 입 발린 소리가 나왔다.

“그래?”

“갑자기 아닌 것 같아.”

“왜 갑자기 말을 바꿔?!”

“너는 제국에 언제까지 머물러?”

“우리는 좀 일찍 온 편이라, 아마…이번 연회가 끝나고 나흘 뒤에 가지 않을까?”

그럼,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시간이 있다는 것. 어쩌면 이 애에게는 지옥 같을 일주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일도 와.”

“응?”

“네 얼굴에 상처 나서 더 못생겨지면 어떡해.”

“…좀 충격이네.”

“뭐가?”

뭐가 충격이라는 건지.

“네 말 대로면 나는 지금 못생겼단 소리잖아.”

“…말이 그렇게 해석되나?”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못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거든? 나 때린 사람도 내가 쓸데없이 예쁜 내 엄마를 닮아서 짜증난댔어.”

그건 자랑이 아니지 않나?

일단, 하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이 애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는 것. 그건 분명했다.

“예쁜 얼굴에 상처가 남으면 안 되잖아.”

“내일 또 와도 돼?”

“어.”

“그럼 너 내일 여기에 있을 거지?”

“그래.”

새 한 마리를 키우는 것 같았다. 조잘거리는 게 꼭 새 같았다. 겉모습은 백조인데, 성격은 영 아니었다.

솔직히 이 애의 얼굴은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예뻤다. 쟤보다 더 예쁜 사람을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 심장이 평소보다 이상한 것은 저 애의 얼굴이 특출나게 예뻐서 그런 거였다.

“이안.”

“…….”

“나 다친 거는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

“그거 소문나면 본국으로 돌아가면 더 맞아.”

아, 생각보다 힘들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 로단테라는 왕국 이름을 성으로 쓰는 거라면 왕족이라는 것인데. 아마 왕비한테, 학대를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이번이 처음 같지는 않았다. 꽤 아팠을 법도 했던 쓰라린 상처들이었는데도, 아픈 것을 크게 내색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덤덤한 편이었다. 익숙하다는 듯한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아니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죽을 지도 모르지.”

“…….”

“날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신 분이니까.”

“그 때 있던 애들이야?”

“…언제?”

“어제.”

너를 괴롭히던 애들. 네가 응징할 수 있음에도 먼저 때리지 못하던 이유가, 걔들이 먼저 때리지 않으면 정당방위를 인정해주지 않아서?

그래서 물에 빠지고서야 응징을 한 거야?

그런데도 이런 커다란 상처들의 이유는, 그들이 왕비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걔들이 너를 먼저 괴롭혔어도 네가 맞은 거야?

어떻게 어린 애한테 이렇게 상처를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건지.

“내가 제일 만만해서 그래.”

“…….”

“나만 엄마가 평민이라서 만만한 거야.”

“…….”

“나는 반쪽짜리 왕녀야.”

조금 애잔했다. 반쪽짜리라는 말이 저렇게 슬프게 들리던 말이었을까.

“아마 너는 이해 못할지도 몰라.”

“…왜 그렇게 생각해?”

“너는 황후 폐하의 소생이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린 애한테 이렇게 때리는 것은 정말 못된 짓이었다. 어떻게 어린 애한테 사정없이 시퍼런 멍이 들 때까지 때릴 수 있는 건지. 조금만 더 때렸다가는 죽일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너는 엄마가 있잖아.”

“…….”

저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담담해 보였지만, 느껴지는 떨림. 아마도, 이 애의 모친은 사망한지 꽤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서, 이런 학대를 받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만만하면서, 보호자가 없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아리에나.”

“왜.”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와.”

“…….”

“어차피 나도 심심하니까.”

심심하다는 것에는 거짓이 없었다. 다만,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라는 말은 추가된 요소가 맞았다.

“내일 또 와.”

“응!”

역시 이 애는 활짝 웃는 얼굴이, 보기가 좋았다. 더 자연스러웠다.

*

아침이었다. 멀리서 은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예쁘장한 여자애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언뜻 비친 팔목에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이안!”

문을 확 열고서 들어오는 모습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멀리서 봤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왜 가까이서 보니까 심장이 자제력을 잃는지.

“…몸은 괜찮아?”

“가끔 있는 일도 아닌걸.”

“…….”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얼굴이 안타까웠다. 폭력에 익숙해진 듯한 모습이 애잔했다. 가끔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많이 있는 일이라는 것인데.

어쩌면 이 애한테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일 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