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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다가온 이장 선거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장 선거 날은 다가왔고 어른들 모두 마을 회관으로 갔다.
찬미는 옷장을 열고 마음에 드는 옷들을 모두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중 작년에 엄마가 사다 준 분홍색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오빠가 과외 해준다며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말로만 듣던 은밀한 과외.
그것도 단둘이, 신난다.
찬주는 언니가 히죽거리며 옷을 갈아입자 신기한 듯 쳐다봤다.
“애 저녁에 뭔 지랄인지?”
“말 이쁘게 해라.”
“애 저녁에 뭔 지랄이세요?”
“넌 가만 보면 입으로 매를 벌어.”
“그렇다 치고, 아낀다고 안 입던 옷을 야밤에 왜 입어? 어디가?”
“고목나무집에 가는데.”
“뭐하러? 이번에도 파티 있어? 그럼 나도 데리고 가.”
“공부하러 가거든?”
“퍽 도, 님 보러 거는 건지 뽕을 따러 가는 거지.”
비아냥거리는 찬주의 머리에 꿀 밤 한 대 먹이고 보조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고목나무집에 도착하니 오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빠.”
미노는 환하게 웃으며 찬미에게 다가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뭐 좀 챙기느라.”
“들어가자.”
찬미는 미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마냥 행복했다.
이 두근거림, 오빠도 나처럼 설레었나 보다. 그러니 나와서 기다리지.
두 사람은 2층 미노의 방으로 향했고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괜히 설렜다.
오빠 방이라니.
마치 금녀의 방으로 가는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 기분으로 공부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잠시 후 미노가 방문을 열었고 한껏 달아올랐던 찬미의 얼굴이 굳었다.
“김찬미, 왜 이렇게 늦었어?”
아이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뭐냐? 그 옷차림은?”
“뻔하지 뭐.”
방에는 은자와 미자 그리고 대봉이 펴진 큰 상에 앉아 있었고 찬미는 실망하여 입을 삐죽 내밀었다.
미자는 찬미의 표정을 보며 픽 웃으며 얄밉게 말했다.
“왜 우리가 있어서 실망했어?”
이에 은자는 한술 더 떴다.
“은밀한 과외가 물 건너갔으니 오죽하겠니. 아유 어째서 부끄러움은 우리 몫인지.”
“으, 은밀한?”
미노는 눈을 크게 뜨고 은자를 쳐다봤고 찬미는 아이들 놀림에 얼굴이 빨개졌다.
저것들이 진짜.
“윤은자, 너, 그만해.”
“싫은데?”
아이들이 찬미 몰이에 재미 붙자 대봉도 거들었다.
“우리 찬미가 알고 보면 화끈하지. 너희들 말이야, 비 오던 날 밤에.”
“밤에 뭐?”
아이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봉을 쳐다봤다.
미노는 대봉마저 나서 그날 일을 꺼내자 더욱 당황해 말을 끊었다.
“우선은 일주일 동안 배운 거 토요일 일요일 같이 복습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자.”
“네.”
찬미는 키득키득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대봉을 노려봤다.
저 화상, 조만간 작살낸다 내가.
다들 진지하게 미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솔직히 걱정되었다. 지금 상태라면 분명 친구들보다 뒤 쳐져 진도를 못 따라갈 텐데.
그 부분에 대해 미노도 걱정하는 건 마찬가지다.
“찬미 넌, 학교에서 틈틈이 보충학습 해줄게.”
“진짜요?”
“응, 그러니까 열심히 따라와야 해.”
“네.”
왠지 지금이라면 공부라는 걸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일부러 씩씩하게 답했다.
또 하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게 있었다.
“지금 이 멤버로 만 공부해요?”
“왜?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있어?”
미노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 입을 뗐다.
“희주요 같이 하면 좋겠는데.”
미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 같이하자고 했는데 싫다네.”
솔직히 다른 아이들도 희주가 마음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지만 같이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은 같았다.
그 시각 희주는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싫다고 했지만 사실 그 싫다는 말이 진짜 싫어서가 아니었다.
괜히 조바심 나고 짜증 나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쳇, 별것도 아닌데.”
괜히 자신만 왕따 된 기분이 들었다. 더는 방에 있기 갑갑해 살짝 밖으로 가 오빠의 방문 옆에 섰다. 안은 대체로 조용하다가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신났네, 신났어.”
짜증 나 바로 1층 거실로 내려가 TV를 켰다.
*
마을 회관에는 투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동주도 대평도 일찍 나와 투표장 입구에 서 있었다. 까만 양복에 멋진 머리를 한 동주와 대조적으로 대평은 까까머리에 후줄근한 잠바 차림으로 서 있었다. 지금 대평의 모습은 조폭을 연상시킬 정도로 험악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대평이는 왜 저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
“원래 그러게 싹싹한 인상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아유, 서울 양반 양복 입으니까 인물이 훤한 게 꼭 연예인 같네.”
“찬미 아버지도 참, 오늘 같은 날은 좀 차려입지.”
“촌사람이 양복이 어디 있어? 이장 선거에 무슨 양복이야 양복은.”
“아유 양복은 그렇다 치더라도 머리를 왜 저렇게 밀었데.”
사람들이 제법 모이자 동주는 쪽지를 들고 단상 위에 올라섰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동주의 행동에 주목했다.
“저는 이번에 이장 선거에 출마한 강동주입니다. 마을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저는 마을 사람들의 정감 있고 따뜻한 마음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해서 제가 좋아하는 이 마을을 좀 더 현대적이고 도시적으로 발전시켜서 마을 사람들이 좀 더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겠습니다. 우선, 제 사비를 들여서 집집마다 수도를 설치할 것이며, 좁아서 겨우 경운기 한 대 지나갈 수 있던 길들을 모두 넓힐 것을 약속하고, 밤에 어두워서 다니지 못하던 골목에 가로등 설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잠시 사람들의 반응을 본 뒤 꾸벅 인사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은 지금껏 없었던 동주의 연설에 감탄하며 대평을 쳐다봤다. 게다가 공약들 하나하나가 마을에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미쳐 생각지도 준비도 못 한 대평은 당황했다.
“대평이 형님 할 말 없어요?”
“내가 이장을 몇 년 했는데 할 말이 있겠어.”
여평은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럼 이참에 이장 한번 쉬어. 그동안 힘들었잖아. 올해 쉬고 내년에 다시 하면 되겠네.”
영선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기운이 빠졌다. 특히 여평 아재에게 더욱 서운했다. 물론 자신도 남편이 이장을 그만했으면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그건 대평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마을 사람들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나름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
“에이 힘들더라도 보람은 있죠. 마을을 위해 봉사하는 게 얼마나 뿌듯한데요.”
“한데 머리는 뭐하러 밀었어? 너 밤에 돌아다니지 마. 경기하겠다, 조폭도 아니고.”
영선은 몇몇 마을 사람들이 작정하고 남편을 떨어뜨리기 위해 깎아내린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저번 회의 때 보니까 뒷머리 쥐 파먹은 거처럼 파였던데 그것 때문에 밀었나 보다.”
“네 그랬습니다.”
대평은 마지못해 답을 하며 옆에 서 있는 동주를 힐긋 쳐다봤다. 인물이며 비주얼이며 자신이 봐도 참 멋지다. 왜 이렇게 처량하고 비교되는지 참.
잠시 후 투표가 시작되었고 투표는 처음부터 박빙이었다. 98대 98이 되었고 마지막 한 표만 남은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긴장하여 그 한 표에 주목했다.
곧 결과가 나왔고 최후의 승자는 동주였다.
동주는 자신의 이름이 발표되자 기쁨의 포효 했다.
“우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대평은 허망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동주를 뽑지 않은 사람들도 뽑은 사람들도 의외의 결과에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대평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서둘러 회관을 떠났다.
“이게 말이 돼? 어떻게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뽑을 수 있어?”
몇몇 사람들은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끝난 결과였다.
영선은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실망해 망연자실하고 있는 남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그만 집에 가요.”
아내의 손에 끌려 나가던 대평은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허 참, 어이가 없네. 이게 말이 돼?”
3년을 군말 없이 마을을 위해 일했었다. 아니 그 문제를 떠나서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이 마을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살았다. 근데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새로 이사 온 사람을 이장을 뽑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도통 되지 않았다. 이건 완벽한 배신이었다.
“그래 너희들 잘났다. 다 해쳐 먹고 니 똥 굵다.”
너무 허망해 허공에다 소리를 질렀다. 이 기분으로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아내가 잡고 있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당신 집에 가 있어.”
“어쩌려고요.”
“뭘 어째? 이미 결과는 나왔는데. 속 터져서 한잔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술상 받아 줄 테니까 집에 가서 해요.”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을 참지 못해 아내에게 화풀이했다.
“너 참 속 시원하겠다. 나 이장하는 거 그렇게 싫어하더니.”
“네 속 시원해요. 더는 당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요.”
아내를 잠시 노려보다 발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집에 가자니까.”
영선은 남편의 뒤를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거의 빠진 회관에는 동주를 이장으로 만들기 위해 주도적으로 일을 벌였던 몇몇 사람들만 남아 동주에게 축하 인사했다.
“형님 축하합니다.”
“고마워.”
항상 이장이 뽑히면 마을 잔치를 했지만, 오늘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민서는 설마 남편이 이장으로 뽑힐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 말릴걸.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고목나무집을 떠날 때 마을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아, 이번에 새로 뽑힌 이장. 강동주라고 합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저를 뽑아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향후 1년간 마을의 발전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쏟아 붓겠습니다. 혹 애로사항이나 건의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저를 찾아주시면 함께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을 끝낸 동주는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과 회관에서 늦은 시간까지 한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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