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편의점을 싣고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 늘 같은 주스를 사는 남자 손님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 그 남자는 늘 무표정이었다.

사람을 잘 기억을 못 하는 나인데, 그 남자 손님이 유독 기억이 남는 이유는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었고, 매일 똑같은 주스를 사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늘 꽃내음이 난다는 것이었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봄같이 따뜻하고 예쁜 꽃내음이. 어느 날부턴가 그 손님은 주스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꼭 나를 주었고, 점점 그 손님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 손님의 이름이 ‘진의현’이라는 것과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그의 꽃내음만 맡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관심 있어요.”

“인아 씨한테.”

그는 두근거릴 정도로 행복한 꽃길을 선사해 주었지만, 그건 잠깐의 순간이었다.

“심심해서, 딱 일회용 꽃으로 삼기 좋을 것 같아서.”

그는 한순간에 나를 꺾어 버렸다.

#1화

“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대체 언제까지 그 낡고 허름한 여자 집 앞에 서성거리고 있을 건데!”

“당신은 신경 끄라고 몇 번 말해!”

“그저 돈만 갖다주면 끝인 줄 알아요? 나랑 의현이 생각은 안 하냐고!”

“시끄러워!”

“그 딸 달린 여자가 그렇게나 좋아? 나이 사십이나 먹고 아직도 첫사랑이니 뭐니 그런 어린애들 감정에 시달리고 사냐고!”

“닥쳐!”

아이는 오늘도 날카롭게 들리는 부모님의 언성에 귀를 틀어막았다. 오늘은 아이의 생일이었다. 생일 기념으로 가족끼리 가자고 했던 여행은 엉망이 되었다.

가는 길 내내 차에서 여느 때처럼 시작되는 싸움에 아이는 울상을 지었다.

설상가상 하늘에서 비까지 내렸다.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아버지가 운전대를 내리쳤다.

그 행동에 어머니는 더 흥분해 소리를 질렀고, 귀를 막은 아이의 손은 덜덜 떨렸다.

그때 앞에서 달려오는 차를 인지하지 못했던 건 짧은 한순간이었다. 그 한순간에 제 부인을 보며 핏대를 세우던 아버지는 핸들을 꺾질 못했다.

“꺄아아악!”

고통으로 일그러진 어머니의 새된 비명에 아이의 동공이 커졌다.

생일날에 아이는 최악의 일을 겪고 말았다. 아이는 살려 달라는 듯 손을 뻗었다. 빨갛게 번진 밖을 바라보며 아이는 덜덜 떨었다. 그 시야 사이로 아스팔트 위에 자란 꽃이 옅은 바람에 흔들렸다.

그 순간 잿빛 같은 어둠이 아이를 덮쳤다. 아이는 그 순간 생각했다. 왜 자신에게 이런 불행이 찾아온 것일까, 누구 때문일까 과연.

아이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

늘 같은 주스를 사는 남자 손님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오는 그 남자는 늘 무표정이었다.

사람을 잘 기억을 못하는 나인데, 그 남자 손님이 유독 기억이 남는 이유는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었고, 매일 똑같은 주스를 사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늘 꽃내음이 난다는 것이었다.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봄같이 따뜻하고 예쁜 꽃내음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면 그 꽃내음이 내 콧속을 메울 때면 아 그분이 오셨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남자가 편의점을 오는 정도가 한 달 가까이 지났을까, 매일 사가는 자몽주스를 두 개 사더니 하나를 내게 건네며, 감정 하나 없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감사합…….”

감사하다는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을 때 그 남자는 휙 가버렸다. 그 음료수를 쥔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몽주스가 내 손에서 냉기를 차츰 잃어 갔다.

그다음 날, 그 또 다음 날 그 남자는 연속으로 세 번 정도 더 찾아왔다.

이번에도 똑같이 자몽주스 두 개를 카운터로 가져왔다. 난 그 남자를 새삼 유심히 바라보았다. 큰 키에 곱슬머리, 하얀 피부, 잘생긴 이목구비의 멋진 남자였다. 자몽주스 바코드를 두 개 찍고 돈을 받으려는 순간,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자몽주스 좋아해요?”

“네?”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얼른 내 의견을 말했다.

“그냥…… 조금?”

“조금?”

“네.”

“혹시 좋아하는 과일 주스가 뭐예요?”

이런 걸 묻는 저의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망설이다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과일을 말했다.

“레몬이요…….”

“레몬이라.”

카드를 건네받고 결제를 끝내는 순간, 남자는 자몽주스 하나를 내밀며 또 말 한마디를 툭 내뱉은 뒤 휙 가버렸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감사합니다.’의 ‘감’ 자가 내 입에서 나오려고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 남자는 날쌔게 편의점을 빠져나갔다. 나는 또 자몽주스를 한참이나 손에 쥔 채 멍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 사연 중에 ‘편의점 여자 알바생인데, 남자 손님께서 2+1 상품을 사서 하나를 주고 갔어요. 이거 저한테 관심 있는 거 맞죠?’가 있었는데 라디오 DJ들이 그 사연에 답변에 달기를,

‘음, 관심이라. 제 생각엔 2+1이면 솔직히 두 개만 필요한데 하나는 안 하기는 아깝고, 줄 사람은 없고 해서 그냥 알바 하니까 힘들 테니 이거라도 먹고 힘내라는 의미로 준 걸 수도 있어요. 아니면 자신이 예전에 편의점 알바를 한 경험이 있는데 알바생을 보니 그 옛날 생각에 젖어서 준 걸 수도 있고요.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나는 자몽주스를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이건 2+1 상품이 아니긴 하지만, 그저 자신이 불쌍해 보여서 준 것이겠지. 여자애가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할 정도로 삶이 힘든가 하는 딱한 마음에 혹은 예전 편의점 알바를 했던 경험에 젖어서라든지.

자몽주스 뚜껑을 열어서 입에 몇 모금 털어 넣었다. 달콤한 맛 뒤에 신맛과 쓴맛이 혀를 적셨다. 그리고 편의점 창밖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하루도 나는 열심히 살았다. 뿌듯함이 목구멍을 적시는 자몽주스처럼 내 자신을 덮쳤다.

내 나이가 벌써 스물세 살이구나, 하고 새삼 깨달아 깜짝 놀라고 있던 1월 1일 어느 시간이었다. 남자는 또 편의점 문을 열고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꽃향기가 편의점을 가득 메웠다.

“어서 오세요.”

남자가 그 인사를 받으며 아무런 표정 없이 고개를 까딱 숙였다. 오늘 그 남자는 짙은 회색의 롱코트를 입고 왔는데 마치 패션 잡지의 모델 같아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내 눈이 슬그머니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완벽한 잰걸음으로 망설임 없이 자몽주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길고 흰 손가락으로 자몽주스와 그 옆에 진열되어 있는 레몬주스를 꺼냈다.

그리고 카운터로 걸어왔다.

나는 자몽주스와 레몬주스의 바코드를 찍고는 금액을 말했다. 남자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지갑을 꺼냈다. 지갑도 남자의 용모만큼이나 매끄럽고 세련되게 생겼다.

카드를 받아 들고 긁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혹시 몇 살이에요?”

이번엔 남자가 말을 걸었어도 놀라지 않은 척, 뜬금없는 나이 질문에도 당황스러워하지 않게 태연스러움을 가장하며 매끄럽게 대답했다.

“스물셋입니다.”

내 대답 이후로 침묵이 다가왔다. 어색함에 나는 얼른 카드를 남자에게 건넸지만 남자는 받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표정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잘생긴 용모에 나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남자는 아랑곳 안 하고 시선을 카드를 내미는 내 손 쪽으로 돌렸다.

“손이 많이 트셨네요.”

그 말에 부끄러워진 나는 카드를 자몽주스 뚜껑 위에 내려놓고 얼른 손을 숨겼다. 고된 알바로 인해 여기저기 터진 못생긴 손이었다. 나의 손은 스물세 살의 아가씨 손이 아니었다. 예쁘게 관리해야 할 시간과 노력을 돈에게 뺏겨 버려서 여기저기 터져 버리고 단단한 굳은살이 박인 손은 할머니 손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는 힐끔 나를 보더니, 돌연 이런 말을 내뱉었다.

“예뻐요.”

“네?”

“돈과 시간 들여 관리해서 광나는 손보다는 살아가는 데 노력한 손이 훨씬 더 예쁘다고요.”

“아…….”

“저는 손 상태가 이래요.”

남자는 제 손을 내 눈앞에 들이밀며 보여주었다. 남자의 손에는 칼에 베인 것처럼 울긋불긋했고, 가시에 찔린 것처럼 피딱지가 앉은 상처들도 여럿 보였다.

순간 할 말을 잃은 나는 입을 떡 벌린 채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반응에 그 남자는 처음으로 나에게 웃음을 보여주었다.

“예쁘죠? 저도 살아가려고 노력 많이 한 손이에요.”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손에 상처가 많은 것일까 의문이 들었고, 호기심을 못 이겨 질문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남자가 더 빨랐다.

“나는 꽃을 만지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매일 꽃에 있는 가시를 다루느라 손이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플로리스트세요?”

“네.”

우와.

감탄사가 입을 타고 공기 속으로 빠져나왔다. 그래서 늘 이 남자에게 꽃향기가 났던 거였구나. 새삼 신기했고, 이 남자가 더 멋져 보였다. 남자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꽃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무슨 꽃?”

예전에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꽃이 있었다. 석 달에 꼭 한 번씩은 없는 돈을 모아서 예쁘게 리본으로 묶은 꽃다발을 아빠 영정사진 앞에 두었다. 그 꽃은,

“리시안셔스요.”

“흠.”

남자는 매력적인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아 둘게요. 오늘은 레몬주스 드시면서 하세요.”

남자는 또다시 휙 편의점을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덩그러니 내 앞에 놓인 레몬주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늘 받던 자몽주스와 다를 거라곤 맛뿐인데 뭔가 의미까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미 남자는 저만치 편의점을 나가 버렸지만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사라진 남자에게 조용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