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월. 지하철 역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빽빽했다. 모두가 출구를 찾아 움직이는 그 더딘 흐름 속에서 우경은 발을 종종거렸다. 전광판에 뜬 현재시각은 오전 8시 5분. 회사는 역에서 10분 거리고 9시 정시 출근인 걸 감안하더라도 이른 시간이었다.
‘내일은 전 직원 30분 일찍 출근합니다.’
퇴근을 앞둔 동료들을 향해 다짐 받듯 말하던 석준을 떠올려 봐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조급한 만큼 늘어지는 법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빠져나온 우경은 ‘거산그룹’이라고 쓴 이정표 아래를 서둘러 통과했다.
거산(巨山)그룹 본사로 난 길은 출근하는 거산직원들로 붐볐다. 조기 출근하라는 공지는 없었다. 하지만 석준의 입을 통해 하달된 것처럼 평소와는 분명 다른 분위기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고 했듯이 이는 새로운 상사를 맞이하는 전 직원의 마음가짐 또한 남다르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어찌됐건 간에 까라면 까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직장인으로서 출근 시간 몇 분 앞당기는 것쯤은 언제든 보여줄 수 있는 각오였다. 본사 정문을 10여 미터 남겨 뒀을 때였다.
“우경 씨!”
돌아보니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우경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IR팀 이정환이었다.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우경은 잠시 망설였다. 어제 보낸 문자와 전화를 모두 무시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잠깐만! 잠깐이면 돼요!”
연신 입을 벙긋거리며 손짓하는 그를 지나는 사람들이 흘깃거렸다. 우두커니 선 채 거산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우경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여유가 있었다.
“무슨 일…….”
다가서기가 무섭게 정환이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잠깐 저쪽으로 가죠.”
우경이 끌려간 곳은 A동 사옥 뒤편이었다. B동 사옥과는 4차선 도로를 사이에 둔 거리라 한산하고 보는 눈도 적었지만 그래도 계열사가 즐비한 곳이라 조심스러웠다. 우경이 손목을 살짝 비틀자 정환은 그제야 손을 풀고 멋쩍게 미소 지었다.
“이거…….”
그러면서 코트 안쪽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성인 남자 손바닥보다 조금 큰, 그러면서도 약간 길쭉한 상자로 반듯하게 찍힌 명품 로고가 시선을 끌었다. 딱 봐도 스카프였다.
“스카프에요.”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만나서 주고 싶었는데 연락이 안 돼서. 바빴어요?”
“이런 걸 왜…….”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IR팀은 인사과와 같은 층에 있고 업무상 몇 차례 협업했을 뿐인데 이후 정환은 우경을 볼 때마다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영수증 넣어놨어요. 마음에 안 들면 교환도 가능하다니까 가서 바꿔요.”
“아니, 이런 건…….”
“그럼 먼저 갑니다.”
정환은 활짝 웃고는 손을 휘휘 저으며 가버렸다. 우경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직장동료 이상의 감정을 원한다는 분명한 시그널이었다. 손에 들린 상자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 속에 웅크리고 있을 부드럽고 화사할 것 같은 실크 스카프 때문이었다. 잠시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우경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까운 쓰레기통에 상자를 툭 던져 넣었다.
“30분전에 출근하랬다고 진짜 30분 딱 맞춰 오는 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머리 위로 냉기가 흘렀다. 우경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차갑게 쏘아보는 석준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늦지는 않았으니까. 석준의 허리 한쪽에 들린 두꺼운 서류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부사장실로 가져가는 서류였다.
“죄송한 걸 아는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일찍 왔겠지.”
“…….”
“죄송하긴 한 거냐? 세상 평화로운 표정을 보면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석준이 못마땅한 듯 쏘아보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옆에 앉은 가영이 숨죽여 말했다.
“제가 보기엔 우리 부장님이 세상 편하신 게 분명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자리에 앉은 우경은 컴퓨터 전원을 켜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오늘 회의 장난 아닐 거라고 다들 긴장하고 난리던데 이 와중에도 대리님 걸고넘어지시는 거 봐요.”
“그러게.”
우경은 엷게 미소 지었다. 가영은 신입 2년차로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같다가도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면 대신 속이 다 시원했다. 특히 말수 적은 우경에게는 작은 숨통 같은 존재였다. 전원이 들어온 모니터에 집중하는데 가영이 파티션 너머로 슬쩍 고개를 디밀었다.
“그런데 대리님.”
“음.”
“이번에 온 부사장 본적 있으세요?”
“아니.”
“한 번도?”
“한 번도.”
“글로벌 엔니지어링 본부장일 때 엄청 날렸다면서요. 근데 본사에 얼굴 한번 내민 적 없다니 이상하네.”
“그게 이 시점에서 왜 궁금한 건데.”
“원래 소문 속의 남자가 매력적인 법이잖아요.”
신입답게 파릇파릇하고 호기심 많고 거침없어 좋지만 지금은 근무 중이라는 걸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가영 씨, 신입사원 추가 합격자명단 작성 다 끝났어?”
끄응. 가영이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가자 우경은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소문 속의 남자가 매력적인 지는 몰라도 인사과는 그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고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파악해 문서화해야 한다.
거산건설 부사장이자 경영본부장으로 발령 난 권진혁은 그룹 회장 권일주의 차남으로 글로벌 엔지니어링 본부장에 있으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미국과 중동에서 승승장구하는 그를 굳이 들여앉힌 건 관공서 수주(受注)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신 사장, 즉 권일주의 장남 권순혁 때문이었다. 실적이 부진하다 해도 그래서 꼴이 말이 아니라 해도 첫째를 밀어내고 둘째를 사장 자리에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권진혁이 첩의 자식인 건 둘째 치고 그를 사장으로 앉히는 순간 권순혁은 무능의 아이콘이 되고 이는 후계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장고 끝에 회장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허울뿐인 사장 자리는 그대로 두되 둘째를 부사장 겸 경영본부장 자리에 두고 형을 서포트하는 모양새를 갖추자. 오늘 거산건설은 침체된 국내 사업에 수혈을 마쳤다. 물론 이 젊은 피가 거산건설의 숨통을 터줄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작업을 마친 우경은 출력버튼을 누른 뒤 인쇄실로 향했다.
“권진혁입니다.”
중저음의 음성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석준은 진혁이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가 움찔했다. 손바닥 전체를 감싸 쥔 커다란 손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마다 박힌 단단한 굳은살이 마치 나 이런 놈이다, 경고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뿐인가. 180을 훌쩍 넘는 키, 당장이라도 수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는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위압적이었다. 사장인 권순혁을 대할 때와는 다른 긴장감이 석준을 지배했다.
악수를 하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은 도합 18명이었다. 건축, 기술, 재무, IR, 인사, 법무팀 등등의 팀장, 실장, 본부장까지 모두 부른 자리였다. 인사를 마친 진혁은 자리로 가다 문득 방향을 바꿔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앉으세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그가 사람들을 향해 자리를 권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여 삐딱하게 보는데 그런 눈을 보고도 자리로 가 앉을 간 큰 임원은 없었다. 게다가 자리는 상석을 제외한 8인용 소파로 18명이 모두 앉을 수도 없거니와 서열을 따져 앉는다 해도 부사장이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상황에서 편하게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임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서서 눈치만 살폈다.
“그럼 편하실 대로.”
이어 낮고 분명한 어조로 진혁이 말했다.
“전 제 사람들하고만 일합니다.”
대놓고 줄을 세우겠다는 소리였다. 건설이라는 곳은 남성적인 색채가 강한 곳이었다. 세련되고 섬세한 작업이지만 막강한 추진력과 강력한 동질감을 필요로 했다. 틈이 생기고 벌어질수록 삐거덕거리기 쉽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내 사람 타령’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먼저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거르겠습니다. 직급 안 따집니다. 여기 이 자리에 앉을 사람만 쓰겠습니다.”
칼바람을 예감한 임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8명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다음은 정천시 신청사 수주에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혀내 타산지석으로 삼겠습니다.”
실패를 떠안은 이들에게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있을 입찰은 무조건 성공합니다.”
‘성공하겠다’도 아니고, ‘성공시키겠다’도 아니었다. ‘성공한다’는 바뀔 수 없는 결과이자 기필코 입찰에 성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아닐 수 없었다. 곧 있을 입찰은 정천시에서 발주하는 3천9백억원 규모의 외곽 고속도로 공사로 진혁의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회의 끝. 자, 가서 일들 보시죠.”
진혁은 이번에도 나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엉거주춤 자리를 지키는 임원들을 향해 빙그레 웃어주었다. 나가도 좋다는 신호였다. 부사장이자 경영본부장의 첫 출근이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게 당황스러운지 그들은 나가면서도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진혁은 일어나 빛이 쏟아지는 창가로 가 섰다. 도심 한복판에서 내려다보는 마천루는 거산그룹의 위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거산그룹이 올려놓은 스카이라인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멀리 시선을 던진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빌딩을 지었단 말이지.”
곱씹듯 뱉어내는 말은 곧 입술 끝에서 뭉개졌다.
「차 대리, 지금 내말 듣고 있는 거야?」
“네.”
차분한 말투가 답답한 듯 석준이 수화기 너머로 다시 목청을 높였다. 헐떡이며 두서없이 말하는데 긴박함이 느껴졌다.
「잘 들어.」
“네. 듣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때문에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고.」
“네.”
「성 차장이 나 대신 회의에 참석한 건 알지? 파일 하나가 빠졌다고 문자가 왔어. 급하니까 얼른 갖다 줘.」
석준이 말하는 파일은 ‘거산 건설 임원 명단’으로 정확히는 부장포함이었다.
“파일은…….”
「내 자리로 가서 모니터 띄워보면 좌측 상단에 있어. 비밀번호는 1524, 빨리 가. 빨리!」
신입사원 교육 강사로 내정된 교수와 점심식사가 있다더니 복귀 중 사고가 났다고 대신 회의에 참석하게 된 성 차장이 구시렁댔다. 부사장이 주제(主祭)한 오전 회의가 끝난 뒤 사내 분위기는 급격하게 경직됐다. ‘칼을 품고 일하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으니 부장 대신 부사장과 독대하러 가는 성 차장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우경은 파일을 챙겨 부사장실로 향했다. 거산 건설의 핵심은 43층이었다. 사장실과 부사장실, 그리고 각 핵심부서 본부장실이 있었고, 그 밑으로 각 핵심부서의 업무실이 줄줄이 채워졌다. 우경이 속한 인사과는 바로 아래 42층이었다. 엘리베이터를 올려다 본 우경은 곧장 비상구로 달렸다.
<2화>
우경은 정면으로 보이는 낯선 남자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습관적인 인사였지만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발동했다. 남자는 소파 상석에 앉아있었다. 직진해 온 눈은 한번 보면 쉽게 잊히기 힘들 정도로 강렬했다. 또렷한 눈망울에 살포시 올라간 눈꼬리가 날카롭고 예민해보였다. 그뿐인가. 포마드를 발라 빗어 넘긴 짧은 머리, 차갑고 삐딱한 눈초리, 빈틈없이 몸에 딱 붙는 블랙 수트와 각 잡힌 옷깃, 꼬아 앉은 긴 다리까지, 피지컬 자체가 ‘물 건너 온 스타일’이었다.
‘포스가 장난 아니라며?’
홍보과 대리인 혜림이 굳이 42층까지 올라와 물었다. 오늘 아침 부사장실 비서실에서 혹은 회의를 마친 입 싼 임원에게서 흘러나왔을 게 분명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우경은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바로 아래층이지만 직접 얼굴을 맞댈 수 있는 위치나 환경이 아니었다. 고작 일개 대리일 뿐이니까. 이제 눈으로 확인했으니 네가 한 말이 맞더라, 맞장구라도 쳐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말씀하신 명단입니다.”
목례를 마친 우경은 성 차장에게로 가 가져온 문서를 건넸다. 그는 노트북과 문서로 너저분한 테이블을 정리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언뜻 봐도 혼자 감당하기엔 상당한 분량의 문서였다. 우경이 진혁을 향해 다시 가볍게 목례한 뒤 돌아 나가던 그때였다.
“잠깐.”
중저음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우경은 보았다. 진혁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가벼운 흥분으로 일렁이는 것을.
“이름이……?”
당황한 게 분명해 보였다. 느닷없는 질문에 여자가 눈을 깜박였다. 진혁은 일어나 두 손을 수트 팬츠에 찔러 넣고는 천천히 여자에게로 갔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춘 그는 다시 한 번 분명히 물었다.
“이름.”
어깨 똑 단발인 여자는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깔끔하지만 특별히 매력적이지는 않은 기성복 같은 느낌의 여자였다.
“차우경입니다.”
“대리 2년차입니다.”
마지못한 대답에 성 차장이 재빨리 덧붙였다.
“바쁘지 않으면 여기 일 좀 돕지.”
이 세상에 본부장이 도와달라는데 바쁜 대리는 없다. 우경은 테이블 쪽을 힐끗 보았다. 노트북 옆으로 두서없이 널린 문서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난 커피.”
우경의 건조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진혁은 그런 우경을 똑바로 주시하며 물었다.
“성 차장님은 뭐로 드시겠습니까?”
“……네?”
시대에 역행하는 진혁의 돌발 행동에 성 차장 역시 난처한 기색이었다. 여직원에게 커피나 차, 기타 개인적인 심부름은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저, 저도…… 커피로 하겠습니다.”
“난 커피, 성 차장도 커피. 우경 씨 마실 것도 준비해서 들어와요. 일이 길어질 것 같으니까.”
“……네.”
우경이 입술을 야무지게 물고 부사장실을 빠져나가자 진혁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피식피식 차오르는 미소를 부지런히 삼켰다.
오늘 아침 그의 차는 B동 사옥 대로변에 정차해 있었다. 시차에서 오는 불편함을 부지런함으로 극복하고자 했지만 그때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형을 만날 것인가. 그냥 무시할 것인가. 차창을 열고 멍한 머리에 서늘한 공기를 주입하던 그때 두 남녀가 불쑥 시야로 들어왔다.
여자는 남자에게 손목이 잡힌 채 끌려왔지만 감정적 약자는 남자였다. 자신감 넘치나 조심스러운 남자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여자. 십여 미터의 거리를 두고 결말이 뻔히 보이는 드라마를 그는 시큰둥하게 지켜보았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