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님 아가씨

둥글고 커다란 보름달의 달빛이 세상을 온통 환하게 밝혀주는 밤이었다.

여인은 갓 낳은 아기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등을 문질러주며 어르고 있었다.

이제 막 태어난 생명.

그 작고 보드랍고 아슬아슬한 몸짓이며 가녀린 울음소리.

아가, 달빛이 가득하구나.

귀여운 달님 아가씨.

너를 루나라고 부를 거야. 안녕 루나.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루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누구 하나 다를 것 없이 전부 다 그 여자애를 블루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블루문.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현상이 몇 년에 한 번꼴로 가끔 있었고 그때 두 번째 뜨는 보름달을 블루문이라고 한다.

동양에서 달을 신성시하여 보름달을 숭배하고 명절로 지내기까지 하는 것과 달리 서양에서는, 그것도 중세 시대에는 특히나 보름달을 금기시하곤 했다.

당시 유행하던 마녀사냥에서도 그 마녀들의 집회 장소가 보름달이 뜨는 깊은 숲속이라고 생각할 만큼 사람들에겐 무시무시하고 음침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후대로 내려와서도 보름달 뜨는 밤에 늑대인간이 나타난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낼 정도이니 보름달에 대한 서양 사람들의 생각이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그 보름달이 한 달에 두 번씩이나 뜨는 것이니 오죽하겠는가.

아이의 아버지는 세 번째 딸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이미 딸은 둘이나 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필요했다. 병약한 큰아들 말고 튼튼하고 활기찬 녀석으로 말이다.

딸, 아들, 딸, 아들.

이런 식으로 기대를 했었는데 그 기대감을 배신하고 여자아이가 태어나고 말았다.

그것도 재수 없게, 블루문이 뜬 밤에 말이다.

실망하는 그를 위로한답시고 동네 친구들이 술을 권하며 떠들다가 이런 소리까지 해댔다.

“어이, 자네 그 딸 잘 키우게.”

“마녀가 되지 않게 조심하라고, 보름달의 정기가 가득하니 말일세.”

당장 술판이 엎어졌고 엎치락뒤치락 싸움판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뜯어말려서야 겨우 떨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얼굴의 상처를 쓱 문질러 피를 닦으며 그는 생각했다.

‘두고 보라고, 누가 뭐래도 제일가는 신붓감으로 키우고 말 테니까. 마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재수 없이 블루문에 태어난 여자아이라 어디 산속에라도 갖다버리고 입이라도 덜까 싶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동네 친구들의 놀림들 듣고 나니, 아니 한바탕 그 아이로 인해 실컷 싸우고 나니 새삼스럽게 아이에 대한 애정이 솟구치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속마음일 뿐 여전히 겉으로는 퉁명스러웠다. 자식에게든 마누라에게든 속없이 해실거리는 건 사내다운 짓이 아니다.

***

블루문.

그 아이가 자라면서 마을에서는 블루문에 대한 안 좋은 인상들이 점차 바뀌어갔다.

이제 블루문이라고 하면 재수 없는 보름달이 아니라 마을에서 가장 활기차고 사랑스러운 꼬마아이가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다들 블루문을 좋아했다.

“어이, 블루문 어디 가니?”

“블루문, 어머니께 전해 드려라.”

“오늘은 유난히 더 예쁘구나, 블루문.”

그랬다. 블루문은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한 마디라도 건네 보고 싶을 만큼 그렇게 예쁘고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 자신이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어머니 심부름으로 방앗간에 다녀오다가 돌아다본 저편 언덕 너머로는 영주님의 성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이 홀린 듯이 성을 바라보고 말았다.

저곳은 별세계다.

저기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을까.

가끔 성문을 드나드는 행렬을 볼 때가 있다.

말들이며 마차며 시종들이며 그 규모가 상당하다.

짐을 부리는 하인들만 해도 그 정도인데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할까.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데 주정뱅이 목수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껄껄 웃는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아, 아저씨.”

“저 성안에 들어가 보고 싶지?”

속내를 들킨 거 같아 얼굴이 달아오르던 블루문은 이어지는 의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걱정 마라, 너도 언젠가는 저 성에 들어가게 될 테니…….”

“네?”

“기다려봐라, 너한테도 기회가 올 거다.”

어리둥절해 하는 블루문을 향해 더 큰소리로 웃어대던 목수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떠날 때까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터덜거리며 겨우 몇 발짝 옮기는데 마침 지나치던 이웃집 사내아이 토마가 방앗간 짐을 들어주기 위해 다가왔다.

“너희 큰누나 시집간다더라.”

“응. 그래서 엄마가 잔치한다고 밀을 빻아오랬어.”

“정말 예쁜 신부가 될 거야.”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니.”

서너 걸음 걷고 나서 토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블루문, 넌 누구랑 결혼할 거니?”

“글쎄…….”

“나하고 하자.”

“네 아버지가 빚 다 갚고 나거든 생각해볼게.”

“아이 씨.”

말은 그렇게 했지만 토마가 씩씩거리는 걸 보면 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라면서 친하게 지냈다.

아마도 별다른 일이 없으면 토마하고 결혼하게 될 것이다.

큰언니도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하고 결혼하지 않나.

연애란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집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분위기가 가라앉아있다.

무슨 일일까?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음식 준비를 하시고 둘째 언니가 거들고 있었다. 슬쩍 끼어들면서 눈치를 살피다가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왜?”

“언니가 울어.”

“울어?”

시집가기 전에 웬 일일까.

이 좋은 날에…….

“왜 울지? 아버지한테 야단이라도 맞았나?”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

“그럼 언니는 안단 말이야?”

“더 크면 일러줄게.”

활달한 수다쟁이 둘째 언니도 그 이후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지만 꼬마에겐 알려주지 않는다.

***

언니의 결혼식 날.

큰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사하게 웃으며 사람들의 축복을 받았다.

제일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엔 꽃으로 장식한 베일을 썼다.

그 베일은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 썼던 것이라고 한다.

나도 언젠가는 저 베일을 쓰고 시집가게 될 것이다.

내 옆에는 토마가 잘 자란 청년이 되어서 서 있겠지.

모처럼 잔칫날이라 다들 먹고 마시고 기분 좋게 여흥을 즐겼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점점 어두워지자 큰언니의 안색이 다시 불안해졌다.

어머니가 다가가서 이제 막 신부가 된 맏딸을 꼭 끌어안아주셨다.

이제 언니는 남의 집 사람이 되는 것인가.

그 마음을 알 거 같아 덩달아 기분이 묘해진다.

어머니는 눈물까지 보이셨다.

아버지는 이제 사위가 된 새신랑을 데리고 술을 마시고 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신랑을 둘러싸고 흥청망청 취해간다.

그때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와 함께.

어머니는 한 번 더 딸을 꼭 끌어안았다가 놔주며 병사들에게 넘겨주었다.

무슨 일인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언니를 실은 마차가 멀어져갔다.

무슨 일인가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셨다.

그 뒷모습이 너무 서늘해서 말을 붙이기가 겁난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토마가 다가섰다.

“영주께서 결혼을 축복해주시는 거야.”

“축복을? 누가 그래?”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어.”

“그럼 형부는 왜 같이 안 가지?”

“사람들이 자꾸 술을 먹이니까. 술 취한 채로 영주님을 뵈러 갈 순 없는 거잖아.”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여전히 아리송하다.

영주님을 뵈러 가는 건 미리 예정되어있는 일인 거 같은데 왜 사람들은 형부에게 술을 먹였을까.

어쨌거나 그렇게 결혼식은 끝났고 다음날부터 다시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

어느새 세월이 흘러 블루문도 키가 쑥 커지고 허리가 가늘어지며 여성스러워졌다.

어머니는 종아리 위로 올라오는 치마 길이를 보시더니 언제 이렇게 컸누, 혀를 끌끌 차시며 그 아래에다 헌 천 조각으로 덧대어주시다가 불쑥 바늘을 내미셨다.

“이리 와서 해봐라. 이제 너도 바느질은 할 줄 알아야지. 더 이상 천둥벌거숭이처럼 들판을 뛰어다니는 짓은 그만 하렴. 얌전하게 살림 배우고 시집가야지.”

왜 그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그렇게 쓸쓸하게 느껴졌을까.

그사이에 오빠가 결혼을 했고 새언니와 살림을 차렸다.

여전히 새 신부는 영주님의 축복을 받으러 홀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몸이 약한 오빠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조용히 기도만 했다.

누군가가 술을 권했지만 오빠는 거부했다.

이제는 나도 어렴풋이나마 그 축복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아무도 내게 자세하게 일러주진 않지만 말이다.

이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기가 힘들어 밖으로 나갔는데 마침 달이 떠 있다.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비치는 들판에 서서 홀로 생각에 잠기는데 누군가가 와서 내 등을 툭 친다.

돌아보지 않아도 토마라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