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이 잔잔하게 흐른다. 평온하다. 이 한마디로 모든 걸 말할 수 있으리라. 은하는 캠퍼스 정문으로 들어서며 한쪽 귀퉁이에 새겨져 있는 교명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미래 예술대학교]

빛을 받은 교명은 평소보다 더욱 반짝였다. 그녀는 사색하기를 좋아하고 또한 그걸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학교와 과를 이곳으로 선택했다. 그런데 현재 그녀에게는 글을 쓸 때만큼이나 기분 좋은 설렘을 안겨주는 대상이 있다.

“내가 많이 늦었지?”

언제 왔는지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이 남자, 남자친구 류수다. 류수는 그녀가 다니는 학교의 밴드부 보컬이자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난 킹카다.

185cm의 키에 작은 얼굴, 숱 검댕이 눈썹에 오똑한 콧날하며, 쌍꺼풀 없이 살짝 찢어진 눈은 빠져들기에 충분할 만큼 매력이 있다. 자칭 미래 예술대학교 김수현이라 칭할 만큼.

류수는 축제에서 공연을 하던 중 관객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은하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고백을 했고 둘은 그 이후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연인이 되었다.

“연습하고 나오니까 벌써 체험부스들이 많이 생겼더라?”

“그래?”

“구경하러 가자, 나 저녁 공연 때까지 시간 남았어.”

빙긋 웃어 보이던 그가 은하를 감싼 어깨에 더 힘을 주며 그녀를 정문으로 이끌었다.

오늘은 축제가 있는 날이다.

그들은 천천히 캠퍼스 안으로 들어섰다. 학우들은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호객을 하듯 신입생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부스에는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풍선 터트리기, 차력쇼 등을 진행하며 저마다 열심히 준비해 온 축제를 숙제처럼 선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이 대학생들만이 즐길 수 있는 낭만이지 않을까. 은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 연습을 하러 간다는 그와 헤어지고, 은하는 저녁이 돼서야 친구 하늘과 함께 공연장 맨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벌써부터 광장이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기성가수도 아닌 그가 웬만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그가 내 남자친구라니…

은하는 괜스레 어깨가 으슥 올라갔다. 더군다나,

“오늘 하는 노래, 내가 몇 날 며칠을 너 생각하면서 쓴 거니까. 잘 들어야 된다. 알겠지? 감상평 물어볼 거야.”

헤어지기 전 그가 던지고 간 말에 더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광대는 한껏 승천하고 마음은 말랑말랑해진 상태다.

“쟤네들 공연 안 해?”

하늘의 말에 은하는 무대 위를 두리번거렸다. 공연 5분 전, 무대 위 멤버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왜 저러고 있는거지?

그때, 밴드 멤버 중 키보드를 담당하고 있는 채연이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류수 어디 갔어요?”

“네?”

평소 그를 짝사랑하고 있던 채연은 그녀와 동갑인데도 불구하고 늘 존칭을 쓰며 말한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최 이걸 왜 자신에게 묻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류수가 안 보였다.

채연은 못마땅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쉬며 쏘아대듯 뒷말을 이었다.

“공연시간 다 됐는데 지금 류수가 연락이 안 돼요. 조금 전까지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아니, 그건 맞긴 한데….”

그럼 이 어수선한 분위기가 류수의 부재 때문인 건가?

결국 그는 축제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

1년 후…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던 은하가 한 손을 꺼내어 베개 주위를 더듬거렸다.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이불 속으로 가지고 가자 곧 캐논 변주곡이 멈추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년 전쯤에 자주 꾸곤 했던 꿈을 오랜만에 다시 꾼 것이다.

은하는 현실이나 전생에 있었던 일로 착각할 만큼 생생한 이 꿈을 1년 넘게 꾸어왔다. 마치 일상적인 하루처럼 느껴졌던 그 꿈속에서 그녀는 두 번째 삶을 살았었다. 1년 전, 꿈속의 연인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류수….’

그가 1년 만에 얼굴을 보였다. 아련한 듯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은하는 이불을 걷고 나서 오랜만에 나타난 그의 얼굴을 곱씹어 떠올렸다. 코 끝이 시큰거렸다. 보고 싶었다. 아무리 꿈이지만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로 인해 은하는 진짜 이별 한 사람처럼 애끓는 이별앓이를 했었다. 현실이었다면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수십통씩 해댔겠지만 꿈이라는 환상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은하는 그저 그가 다시 꿈에 나오길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오늘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슬픈 얼굴로.

#1화.

​

“잠시만요!”

은하는 이미 출발한 버스를 우사인 볼트처럼 날세게 달려 잡아세웠다. 위험한 행동인 건 알지만 이렇게 버스를 세울 땐 묘한 희열감 같은 것이 생긴다.

“감사합니다.”

간신히 버스에 올라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 곧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은하에게 집중되었다. 그제야 머쓱해진 은하는 머리를 긁적여댔다. 그녀는 주뼛주뼛 버스 맨 뒷좌석으로 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어 핸드폰에 끼운 뒤 음악을 재생 시켰다. 그러곤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실존 인물도 아니고 사이버가상인물 같은 그 남자 류수 때문에 말이다.

1년 동안 보이지 않더니 왜 오늘 나타난거지? 그것도 슬픈 얼굴로?

은하는 신경쓰였다. 마치 진짜 사귀었던 사람처럼 꿈속의 그를 잊지 못하고…

“이번 정류장은 미래 예술대학교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음악 5곡 정도를 듣고 나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녀는 버저를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3월이 되니 딱 봐도 신입생처럼 보이는 풋풋한 대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다들 뭘 먹길래 저렇게 하나같이 선남선녀들일까.

[미래 예술대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는 길은 살짝 가파른 언덕이지만 그곳으로 걸어가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게만 보인다. 은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래 예술대학교 문예 창작과 이은하. 그게 정말이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꿈속 가상인물일 뿐이다. 현실에서 그녀는 대학은커녕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가는 20대 중반의 평범, 아니 그보다 조금 아래의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이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며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가 남겨두고 간 빚으로 인해 그녀는 하루에도 두세 개의 알바를 뛰며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 되었다. 한마디로 꿈에 그리던 대학의 근처를 돌며 알바를 하는 신세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첫 번째 알바장소는 별달달카페다. 이 주변에서 가장 큰 카페이자 별달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아주는 명소이다. 처음 알바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하나였던 카페는 현재 지역마다 프랜차이즈가 생기고 있을 만큼 번창해가고 있다. 이곳은 은하가 가장 오래 일 한 곳이었다.

사실 이렇게 오래 하게 된 것엔 은하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해외에 있어 아직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카페 주인. 그는 점장을 통해 자신이 가장 힘들 때 선 뜻 5개월 치 월급을 선입금 해주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고자 은하는 묵묵히 이곳에서 알바를 해나갔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벌써 6년이 되었다.

“왔어?”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후드를 머리에 쓰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주환이 다가왔다. 그는 이곳의 점장이자, 은하의 6년 된 남사친이다. 귀찮아서 집에 가지 않는 건지 아니면 자신처럼 돈이 없어서 궁상을 떠는 건지 주환은 카페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창고를 집 삼아 생활하고 있다. 그러곤 연간 회원권을 끊어놓은 헬스장을 목욕탕 삼아 씻으러 다닌다. 잠을 못잤는지 간헐적으로 하품을 하는 주환을 보며 은하는 자동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저기요, 점장님, 곧 카페 오픈이거든요. 오픈은 제가 할테니 정신 좀 챙기고 세수라도 하고 오죠? 도대체 하품을 몇 번씩 하는거야. 턱 빠지겠다. 어제 잠 못잤어?”

“아, 어제 카페 프렌차이즈 건 하나 들어와서 그거 검토한다고 잠 못잤어. 좀 피곤하네.”

“그럴 땐, 샤워 한번 하면 괜찮아져. 내가 오픈 준비할테니까 헬스장 가서 씻고 와.”

주환이 씻으러 간 사이 은하는 음악을 틀었다. 카페 안의 음악은 핫한 아이돌 음악 대신 유행을 잘 타지 않는 팝 위주로 틀어놓는다. 그래야 리플레이가 돼도 지루함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카페 오픈 시간은 에누리 없이 오전 10시다. 그럼 땡 하는 시간과 함께 가장 먼저 카페 안을 들어서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