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날이 더워지니 생활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얼 해도 금방 땀이 차고 갑갑했다.

이래서 여름은 좋아할 만한 날씨가 못되었다.

특히나 여자라면 한 달에 한 번씩 겪는 일을 치를 때면 이만한 곤혹이 없었다.

“생리대는 왜 조선 시대 때 개발이 안 된 거야….”

굳이 따지자면 면 생리대 격인 것을 사용하자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샐까 봐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시로 손빨래해야 했다.

나름대로 조선에 적응했지만, 가끔 불편한 것이 있을 때마다 짜증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스스로 깨닫곤 한다. 나는 현대의 사람이라고.

이곳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오래되다 보니 과거가 희미해졌고, 그녀는 그것이 두려웠다.

짜증이 조금 나긴 해도 불편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자신의 정체에 대해 되새길 수 있어서 꽤 좋다고나 할까.

아주 백해무익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생리통은 지구에서 사라져야 해….’

아픈 것은 엄연히 아픈 것이었다.

하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키고 미간을 구겼다.

이곳에는 통증을 가라앉힐 약이 변변치 않다 보니 그저 참는 수밖엔 없었다.

그녀는 한껏 험악한 인상을 한 채로 동궁으로 향했다. 함께 걷던 선민이 힐긋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진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놀란 듯 물어왔다.

“유 나인, 괜찮아? 안색이….”

“…달거리가 다 이렇지 뭐….”

하진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주기가 워낙 불규칙한 편이라, 예상치 못한 통증에 반쯤 해탈한 상태이다.

“힘들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선민이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야… 안 그래도 홍 나인 나 때문에 힘든데….”

“난 괜찮다니까.”

“응… 고마워….”

선민에겐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하진이 엄 나인에게 밉보인 탓에 덩달아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데도 개의치 않고 하진의 곁을 지켜주었다.

엄 나인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그녀 때문에 지쳐가고 있던 시기였다.

선민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배려해주고 도와주는 선민에게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선민은 조선에 온 후로 만난, 두 번째 친구이니까.

***

‘운수 대통이로구나….’

하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필이면 오늘같이 힘든 날에 빈궁의 곁에 온종일 붙어있어야 한다니.

문간을 지키거나 다른 심부름을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그녀의 수호신처럼 붙어있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잔심부름과 이따금 느껴지는 뜻 모를 눈초리. 그걸 감당하기엔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전 앞에서 표정을 구기고 있을 수도 없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 뿐.

애써 이성을 유지한 하진은 자리에 앉은 채로 자세를 유지했다. 그곳에 앉아 온종일 빈궁의 수발을 드는 것이 오늘의 업무였다.

“…….”

빈궁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작은 천에 수를 놓고 있었다. 말도 없고, 표정도 없이.

바느질은 조선 여인들의 기본 덕목. 빈궁도 예외는 아닌 것으로.

그녀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었다. 실을 다루는 손놀림조차 단아하고 고귀했다.

미려한 손끝으로 형형색색의 실을 수놓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과연 이 나라의 세자빈다운 자태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진은 의문을 품었다.

‘저렇게 완벽한 사람이 왜 나 같은 걸 신경 쓴 거지….’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빈궁은 완벽했다. 모르는 이가 보아도 알 정도로 용모며 범절이며 부족한 점이 없었다.

신분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자신이 훨씬 낮게 느껴졌다. 되레 하진이 그녀를 신경 쓸 정도였다.

‘저런 사람이 항상 옆에 있었으니… 어떤 여인을 보아도 성에 차지 않으셨던 거지….’

그녀와 세자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세자는 빈궁 외에 가까이하는 여인이 없고 둘 사이의 정이 두텁다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정말 가능성 없겠구나.’

하진이 작게 한숨 쉬었다. 그를 멀리서 지켜보며 깨달았다.

그는 일국의 세자이고, 그녀는 일개 궁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런 그를 마음에 담았다는 것을.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를 향해 뛰던 심장의 고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친구에게 품은 호감이라기엔 넘치는 마음, 사내에게 품은 연정이라기엔 부족한 마음.

그 사이에서 도달한 결론이 있다.

친애의 감정을 넘어선 순간부터, 이미 연애의 감정이란 사실을 알았다.

‘…처음 좋아하게 된 남자인데 이게 뭐야….’

좋아하는 남자의 아내를 윗전으로 모신다는 배덕감이 느껴졌다.

그에 앞서 그녀가 마음에 품은 상대는 조선의 국본이라는 신분의 차이, 그는 훗날의 인종이라는 예견된 역사까지.

이 모든 사실의 돌덩이가 되어 가슴을 에워싼 듯했다.

그를 평생 벗 삼아 살며, 위안이 되고자 했으면서 감히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는 걸까.

“거기 자네.”

“…….”

“유 나인.”

“…송, 송구하옵니다! 빈궁 마노라.”

뒤늦게 빈궁이 자신을 불렀음을 깨달은 하진이 화들짝 놀랐다.

정신이 나갔던 것일까. 감히 빈궁의 말을 못 듣다니.

언제나 후회는 한발 늦는 법이었다. 미묘한 눈길로 그녀를 응시하던 빈궁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윗전의 말에도 귀를 닫고 있었는가.”

원체 위엄 있는 빈궁인지라 그녀가 낮게 목소리를 낼 때면 손끝에서부터 땀이 날 정도로 무서웠다.

등줄기가 시원해지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것이….”

이 상황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다간 큰일이 날 것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관철하는 듯한 저 시선. 저 눈빛이 제게 향할 때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만 하는 절대자의 눈이었다.

빈궁도 세자만큼이나 강한 인물. 자주 웃지 않아서 어떨 땐 세자보다 더욱 견고해 보였다.

“속히 말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그냥….”

평소 같았으면 잘 넘어갈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몸 상태가 상태인지라

몸도 아프고 머릿속까지 새하얘졌다. 그녀는 입맛 벙긋거릴 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뜸 들이면 빈궁의 진노를 살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입에서 완성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유 나인.”

그녀가 다시 한번 하진을 불렀다. 더이상 자신의 말에 답하기를 망설이면 경을 칠 것처럼 격양된 어조로.

‘망했다.’

좌절하던 바로 그 순간.

“세자 저하 드시옵니다.”

“…….”

고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빈궁.”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푸른 용포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수려한 겉모습부터 옷자락 하나에까지 깃들어 있는 강렬한 위엄, 정말 세자가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세자의 등장에 놀란 것은 하진뿐만이 아니었다. 빈궁도 놀란 기색이었다. 예정된 만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세자에게 예를 갖추었다. 호는 제게 고개 숙인 하진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 그는 미소 지었다.

따뜻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녀의 시야의 끄트머리에 호의 입가가 보였다.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 그 웃음이 저를 이토록 애달프게 한다는 것을 그는 알까.

찌르르.

처음 느껴보는 기분 좋은 따끔거림.

저 미소는 그저 벗을 아까는 미소란 것을 알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진은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그의 앞에서 넘어지고 싶지 않아 더욱 오기를 부렸다.

“…어찌 된 일입니까, 저하. 이리 소식도 없이 오시다니요.”

와중에 빈궁은 그를 반겼다. 세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꽤 반가운듯했다.

“그저 지나가다 들렀소.”

그가 무던하게 답했다. 짧게 피고 진 봄꽃처럼 금세 사라진 미소와 함께.

온화한 분위기를 가진 그였지만 웃지 않을 때는 누구보다 차갑고 냉정해 보였다.

“그러십니까….”

빈궁의 안색이 어두웠다. 하진에게 향했던 미소를 봤기 때문일까.

그의 마음에 자신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걸음이 자신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여긴 탓일까.

빈궁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가 물었다.

“빈궁, 근자에 무슨 일이 있으셨소? 안색이 좋지 않구려.”

“아니옵니다, 저하.”

그녀가 부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색이 영 어두웠다.

조금 전 무던한 얼굴로 수를 놓던 여인이 잠시 자취를 감춘 것처럼.

“날이 더울수록 기력이 쇠해질 수도 있다 하오. 내의원에 일러둘 터이니 보약을 드시는 게 좋겠소.”

“황공하옵니다, 저하.”

그의 말 한마디에 빈궁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발그레한 홍조는 세자가 제게 보인 호의 탓이리라.

호의를 받고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연모하는 사내에게서 호의를 받았으니 아주 기쁘고, 들뜬 마음일 것이다.

둘을 지켜보고 있는 하진의 가슴이 아려왔다.

심장에 무거운 추를 걸어놓은 듯 답답했고 조금 쓰리기까지 했다.

궁궐 내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사이가 좋은 세자와 빈궁이다. 일전에 잠깐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질투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이건 뭐 확인 사살도 아니고….’

마음이… 아팠다.

성격이 아무리 좋은 이라도 마음에 품은 사내가 다른 여인과 정다운 모습을 보인다면 누구든 가슴이 아플 것이다.

호는 처음 들어왔을 때 빼곤 하진에게 곁눈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안 돼, 서운해하지 말자 이게 정상이잖아.’

마음속으로 여러 번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지만 눈동자에 비친 두 남녀가 그녀의 다짐에 금을 내었다.

눈앞에 있으니 신경을 안 쓸 도리가 없었다.

차분한 세자와 빈궁의 단조로운 대화. 그런데도 격조 있고 우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