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하진은 바람으로 들썩이는 창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마마님, 무에 고민이라도 있으셔요?”

“음, 아니 그냥 선민이가 너무 늦게 오는 것 같아서. 요즘 홍 나인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이 좀 되네.”

“마마님은 항아님을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소현이 지켜본 하진은 좋은 사람이었다. 정도 많고 웃음도 많고 사려 깊기까지.

같은 비자이던 시절보다 웃음기가 적어지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밝았다.

“그럼, 힘들 때 도와줬던 벗인 걸…. 만약 홍 나인이 없었더라면 난 지금쯤 못 버텼을지도 몰라.”

하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언젠가 엄 나인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나비가 죽었을 때도, 세자의 지밀로 바뀌게 되었을 때도.

선민은 변함없이 그녀의 곁을 지켜준 친우였다.

“마마….”

소현은 부쩍 차분해진 하진이 마음 쓰였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하진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본 하진은 살짝 웃어 보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난 괜찮아, 그것보다 너도 어서 행랑으로 돌아가야지.”

날이 추워짐에 따라 해가 뜨는 시간도 짧아진다.

선민과 소현이 쓰는 행랑은 밀화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쉬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아직 초저녁인데 마마님을 두고 제가 어찌 가겠습니까.”

아무리 하진이 편하게 대해줘도 그녀는 승은 궁녀이다. 소현과는 분명히 다른 신분이었다.

그녀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는 이상 최선을 다해 보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괜찮대도. 넌 이곳에서의 일 말고도 할 일이 많잖아. 나까지 발목 잡고 싶지 않으니까 어서 가서 쉬어.”

“…그치만….”

“어허, 어서 가래도.”

하진의 단호한 말에 소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빈방에 그녀 홀로 남게 되었다.

***

눈은 오지 않았지만,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하진은 마루에 걸터앉아 선민을 기다렸다.

‘대체 어디를 간 거야….’

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무료함을 달래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진은 소매 끝을 매만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궁녀의 옷을 입었었는데 지금은 고운 비단옷과 두꺼운 겉옷까지 입게 되었다.

신분 상승이란 말을 몸소 실감했다. 입는 옷도, 먹는 음식도, 자는 곳도 모두 달라졌다.

궁에서 그녀에게 하대보다 존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하진은 그것이 아직 어색했다.

자주 마주칠 일도 없었지만 늘 존대를 하던 궁인들에게 말을 편히 놓는 것도 어려웠다.

“앞으로 서른 살까지 이렇게 살아야겠지….”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무런 힘없는 승은 궁녀가 지아비 없이 궁궐에서 평탄하게 살 수 있을 리 없다.

대를 이을 아들이라도 낳지 않는 이상.

“…….”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것이 문제였다. 상념이 많아지고 고민은 깊어진다.

“밀화당.”

“……?”

담벼락 너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녀는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심으로 몸을 수그린 그녀는 천천히 벽에 다가섰다.

“누구…십니까?”

“접니다. 주은성.”

담벼락 너머, 목소리의 주인이 제 소개를 하자 하진은 황급히 문간으로 향했다.

그녀가 뛰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은성 또한 문간으로 다가갔다.

덜컥.

하진은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은성의 모습에 왜인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졌다.

“…….”

은성은 서연관의 관복이 아닌 내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옷은 낯설었지만, 사람은 더없이 익숙했다.

“오랜만입니다, 밀화당.”

은성은 능글맞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나으리.”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호칭이 낯설고 어색했다. 하진은 어렴풋하게 웃으며 그를 환대했다.

“이 옷은 다 뭡니까?”

“귀하신 밀화당 마마님을 뵙는데 외간 사내의 복색이어선 아니 되지요.”

이제 전처럼 편히 볼 사이가 아니었다. 궁녀와 서연관이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하진은 공식적으로 세자의 여인이 되었기에 더더욱 만남을 주의해야 했다.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야기나 나눌까 하여 들렀습니다. 마마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밖에서 대화하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날이 제법 춥지만 하진은 찬바람을 맞는 일을 좋아했기에 괘념치 않았다.

“예, 괜찮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차라리 바람이나 쐬고 털어버리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

하진은 방에서 아까 마시려다 만 차를 내왔다.

선민, 소현과 함께 즐기기 위해 세 개의 잔을 가져왔었는데 선민이 자리하지 않아 비어있던 찻잔이 있었다.

따뜻한 차를 가져온 하진이 마루에 걸터앉은 은성에게 이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는 미소로 화답했다.

“…나으리께서 제게 존대를 하시니 조금 어색합니다.”

은성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예를 갖춘 어투를 사용했지만, 아예 존댓말을 쓰는 것과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어투만으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리감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제 밀화당이 되셨는데 이리 어색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게요. 역시 저는 누군가의 위에 있을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부름을 받을 때는 잘 몰랐는데 무언가 시키는 일도 은근히 부담되고 난감한 일인 것 같아요.”

“…날 때부터 누군가의 위에 있던 자들은 밀화당처럼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은성도 양반가의 자제이다. 날 때부터 누군가의 위에 있던 자 중 하나였다.

왕실 종친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누군가를 시키는 일에 어색함이 없는 사내였다.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하진에겐 그것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녀는 천천히 양팔로 무릎을 감싸 안았다.

“벌써 겨울입니다. 나으리를 처음 뵈었을 때가 봄이었는데.”

그리고 호를 처음 만난 것도 봄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른 것인지. 눈 깜빡할 새의 찰나처럼 느껴졌다.

“…이제 와 드리는 말씀이지만, 처음 밀화당을 뵈었을 때 참 별난 여인이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연관인 제게 그리 서슴없이 말하는 여인은 처음 보았거든요.”

“풉, 제가 그랬나요?”

까마득한 옛일처럼 기억이 흐렸다.

그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다른 사람인 것처럼, 과거의 자신과 멀어진 기분이었다.

“그때는 궁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래서… 나으리께서 그리 높으신 분이라는 게 체감이 잘 안 되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랬습니까.”

“예,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겁도 없었네요. 그렇게 맹랑한 말을 다 하고.”

일개 비자 주제에 서연관에게 조언이나 하고, 제 앞가림도 못 하면서 타인에게 거침없이 관여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흘러가는 역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뜻 모를 특별함을 느꼈던 것 같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면서.

“실은 오늘이 누이의 기일이라 적적한 마음에 마마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누이의 기일…이요?”

은성에게 누이가 있었단 이야기는 전에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세상을 떠난 줄은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제가 말을 너무 늘어놓았네요. 송구합니다.”

“마마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말을 하지 않은 것인데요.”

“그래도….”

“게다가 누이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이제는 얼굴도, 목소리도 가물가물합니다.”

“…….”

“누이는 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아 늘 집안에서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큰 병에 걸려 몇 해를 앓다가, 순리에 따르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슬픔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어, 그저 위로한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세자 저하를 뵙고자 서연관이 되었습니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그분과 제가 닮았다고 느꼈거든요.”

“…….”

하진은 종종 은성과 호가 닮았다 느낄 때가 있었다. 본인조차 그렇게 느꼈다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은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아야만 속이 편할 것 같았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막상 세자를 보고 나서야 알아챘다.

더 큰 불행을 떠안았지만 그만큼 묵묵히 견디고 버티는 그를 보니 자신이 초라해졌다.

세자의 스승이지만 되레 그에게 배우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오늘은… 이 말을 하고자 왔습니다.”

“무슨 말이요?”

공기의 흐름이 묘하게 흘러갔다.

“나는 당신을 은애합니다.”

휘몰아치듯 그의 마음이 다가왔다.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하진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익히 보았다.

그리고 얼마 전, 그녀가 크게 다쳐서 이곳 밀화당에서 칩거할 때 은성이 찾아왔었다.

그날부터, 은성 또한 호와 같은 눈으로 저를 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엔 단순히 착각이고 기우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그는 좋은 친우였고, 궁녀와 서연관이라는 신분 때문에라도 그가 마음을 숨길 거라 믿었다.

이기적이지만, 외면해왔다. 마음을 외면당하는 것이 얼마나 쓰린 줄 알면서.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예상보다 차분한 반응을 보이자 은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눈치챘었습니다. 다만 착각일 거라 생각하여… 송구합니다, 나으리.”

“아니요, 차라리 다행입니다. 승은 궁녀를 희롱했다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걸요.”

“제가 어찌 나으리를 그리 대하겠습니까.”

와중에도 은성의 농담에 헛웃음이 나왔다. 묘하게 흘러가던 공기가 세찬 겨울바람에 흐지부지 사라졌다.

어느새 두 사람은 편안하게 서로를 보고 웃었다.

“제가 마마님의 친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좋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허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암만 내관이라지만 누가 보았다간 추문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궁궐은 무서운 곳입니다. 마마님 같은 분이 견디기 어려우실 겁니다. 부디 강건함을 지켜주십시오.”

“새겨듣겠습니다.”

“한 가지 더, 마마님의 곁에 있는 궁인…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아무쪼록 제 말을 잊지 마십시오.”

은성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허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살펴 가십시오. 나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