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타임슬립


#프롤로그.

“이사님. 김주호 변호사에게서 서류가 도착했습니다.”

비서에게 나가보라는 얼굴로 턱짓을 한 남자가 비서가 건네준 서류의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고 책상 위로 내던졌다.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지른 그의 입술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걸 개봉해 읽어보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이혼서류라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그와 마주할 때면 이혼해달라는 말을 노래처럼 불러댔던 그의 아내였다. 그녀와 이혼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해주기가 싫어서 바쁜 회사 일, 장기 출장 등으로 피했더니 더는 참지 못한 그녀가 변호사를 통해 보낸 것이다.

남자는 거칠게 얼굴을 문질러대던 손바닥을 내려놓으며 봉투를 바라봤다.

‘결국, 이혼인 건가.’

‘…….’

‘끝까지 나와는 아니다. 이건가?’

남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그녀를 겨우 차지했을 때, 그는 그녀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주겠다고, 소중히 대하며 살겠고 다짐했었다. 가진 게 재력밖에 없으니 그녀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는 그의 다짐은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소중히 대해주겠다는 다짐은 이루어진 걸까.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쉬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겠다.

자신과의 결혼 후로, 아니 그가 그녀가 좋아서 일방적으로 매달렸을 때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평범했던 그녀의 배경이 못마땅해 집안에서 그녀를 거세게 반대했고 억지로 자기 뜻을 이루어 결혼하고 나서도 그녀는 집안에서 무시당하고 유령 취급당했다. 어디 그뿐이던가. 그와 그녀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에도 일방적으로 그녀만 탓하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전가했다. 그녀를 지키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녀가 그를 온전히 믿고 의지하기에는 그녀는 그를 그만큼이나 사랑하지 않았다.

‘차라리 포기했어야 했나.’

후회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동안 같은 후회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수도 없이 똑같은 후회를 반복했다. 차라리 짝사랑할 때가 나았다고 말이다. 그는 고개를 숙여 책상 위에 놓여있는 그녀가 웃고 있는 사진을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날 보고 이렇게 웃지 않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욕심부리지 말걸. 그랬으면 이토록 후회만 남는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남자는 사진 속 그녀의 웃는 얼굴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보고 싶고 그립다. 날 향해 웃어주지 않는 그녀를 떠올리면 애가 닳는다. 그래서 그녀의 뜻대로 굴어주기가 싫다. 그런 게 다, 그녀가 쉼 없이 말하는 미련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남자는 책상 위에 던져두었던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대로 열린 봉투를 거꾸로 뒤집어 들었더니, 예상했던 이혼서류와 함께 쪽지 한 장이 툭 떨어졌다.

-이렇게 불행하게 살자고 당신하고 결혼한 게 아니야. 더는 피하지 말고 이혼해줘. 당신이 나보다 더 좋은 여잘 만났으면 좋겠어.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여잔, 끝까지 날 위하는 척을 한다. 차라리 이기적으로 나왔으면 부득부득 안 된다고 우기고 악이라도 써볼 텐데……. 그러지를 못하게 한다. 전의를 상실케 한다.

‘이 여잔 이게 배려라고 생각하겠지.’

허탈하게 쓴웃음을 짓던 남자는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여자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남자는 나직한 한숨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한국으로 들어갈게. 네 뜻대로 하자.”

여자는 별다른 말 없이 알겠다는 대답만 들려주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남자는 어색한 말투로 다음 업무가 있다는 핑계를 들며 전화를 먼저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남자는 목을 꽉 조르고 있는 듯한 타이의 매듭을 끌어내리며 비서실로 내선전화를 걸었다.

-네, 이사님.

“서울행, 비행 편. 제일 빠른 것으로 예약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남자는 그녀의 서명이 그려져 있는 이혼서류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결국, 그의 끈질겼던 사랑은 해피엔딩이 아닌 허무함으로 끝이 날 것 같다.

서울로 향해 이륙했던 기체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승객들은 팔걸이를 붙들며 당황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다급한 승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체의 흔들림이 심합니다. 상황을 알아보고 있으니 승객분들은 당황하지 마시고 안전띠 착용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체의 흔들림이 심합니다. 상황을 알아보고 있사오니…….”

침착하라는 승무원의 안내 논평이 반복해서 들렸으나 승객들의 당황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못했다. 그러다 기체가 다시 크게 흔들렸고 무언가 폭파하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댔고 일등석에 앉아있던 남자 역시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죽는 건가.’

가끔 뉴스에서 접했던 비행 사고가 남의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예고도 없이 그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새어버린 머릿속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법원까지 갈 필요도 없이 뜻을 이루겠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만나지 말았으면 좋았을걸.’

죽음이 바로 지천으로 다가왔는데도 역시나 그녀에 대한 후회뿐이다.

‘내가 죽으면 넌 슬퍼할까. 아니면 후련해할까.’

‘후련해하면 좀 화날 것 같군.’

남자가 쓸데없는 후회와 생각을 하는 동안 기체는 아래로 사정없이 거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울며불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 정신없고 아찔한 감각에 남자는 눈을 꾹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내 인생이 허무하게 끝날 줄 알았다면 네가 하자는 대로 해줄 걸 그랬어. 아니야! 차라리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았어야 했어. 널 쫓아다니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너는 좀 더 행복했을 거야. 그렇지?’

날개에 붙은 불이 삽시간에 번진 기체는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고, 지면 위로 부딪치는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1편.

죽는다!

까맣게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 윤혁은 번쩍 눈을 떴다.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자 땀으로 흠뻑 젖은 상의가 그의 몸 위로 찝찝하게 들러붙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그는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어쩐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있는 곳이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저도 모르게 옆자리를 더듬던 그는 ‘비어있다.’를 느끼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각방을 쓴 지가 꽤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거기다 자신이 있는 곳은 서울이 아니라 뉴욕이다. 피식, 웃던 그는 잠에서 깨기 전에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지독한 꿈을 꿨군.’

윤혁은 축축하게 젖은 상의가 불편해 시트를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침실을 밝히기 위해 스위치를 찾으려는데 그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는 다시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며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침실이 밝아지자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호텔 방의 전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 집의 침실 전경도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은 놀랍게도 결혼 전, 그러니까 10년 전의 본가에서 막 독립해 지내던 아파트 침실이었다.

“뭐야? 이게. 내가 왜 여기에 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꿈인 건가.”

윤혁은 그답지 않게 멍청한 얼굴로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통증이 느껴졌고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의 눈이 다시 크게 뜨였다.

윤혁은 재빨리 돌아서서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믿어지지 않게도 그의 모습이 젊어져 있었다. 군대에서 막 전역한 후의 짧아진 머리, 그대로였다.

“그러면 깨기 전의 일들이 꿈이었다고?”

중얼거리던 그가 세차게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 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속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이 생생했고 그녀와 이혼하기 위해 서울로 돌아가려 했던 일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거기다 잠에서 깨어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 더 현실감이 없다. 기억도 뜨문뜨문하고 오늘의 날짜도 모르겠다. 어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느껴진다.

윤혁은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습관대로라면 자신은 분명 스케줄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

“거실에 놔뒀던가.”

혼란스러워하며 그가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 했을 때, 그의 손가락이 그의 시선에 걸렸다. 네 번째 손가락 위로 링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윤혁은 뚫어져라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고? 그 추락하던 비행기에서?”

윤혁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지?”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번쩍 눈을 떴다. 하지만 주변은 눈을 감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고, 그것은 10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다시 그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그는 곧 깨달았다.

10년 전이라면 그녀를 만나기 전이다. 네 살 아래의 그녀는 이제 막 대학을 입학한 신입생일 것이고 자신은 복학하지 않고 바로 유학을 떠났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학점을 이수한 후, 졸업했다. 덕분에 같은 대학을 다녔는데도 대학생 때에는 캠퍼스에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과거를 돌릴 기회가 주어졌다. 예정된 운명대로라면 자신은 유학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후회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돌아와서 그녀를 만나선 안 된다. 이대로 떠나 한국 땅을 밟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윤혁은 보지 못했던 그녀의 과거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번에 떠나면 그녀를 영영 볼 수 있을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련 떠는 짓이고 욕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때문에 지나치듯 보기라도 해보고 싶었다.

미리보기 끝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