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아스라한 청춘


#프롤로그

2004년.

수능이 끝난 후 성적표를 받으러 오랜만에 사복 차림으로 학교를 가던 날이었다.

졸업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던 날 기어코 늦잠을 자버린 은규의 볼이 쌜룩거렸다. 모닝콜도 못 듣고 겨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은규는 며칠 전 파마머리를 한 채 양치만 한 후 서둘러 학교로 향했다.

가는 버스 안에서 오랜만에 같은 반 친구들도 만나고 하품을 한 채 도착했을 때 다행히 무서운 호랑이 담임은 들어오기 전이었다. 서둘러 자리에 앉는데 때마침 담임이 들어왔다. 언제든 마주할 때마다 포스가 흘러넘쳤다.

그가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전체를 둘러본 채 일일이 호명하며 성적표를 나눠 주었다. 그러자 제일 앞에 앉은 은규의 머리를 본 담임이 회초리로 그녀의 머리를 콩 찧은 채 당장 비눗물에 씻어 오라고 난리다. 은규가 당황해하며 살려 달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웬일인지 씩 웃으며 농담도 구분 못 하냐며 오히려 그녀를 다그쳤다.

은규가 안심한 채 자리에 앉으니 담임은 의례적인 말들을 하며 졸업식 때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유종의 미를 장식하자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담임이 나가고 나자 그제야 굳었던 학생들의 얼굴도 다림질을 한 것처럼 펴졌다.

12월의 날씨는 흐렸다. 은규는 문자를 본 후 혜윤이 있던 카페로 향했다. 혜윤은 커다란 방석을 끌어안은 채 푸짐한 덩치로 그녀를 반겼다. 고작 며칠 만에 보는 거였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오, 파마했어?”

“응. 어때? 괜찮아?”

“귀여운데?”

혜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은규는 이어 직원이 들어오자 그린티 라테를 한 잔 주문한 후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려 하는 꽃봉오리 같은 그녀들의 눈이 한없이 반짝였다.

그때 혜윤의 폰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처럼 다급하게 울려댔다.

혜윤이 통화를 하며 슬쩍 눈앞에 있는 은규를 바라본 후 끊었다. 분명히 이 카페를 가르쳐 주는 것 같았는데. 은규가 혜윤을 멀뚱히 바라보자 혜윤이 씩 웃으며 기다렸던 답을 했다.

“아, 내가 아는 애 이리로 올 거야.”

“엑, 누구?”

괜한 빨대 잔만 입술로 뜯으며 물으니 혜윤이 야속하게도 더는 별말 안 한 채 모카 라테를 호호 불며 마셨다. 10분 정도 흐르고 웬 남자가 두리번거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도 큰 키와 갸름한 얼굴의 턱 선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멍하니 은규가 그를 바라보는 사이 그가 이쪽 테이블로 향했다. 은규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혜윤을 바라보니 그녀가 어깨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발걸음은 정말 빨랐다.

“마혜윤.”

낮은 저음의 목소리다. 남자가 혜윤을 부르며 그녀의 옆에 앉자 대각선에 앉아 있던 은규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은규야 인사해. 이쪽은 정수환. 수환아, 얘는 내 절친 이은규.”

혜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규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인사에 수환이 괜스레 씩 웃으며 눈짓을 했다.

‘뭐야. 인사 안 해?’

혼자만 인사를 해서 그런지 민망했던 은규가 애꿎은 빨대를 다시 뭉그러뜨리자 혜윤이 나섰다.

“은규야, 얘 85야.”

“뭐?”

“내가 85잖아. 학교 늦게 들어가서 너랑 학년 같은 거고.”

아, 언젠가 혜윤이 말했던 적이 있던 것 같다. 그 탓에 혜윤은 스무 살의 나이로 야간에는 감자탕집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용돈을 타 쓰는 우리들보다 훨씬 수입이 많았다.

어쨌든 혜윤의 말에 따르자면 수환은 한 해 많은 오빠였다. 은규를 바라보던 수환이 이내 입을 열었다.

“원서는 썼겠네? 어디로 썼어?”

초면인데 반말이다. 그래도 왠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저돌적인 모습 그의 외향과 잘 어울렸다.

“명신대 컴공이요.”

“그래? 우리 학굔데? 잘하면 내 후배 되겠다.”

수환이 하하, 라는 말을 마저 덧붙이며 웃자 은규도 슬쩍 웃음으로 화답하며 다시 빨대로 입을 갖다 댔다.

수환은 물이 약간 빠진 청바지에 검은색 기본 트레이닝 차림에 백팩을 고 있었는데 스타일이 괜찮아 보였다. 문득 은규는 아차 싶어, 오늘 세수도 안 한 자신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은규야, 수환이랑 다 같이 이따가 세영이 알바 하는 곳 알지? 비디오방. 거기 비디오나 보러 갈래?”

“응? 아…… 그래.”

은규는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가 수환이 화장실에 간 사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나 실은 오늘 양치만 하고 나온 거야. 좀 불편하니까 집에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

혜윤이 알겠다고 한 후 셋은 7시까지 세영이 일하는무브 무브 비디오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은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한 후 새로 구입한 멋스러운 그레이색 코트를 입고 비디오방으로 향했다. 카운터에 있던 세영과 인사를 한 뒤 세영이 알려 준 방 번호를 열었는데 마침 스크린에서 진득한 정사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닌가. 혜윤과 수환이 스크린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누워 그걸 보고 있었다. 괜히 얼굴이 빨개진 은규가 어물쩍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혜윤이 말을 건넸다.

“아까 카페에 열쇠 놔두고 왔나 봐.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먼저 노래방에 가 있어.”

영화가 금세 끝이 나고 수환과 은규는 바로 밑에 있던 지하 노래방으로 내려갔다. 노래방의 탁한 공기가 코끝을 일렁거리게 만든다. 자주 오는 단골 가게인지 수환이 모습을 드러내자 남자 직원이 근처 방에 둘을 넣어 주고는 서비스 많이 줄 테니 실컷 놀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은규와 수환이 어정쩡하게 안으로 들어가고 수환이 잠시 밖에 나가 음료수를 갖고 온 뒤 그녀에게 쥐 주었다.

“노래 잘해?”

“벼…… 별로요.”

“원래 좀 부르는 애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그렇게 말하곤 수환은 재빨리 책자를 넘겨 키를 눌렀다. 곧장 엠투엠의 타버린 나무라는 노래가 나왔다. 어라?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은규의 귀가 순식간에 열리는 기분이다. 수환의 중저음 목소리는 타버린 나무라는 곡과 제격이었다. 편안하고 듣기 좋은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윙윙 맴돈다. 어쩜 저렇게 잘 부르지? 수환이 다 부르고 난 후 은규가 감탄하며 칭찬을 하자 멋쩍어하던 그가 은근히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자, 이제 네 차례.”

금세 갔다 온다던 혜윤은 늦고, 은규는 마지못해 노래를 선곡했다. 그녀의 애창곡인 정경화의 나에게로의 초대라는 곡이었다. 고음이 필요한 부분에서 은규는 힘껏 내질렀다. 사실 은규도 노래는 좀 부르는 편이었다. 그것과 별개로 심각한 몸치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오, 너도 꽤 부르네? 근데 머리 한 지 얼마 안 됐지?”

수환이 화제를 돌리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은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다. 그 머리.”

수환의 말에 은규가 멋쩍게 웃었다. 아…… 하하하하.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어색함이 온 공간에 잔뜩 묻는 동안 드디어 혜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셋은 노래를 적당히 부르다가 다시 나왔다. 외동인 혜윤은 나이 차가 꽤 나는 아버지와 사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집을 비운 터라 그녀의 집에서 외박을 하기로 했다. 시간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만큼 겨울 추위가 거리를 꽁꽁 싸맸다. 수환이 다음에 보자며 자릴 뜨자 은규는 괜스레 그다음이 기다려졌다. 한편으론 자신에게 연락처를 묻지 않은 수환에게 조금은 섭섭했다. 그리고 얼마 뒤, 개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미니 홈피 방명록에 정수환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남긴 글이 보였다.

[ 나 수환인데. 겨우 찾았네. 실은 그날 내가 핸드폰 잃어버려서 친구 폰 잠시 들고 있었거든. 010-xxx-xxxx 내 번호야. 저장하고 문자 한 통 줘. 안녕. ]

간결했지만 그 두 줄의 문장은 은규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은 조금씩 촘촘한 줄을 만들어 갔다. 수환은 근근이 방명록으로 안부를 전했고 때론 문자를 했다. 어느새 그의 일상을 같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찰나 명신대에 최종 합격을 하게 됐고 수환의 말처럼 진짜 그의 대학 후배가 됐다.

*

2월의 졸업식이 끝나고 3월이 멀지 않았던 날, 혜윤으로 인해 우리는 한 번 더 만나게 됐다. 본격적인 스무 살이었다. 포장마차에서 연탄에 구운 두루치기와 소주를 마시며 시시껄렁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술이 조금 들어가니 수환의 말도 약간은 살이 붙었다.

“효동이랑 그래서 사귀려고?”

혜윤의 연애 상담에 은규가 물으니 잠시 뜸을 들이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와, 마혜윤. 제법인데?”

수환이 은근히 혜윤을 놀리자 그녀가 도끼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효동은 마른 체구였고 혜윤은 그에 반해 살집이 있었기 때문에 은규는 속으로 효동이 혜윤에게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됐다. 모태솔로였던 혜윤이 연애를 시작한다니 은규마저 덩달아 실감이 안 났다.

“선물까지 주는데 어떡해. 효동이 눈이 얼마나 선해 보이니.”

작은 눈의 혜윤은 눈이 큰 남자를 선호했다. 눈이 큰 은규가 눈 작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문득 은규는 수환의 눈을 응시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두 눈. 쌍꺼풀 없는 사내다운 눈매가 괜스레 눈에 밟힌다. 그녀의 시선에 수환도 은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내 눈에 뭐 묻었어?”

“아, 아뇨.”

수환이 오이를 베어 물며 소주잔을 한잔 비워냈다.

“말 놔도 되는데. 그냥 오빠라고 편하게 불러.”

“네.”

“또 네, 라고 한다. 자 따라 해봐. 수환 오빠.”

으. 어쩐지 입 밖으로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가 그동안 있어 봤어야 말이지.

은규의 볼이 금세 빨개지자 수환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자연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하, 그런 얼굴 다른 놈한테선 하지 마.”

“네?”

“못 들었으면 말고. 자, 너 이제 두 잔 마셨지? 한 잔 더 받아.”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잠시 멀찍이 떨어져 있던 혜윤이 뛰어 들어오더니 입가를 길게 늘어뜨렸다.

“나 오늘부터 1일이다. 효동이랑.”

“오, 축하해!”

“이야.”

정말 기분이 좋아 보이는 혜윤이 방방거리며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수환과 은규가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마음으로 웃었다. 그해 2월의 마지막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1

3월 초에 오티 날짜가 잡혀 있었다. 포털 사이트 카페에선 미리 친해지기 위해 각 대학 과마다 카페를 개설해 친목을 다지고 있었는데 은규도 신입생들이 어떤지 궁금해 가입해 두었었다. 그리고 오티 날 서먹서먹한 가운데 아침 일찍 버스를 타자 카페에서 본 듯한 남학생이 은규의 옆에 자리를 트고 앉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붙임성 있어 보였는데 그 학생은 자신을 승일이라고 소개했다. 승일은 벌써부터 동아리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밴드에 관심이 많아 보컬로 들어가고 싶다며 은규에게도 질문을 해왔다. 아직 거기까진 별생각이 없던 은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는 잠자코 승일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티 장소는 다소 낡아 보이는 어느 콘도였다. 그러나 첫날은 콘도가 아닌 일반 강당 같은 데서 묵게 된다고 했다. 요리조리 사람들을 살피며 그나마 아는 수환을 찾았지만 그는 도통 눈에 담기지 않는다. 넓은 강당에 신입생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 들어가자 환영의 의미가 담긴 플래카드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컴공은 한눈에 봐도 여학생보다 남학생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줄을 서서 자리에 앉아 있는데 옆에 있던 작고 귀여운 인상의 여자애가 은규에게 말을 걸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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