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름은 유하진. 나이는 열여덟 살. 나름 선이 고운 얼굴을 제외하면 평범하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그녀는 오늘도 별거 없는 하루가 될 것을 짐작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

대한민국의 여느 고등학생들과 다른 바 없는 일상을 보내겠지. 집, 학교, 학원의 반복 생활, 뭐 그런 것들. 이젠 익숙하다 못해 잔뼈가 굵어진 생활패턴이다.

그녀는 평범함의 대표주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난하게 살아왔다. 털털하고 긍정적인 성격 덕에 교우관계 원만.

교사이신 부모님 덕에 공부 머리도 좋은 편, 고로 학업성적도 우수. 키는 조금 작긴 하였지만, 이 정도면 그리 작은 편도 아니었고. 마른 체형 덕에 작아 보이진 않았다.

이렇듯 외형적으로도 부족함은 없었다.

그야말로 ‘자애로운 어머니와 엄격하신 아버지’ 밑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자란,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아… 학교 가기 싫어.”

무던히 흘러가는 나날들, 단조롭지만 소소한 복을 누리는 삶.

하진은 앞으로도 그런 평범한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이런 일상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따분했다.

‘아무렴 어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평범한 것도 노력과 운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현재에 만족했다.

늦은 시각, 학원을 끝마치고 귀가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그녀는 피곤으로 지끈한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 앉았다.

별 하나 안 보이는 도시의 밤 속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건 그녀 나름대로 힐링이다.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노래를 듣고 괜스레 감상에 젖어보는 시간. 하루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시간이다.

학업의 피로감도 지금 이 시간엔 잠시 잊혀졌다.

“집 가고 싶다….”

요즈음 부쩍 입에 붙어버린 말이다. 귀가 중임에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걸 보니 단단히도 입에 붙은 모양이다.

어떨 땐 집에 있으면서도 이 말을 할 때가 있다. 갑자기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저 그건 평범한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에 가서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고 핸드폰을 하다가 잠이 드는, 그런 평범한 날.

하진의 일상은 남들과 다르지 않았고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녀의 일상은 아주 빠르고 간단하게 깨졌다.

***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강한 불빛과 경적음 그리고 충격.

신호를 위반한 대형 트럭은 버스에 충돌했고 작은 버스는 맥없이 전복되었다.

순간 눈앞의 세상이 몇 번씩 돌아가고, 앉아있던 그녀의 몸은 곤두박질쳤다.

머리를 세게 부딪친 듯 축축한 느낌이 났다. 그뿐만 아니라 온몸이 아파왔다.

흐린 눈앞으로 엉망이 된 버스 내부가 보였다.

“으으….”

잇새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나왔다. 시선을 옮겨보니 하얀 교복 셔츠가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챘다.

‘피….’

무시무시한 통증과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죽도록 아픈데 눈꺼풀은 무거웠다.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살… 려줘….”

앓는 소리만 나던 입에서 살려달란 말이 흘러나왔지만,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몸과 의식이 죽음으로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공포가 엄습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엄마, 아빠….’

외동딸인 자신이 세상을 떠난다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 걱정이 앞섰다. 뒤따라 짧은 생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 죽기 싫어.’

아직 열여덟 살인데, 이 창창한 나이에 죽는 건 너무 억울했다.

‘제발 살려줘….”

그렇게 죽음의 혼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

눈을 뜨니 무의 공간이 그녀를 반겼다. 하진은 천천히 제 몸을 살펴보았다.

피로 물들었던 교복은 오늘 아침, 등교할 때처럼 깔끔한 상태였고 몸은 상처도 통증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주위를 살펴보아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

그곳에는 자신과 정체 모를 사람만이 마주 보고 있었다.

소년 같기도, 여인 같기도 한 모습의 사람. 직감적으로 그가 신의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신이 있는 곳에 오다니 난 죽은 거구나.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무의 공간에서 하진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문득 눈앞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만 울지.”

“?”

“이름은 유하진, 나이는 열여덟 살, 평범한 학생이네.”

그는 일상적인 사무업무를 보듯 딱딱하게 말했다. 신이라기엔 무신경하고, 차가웠다.

“…당신은 신인가요?”

그녀가 애써 울음을 참으며 물었다. 눈앞에 있는 신의 냉소적 태도에 기가 죽었달까.

“뭐 그런 셈이지.”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천국이나 지옥… 뭐 그런데 가는 건가요?”

딱히 따르는 종교는 없지만, 으레 생각하는 통념은 있었다. 생전의 삶이 선하면 천국에 가고, 악하면 지옥에 가는… 그런 섭리 말이다.

“종교가 이런 게 문제라니까 사후에 다 천국이나 지옥만 가는 줄 아나.”

신으로 보이는 이 사람은 그 섭리를 부정했다. 다소 충격이긴 했지만, 종교를 믿지 않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때, 신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진은 홀린 듯 몸을 일으켜 그를 따라갔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무의 공간에 있는 유일한 유의 존재를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신에겐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이대로 죽기엔 억울했으니.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럼 죽은 다음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안 알려줄 거야.”

신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답변은 하진의 예상 밖이었다.

권태로운 태도로 미루어보아 제대로 된 답은 안 해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이건 예상의 범주를 훨씬 벗어난 답변이었다.

안 알려준다니. 무슨 신이 이렇게 무책임하단 말인가.

“원래 신은 무책임한 거야. 너무 불평하지 마.”

“…그, 그걸 어떻게….”

분명 마음속으로 생각했는데. 그에겐 다 들렸던 모양이다.

흠칫 놀란 것도 잠시. 신이 인간의 속마음을 못 듣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 맞다.”

그가 중요한 것을 깜빡했다는 듯 멈춰 섰다.

“넌 아직 죽지 않았어.”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가다듬었던 마음에 세찬 파도가 쳤다.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우가 그녀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이를테면 사후세계인 이곳에서 신과 마주하고 있는데. 아직 죽지 않았다니.

하진은 현재의 모순적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신은 짧게 미소를 머금었다.

“다만 죽음의 문턱에 있을 뿐이지.”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 뒤로 들려오는 말은 다소 신경을 긁는 내용이었다.

“…넌 애초에 열여덟에 죽을 목숨이 아니야. 인간사의 변수의 변수가 꼬여서 널 죽음으로 이끈 거지.”

죽을 목숨도 아닌데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 이 억울함을 사해에 뿌려도 모자랄 것만 같았다.

분했다. 그녀는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살고 싶었다.

삶을 가슴 깊이 사랑한 적은 없으나 죽음을 반길 수는 없지 않은가.

일순, 그녀는 희망의 기운을 느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신을 상대로 하고 있으니 왜인지 긴장되었다.

마른침을 삼킨 하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의 어깨를 잡았다. 그 진동이 그녀의 상기된 감정을 나타내었다.

“가여운 아이로구나.”

그가 눈을 가늘게 늘리며 말했다. 신의 눈엔, 그녀가 불쌍할 뿐이었다.

“그, 그럼 저를 살려주시는 거예요?”

그가 대답하기 전임에도 온몸이 환희로 가득 찼다. 하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다시피 주저앉았다.

거의 매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애초에 죽을 목숨이 아니었다면 다시 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하지만 그 기쁨을 깨부수듯 냉정한 음성이 이어졌다.

“안타깝긴 하지만 널 너로서 살리긴 힘들어.”

“그, 그게 무슨 소리여요?”

그녀의 입가에 말라버린 미소가 굳어졌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기쁨에 고양된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초라하게 열기를 잃은 감정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녀의 반응을 본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드물긴 하지만 너 같은 경우로 죽는 일이 종종 있거든 그들 중 대부분이 환생하는 길을 택했어.”

“그래서…. 저도 환생하라는 건가요?”

한순간에 하늘과 땅을 오간 듯 그녀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넌 드문 경우 중에서도 드문 경우라…. 평범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사실 변수가 거듭되어 초래한 사고거든. 이 경우엔 제대로 된 메뉴얼이 없어.”

그는 자신의 할 말만 했다. 하진의 감정과 지난 삶 따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하진은 그 자리에서 굳어있었다. 정신세계가 유리 깨지듯 부서졌다.

이대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내 운명대로 살지도 못했는데 찍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냥 죽으라니. 그녀는 작은 손을 말아 쥐었다.

명백한 원망의 의미였다. 그녀의 손을 보던 그가 작게 미소 지었다.

“당돌한 아이로구나.”

신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그는 공정하지만 공평하지 않다.

신에게도 특별히 사랑하는 인간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인간 탓에 죽은 인간.

안타까운,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 그는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