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유령을 사랑하는 방법 1권


#1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들 하지만 그게 설마 내 얘기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영국에 막 도착했을 때 나도 그랬다.

이미 인생 최악의 절망을 겪었으니까 더 큰 불행 같은 건 이제 없을 거라고 믿었다.

나이 서른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몇 푼 안 되는 퇴직금과 적금을 탈탈 털어 영국행 항공편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갑자기 닥친 모든 불행을 딱 끊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호화로운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서 예쁜 승무원이 갖다주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시던 그 순간에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정말 괴로운 기억들이 한꺼번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창피할 만큼 흔한 얘기지만 내 불행의 시작은 ‘남자’였다.

고작 그런 문제로 바보같이 행동하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실연’이라는 걸 직접 겪어 보니 나도 별수 없었다.

나는 싸매고 드러누워서 눈물 콧물 다 쏟는 그런 애는 아니었지만, 대신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좀 맛이 가 버리는 타입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벌컥벌컥 화를 냈고, 지각을 반복하는 바람에 사수에게 잔소리를 들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러다 회사에서 엉망진창 실수가 계속되자 주위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나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졌다.

보도자료에 적힌 전화번호가 틀렸다고 항의하는 기자에게 ‘아니,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쪽은 평생 한 번도 틀려 본 적 없으세요?’ 하고 대들었다가 부서장에게 불려가던 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항상 공과 사를 깔끔하게 분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면 모든 게 줄줄이 와장창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바로 딱 그런 인간이었다.

그래서 영국행을 결심했다.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대학생 시절, 1년 정도 리버풀에 있는 대학에서 교환 학생으로 지냈던 적이 있어서 영국은 왠지 친근한 나라였다.

게다가 마침 회사에서 마지막 짐을 정리하는데, 서랍 속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그 영국 호텔의 카탈로그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예전에 점심시간에 잠깐 여름 휴가 상담을 하겠다는 동료를 따라 회사 근처 여행사에 들렀을 때, 재미있는 문구가 눈에 띄어 얼른 집어 왔던 카탈로그였다.

- 나중에 시간 나면 이런 데 한 번 가봐야지.

- 어머, 과장님, 유령 같은 거 좋아하세요? 난 무서운 건 딱 질색인데. 쉬러 갔는데 유령이 막 나오면 얼마나 스트레스받겠어요. 어휴! 생각만 해도 심장 마비 각이네.

- 뭐, 어때? 어차피 말도 안 통할 텐데. 아, 영국 유령이면 그래도 영어로 말하겠구나. 대충은 서로 알아듣겠네. 문법 같은 걸 틀리게 말하면 고쳐 주려나?

하지만 ‘모든 불행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며 떠나온 영국 여행은 기대와 달리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우선 비행기가 연착했다.

제시간에 도착은 했지만 공항에 안개가 너무 자욱했기 때문이었다. 30분쯤 상공을 맴돌다가 겨우 착륙한 뒤에도 다시 30분가량 활주로를 빙빙 돌고 나서야 간신히 문이 열렸다.

엉덩이가 얼얼한 채로 내려 보니 그다음 문제는 짐이었다. 수화물 게이트가 전광판에 잘못 뜨는 바람에 승객 모두가 E구역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D구역으로 가야 한다고 알려 줘서 모두가 우르르 이동해 보니 벌써 짐이 나온 지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겨우 가방을 찾아 공항철도를 타고 런던 시내 중심의 기차역으로 갔을 땐 이미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목적지인 하딩은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근교의 소도시였다. 제대로 도착만 했다면 꽤 즐거운 미니 여행이 되었을 텐데, 겨우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보니 갑자기 거센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국을 떠나는 순간부터 ‘불행 끝, 행복 시작!’일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시작부터 이렇게 줄줄이 터지다니 참 복도 없지.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창밖에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빠져나온 뒤 역 안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호텔에서 보내준다던 운전사가 도무지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떠나기 전에 미리 예약해 둔 서비스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렇게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낯선 기차역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같이 내린 승객들은 모두 금세 흩어져 버렸고, 당연히 와이파이 신호 같은 건 잡히지도 않았다.

비행기 연착으로 모든 게 줄줄이 밀리면서 세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셈이니 운전사는 결국 기다리다 돌아가 버린 모양이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유럽답게 역 안의 매표소와 관광 안내소는 이미 전부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작은 매점 하나와 대합실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가방을 질질 끌고 두리번거리다 매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기, 햄스필드 하딩으로 갈 건데요.”

앞에 선 남자에게 잡지와 작은 음료수를 팔며 거스름돈을 건네주던 여자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거스름돈을 건네받던 남자도 내 쪽을 돌아봤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둘 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 같았다.

“혹시 거기까지 가는 버스가 있나요?”

여자는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살짝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설마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기분이 좀 나빠졌지만, 혹시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물어봤다.

“아니면 어디서 택시를 잡아야 하는지……. 여긴 우버는 안 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렇죠?”

여자는 여전히 뻔뻔한 눈길로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내 발음이 안 좋아서 못 알아듣는 건가? 하지만 저 건방진 눈빛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참다못해 한마디 쏘아 주려는데 앞에서 잡지를 사던 남자가 나를 돌아보며 세련된 영국 억양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햄스필드 하딩이라면 여기서 차로 20분쯤 걸립니다. 곧바로 가는 버스는 없어요.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도 15분은 족히 걸어가야 할 겁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죠.”

남자는 조심스럽게 손짓을 하며 나를 매점 밖으로 이끌었다. 계산대 앞에 선 여자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매점 밖으로 나온 남자는 내 팔을 살짝 잡고 몸을 빙 돌려주며 반대편 출구 쪽을 가리켰다.

“저기서 택시를 탈 수 있어요. 20미터쯤 걸어가면 승강장이 있거든요. 날씨가 이래서 많지는 않아도 아직 한두 대쯤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우버와 연이 없는 곳이라 대부분의 운전사들이 근처에 사는 주민이고, 성실한 편이거든요.”

이제는 몸도 마음도 지쳐서 너덜너덜해진 터라 이렇게 아주 작은 친절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색 레인코트를 입은 남자는 빨간 머리에 녹색 눈, 뺨에는 엷은 주근깨가 나 있었다. 마른 몸, 껑충한 키 때문에 전형적인 ‘영국 소년’ 같은 느낌이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줘서 영국 억양이라도 알아듣기 쉬웠고,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 덕분에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훈남처럼 느껴졌다.

“아, 감사합니다.”

내가 겨우 입을 떼고 인사하자 남자가 덧붙였다.

“여행하기 별로 좋은 날씨는 아니네요. 이 지역은 비가 자주 오진 않지만 한번 오면 무섭게 내리죠. 4월엔 여행객이 많은 편이 아닌데, 올해는 꽤 많은 분들이 햄스필드 하딩을 찾네요. 저쪽까지 가방이라도 좀 들어드릴까요? 저도 우산은 없어서…….”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무겁지 않아요. 고맙습니다.”

나는 조금 허둥거리며 말했다.

힘들고 지쳐서 그런 작은 친절도 고맙긴 했지만, 여자 혼자 여행에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는 기본 지침이 이제야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긴 유럽이잖아? 기차역에서 처음 만난 낯선 남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고 가방을 덥석 맡기다니 안 될 말이지. 상대가 제아무리 훈남 영국 청년이라도 말이다.

특히 기차역 근처에서 온갖 몹쓸 짓을 다 당했다는 ‘유럽 여행 카페’의 무수한 후기들이 떠올랐다. 불행의 고리를 끊겠다고 훌쩍 떠나왔는데, 내 잘못으로 불행을 자초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좋아요. 그럼.”

내 단호한 표정을 보더니 남자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하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더니 곧 돌아서서 걸어가 버렸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다. 시건방진 매점 여자도 그만 퇴근하려는지 가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거운 여행 가방을 다시 질질 끌며 남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조금만 통찰력이 있었다면, 그 한 걸음이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겪어 온 어떤 불행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 엄청난 사건의 서막이라는 걸 알았을 텐데.

하지만 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평범한 여자에 불과했고, 운명은 결국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반드시 가야 할 길로 인도하고야 만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처음부터 내가 가도록 정해져 있었던 그 길을 걸어갔다. 무거운 가방을 질질 끌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으로.

#2

“죄송합니다만, 예약 규정을 충분히 확인하셨나요?”

“무슨 규정이요?”

“오후 6시 이후에 도착하시는 고객님들은 반드시 사전에 연락을 주셔야 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방을 보장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을 텐데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청년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몹시 피곤한 데다 흠뻑 젖어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뒤 호텔 입구에서부터 비를 맞아 가며 자갈 깔린 진입로와 분수대가 있는 정원을 거쳐 15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길을 터덜터덜 걸어왔기 때문이다.

- 햄스필드 하딩이라…… 유령을 보러 가시는구먼?”

10여 분을 기다려서 겨우 잡아탄 택시 기사는 빵모자를 눌러쓴 유쾌한 아저씨였다. 인상은 좀 험상궂게 생겼지만 친절하고 수다스러웠다.

- 네, 휴가차 왔어요.

- 아이구, 이런 곳으로 휴가라니. 영국에 더 좋은 곳도 많은데. 하딩은 작은 도시라 별로 볼 건 없거든. 십중팔구는 유령을 보러들 오는 거지. 그 옛날 옛적에 죽었다는 백작 말이우.

- 그런 사람들이 확실히 많나 봐요?

- 그 호텔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지. 방송국에서도 오고, 무슨 동호회에서도 오고. 괴상한 목적을 가진 관광객들이 많다우. 할로윈에는 아주 전쟁터가 따로 없는걸. 물론 아가씨같이 평범한 사람들도 오지. 지난달에는 일본에서 왔다는 시끄러운 아가씨들을 태워다 줬는데 영어는 한마디도 못 하더라고. 호텔 팸플릿을 보여주면서 계속 ‘리차드 상! 리차드 상!’ 하길래 아, 리처드 경의 유령을 보러 왔구나 알았지.

- 아저씨도 유령을 보셨어요?

기사는 백미러로 나를 흘끗 보며 유쾌하게 웃어댔다.

- 뭐 가끔 보지. 주로 그 저택에서 무슨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 손님을 태우고 가면 가끔 그 양반을 만난다우.

‘가끔’ 유령을 만난다고? 농담도 참!

확실히 그런 얘깃거리라도 있어야 관광객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작은 동네답게 택시 운전사의 허풍도 보통이 아니다.

- 어머, 일반인의 눈에도 잘 보이나 봐요? 무섭지 않으세요?

- 그럴 리가! 대대로 우리 고장을 지켜온 집안인걸. 게다가 그 유령은 마을엔 못 나와요. 그 저택에만 붙박이로 있으니까. 그러니 누굴 괴롭히려고 해도 별수가 있나. 그래도 요즘은 뭔가 심사가 비뚤어졌는지 가끔 요상한 장난질은 치는 모양입디다. 전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 들어서 유령이 못된 짓을 한다는 소리가 가끔 들려오더라고. 뭐, 아가씨도 운이 좋으면 반드시 보게 될 거유. 특히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는 봤다는 사람들이 꽤 되거든.

그 말을 듣자 순전히 허풍인 줄 알면서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서 얼른 문질렀다.

괴로운 기억들을 잊겠다고 더 큰 자극을 찾아 일부러 유령이 나온다는 호텔에 내 발로 찾아가는 주제에 말이다. 그래도 산전수전 겪으며 단련이 된 몸인데 설마 외국인 유령 따위를 만난다고 기절 같은 걸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택시에서 내린 뒤에도 내 ‘산전수전’은 끝이 없었다.

- 여기서 내려 드려야겠네. 여기서부턴 차가 들어갈 수 없거든. 비도 오는데 미안하네그려. 늘 갖고 다니던 우산을 오늘따라 세차하느라 집에 놓고 왔지 뭐유. 그래도 너무 걱정 말아요, 아가씨. 여긴 늦은 밤에도 야간 매니저가 상주하니까. 밤에 정문이 닫히면 저 벨을 누르고 문을 열어 달라고 하면 돼요.”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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