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개나 주라 그래라!

핸드폰을 앞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넘겼다. 두 분이 한참을 통화하시다가, 엄마가 말했다.

“진희 엄마! 논산 훈련소에 거의 다 왔어요. 서울 올라가면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긴 시간을 진희 엄마와 담소를 나누시고,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돌려주셨다.

‘후유, 진희 목소리도 못 들어보고 입소를 해야 하는 건가.’

차를 주차하고 부모님과 훈련소 쪽으로 걷고 있는데, 진희로부터 메시지가 들어 왔다.

[규진아, 너 이미 훈련소 들어갔을지 몰라 메시지 보낸다. 가족들에게 방해될 듯도 하고. 군대 잘 갔다 오라고, 어제 여친 대신 찐하게 뽀뽀해 줬으니까, ㅋㅋㅋ, 훈련 잘 받아라. 화이팅!]

띠링, 또 하나의 메시지가 바로 들어왔다.

[술을 많이 마셨더니, 머리가 너무 아프다. 다시 자야 할 듯. 어젠 무사했어. 걱정하지 마.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여친 대신 진하게 뽀뽀해 줬다니?!

사랑은 개뿔.

개나 주라 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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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는 서양의 영양 섭취가 양호한 청년들이 으레 그렇듯이 키가 180을 훌쩍 넘었다.

정확히는 188cm라고 했다. 호스텔 카운터에서는 단정하게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해변에서는 언제나 웃통을 벗고서 새까맣게 그을린 근육질의 몸을 드러내었다.

서핑 슈트의 지퍼를 허리께까지 내려서 입거나, 와이키키 버뮤다 팬츠 하나만 입고 맨발로 성큼성큼 뜨거운 모래사장 위를 걸어 다녔다.

카운터에서는 서비스 업종에서 일하는 직원답게 빙긋빙긋 잘도 웃었다. 처음에는 능글맞은 20대 후반의 닳고 닳은 접대성 미소로 알았다. 오래지 않아 프로 폐셔날 한 표정을 만들 줄 모르는, 20살 총각의 멋쩍음을 피해 보려는 어색한 웃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머쓱하지 않게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핑 슈트를 입고 서핑 보드를 옆구리에 들고 맨발로 금발을 날리며 뜨겁고 하얀 백사장 위를 걸어가면 정말 간지가 났다. 그럴듯한 BGM만 깔리면 맥주 광고의 배경 화면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호스텔을 숙소로 정한 것은 영어 연수를 함께 받는 친구들과 함께 여러 숙박 시설들을 기웃거릴 때, 스티브가 친절한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적극적으로 동그라미까지 쳐 가면서 이 호스텔만의 특별한 서비스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10일 이상 장기 숙박 시 10%의 할인을 해준다며 적극 프로모션을 하였다.

공항까지 가는 밴을 하루에 두 번씩 운영하며, 같은 밴이 서핑을 배우는 해변까지 프리 픽업 서비스를 해주고 있단다. 별도의 비용 없이 최고의 서핑 클래스에 등록 대행 업무까지 해준다고 했다. 알아보니, 다른 호스텔들도 그 정도 서비스는 다 하고 있었다.

‘같은 값이면 친절한 미남이 있는 호스텔에!’

“2주 전에 여기 왔을 때, 너가 엄청 친절하게 안내해 줘서, 전화로 바로 예약했잖아!”

체크인할 때 넌지시 말했지만,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면서 건성으로 ‘알겠어!’라고 답했다. 힐끗 쳐다보는 눈빛이 기억을 전혀 못 하는 눈치다. 예약 확인하고, 선급 계산을 치르고 나서, 방 열쇠와 이불과 베갯잇을 받아 들고서, 방을 찾아 나섰다. 리셉션 뒤쪽의 바를 지나니, 작은 정원이 나왔다.

그 정원을 둘러싸고 방들이 있었다. 방으로 가는 시멘트 길의 초입에 도마뱀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가, 커리어 끄는 소리에 후다닥 수풀 속으로 숨어들었다.

잘 다듬어진 정원에 오른쪽과 왼쪽 건물 옆은 바로 해변으로 연결되는 나무문이 있는 예쁜 호스텔이었다. 해변으로 나가는 문이라고 해도 허리 정도 높이의 엉성한 문이라, 사람들의 접근이 꽤 쉬워 보였다.

4층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는 없다. 배낭족들이 주로 이용하는 호스텔이라서 그런 것 같았다.

다행히 내방은 1층이었다. 여행용 커리어를 들고 4층까지 올라가라 했으면, 이곳을 미워했을 거다. 리셉션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방이었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 아무도 없는데도 문이 잠겨져 있지 않았다. 귀중품은 리셉션에 맡기라고 하더니, 마구 열린 배낭 속의 자질구레한 살림들로 바닥이 어수선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눈이 부신 바깥과는 달리, 커튼까지 쳐진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벽을 더듬어 봤지만, 방 스위치조차 없었다.

커튼을 휘익 젖히니, 하얀 모래에 반사된 햇볕이 방안으로 훅 밀려와서 눈이 시렸다. 해변에서 호스텔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이 바로 보였다. 다시 두꺼운 커튼을 치고, 문 앞 오른쪽에 세로로 놓여 있는 내 침대 번호를 확인하고, 침대 맡에 있는 개인 등을 딸깍하고 켰다.

이층 침대의 위 칸이었다. 실망스러웠다. 혹시라도 비어 있는 아래 침대가 있으면 바꿔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래층 침대는 풀하우스였다. 빈둥빈둥의 삶에 심각한 장애가 생겼지만, 아까 체크인할 때 본 리셉션 옆에 있는 공동 거실을 개인 거실처럼 이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한 달의 ESL을 마치고, 호주에서 3주 동안 여행을 하겠다고 했을 때, 다양한 추천이 들어 왔다. 시드니 여행을 다녀온 매기는 시드니의 블루 마운틴을(파란산) 트랙킹을 하며 야생의 코알라를 만나 보라고 했다.

케인즈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대단한 산호초 장애물 지대)를 가겠다고 벼르던 패티는, 투어 보트를 타고 그린 섬 인근에 가서 스노클링이나 다이빙을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개인적으로는 호주의 아웃백인 앨리스 스프링스에 가서 3박 4일 캠핑카 투어를 하며 에어즈락(붉은 바위)을 등반해 보고 싶긴 했다. ESL 교사인 낸시가 수많은 별이 닿을 듯이 가깝게 쏟아지며, 희뿌연 은하수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에서만 볼 수 있는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환상적으로 묘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밤하늘이 아름다워서 슬리핑백을 입고는 텐트 밖으로 머리만 내놓고, 캠핑 투어 프로그램 상품에는 없는 하늘이 선사하는 자연의 경이를 감탄하며 잠들었다고 했다.

무계획으로 왔던 나는 생소한 여행지보다도, 브리즈번 바로 아래 있는 골드 코스트의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가서 서핑을 배우기로 간단히 결정을 내려서, ESL 급우들의 어이를 상실시켰다.

이곳에서 내 특기인 빈둥빈둥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마이애미, 와이키키, 랑카위, 팔라우…. 등등의 해변에서 하늘거리는 원피스나 스파게티 셔츠에 핫팬츠를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잡지들을 읽으며 해변 의자에 늘어져서 빈둥 되는 것이 꿈이었다. 호주의 애버리진 원주민들의 전통 문양이 새겨진 해변 원피스도 야시장에서 두 벌 샀다.

해변으로 나가기에는 한낮의 태양은 뜨거웠고, 선크림을 바른다고 해도 이정도로 강렬한 햇볕은 리셉션에 붙어 있는 피부암을 일으키는 강력한 자외선을 마구 뿜어낼 것이었다.

그대로 에어컨이 있는 공동 거실로 가서 소파에서 영어 잡지를 하나 골라서, 앞에 있는 아저씨가 그러하듯이 신발을 신은 발을 커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앉았다.

한 손에는 물과 다른 한 손에는 에너지바를 꺼내 들었다. 슈퍼에 기본 식품들 장을 보러 가야 했지만, 한낮의 강렬한 햇볕을 헤치고 나갈 정도로 절박하진 않았다.

“너, 그게 점심이니?”

갈색 머리의 아저씨가 내 초코바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이거 많은데 하나 줄까?”

이별 선물로 받은 한 박스의 쵸쿄바가 있었다.

“너가 원한다면 줄래?”

‘너가 원한다면은 도대체 무슨 말이지?’

가방에서 주섬주섬 에너지바 두 개를 꺼내 주었다.

“하나는 초콜릿 페이버고 또 하나는 땅콩버터 페이버야. 난 초콜릿 쪽이 더 맛있는 것 같아.”

이 공동 거실의 가장 명당자리를 차지한, 갈색 머리 아저씨에게 초코바 두 개를 뇌물로 투자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는 호스텔의 장기 숙박자인 사진작가인 존이었고, 존 덕분에 프리랜서 소설가인 잭도 알게 되었다. 30대 중반의 우중충한 노숙자 같은 아저씨들이었다. 낭만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보헤미안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피들이었다.

우리는 내 에너지바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잭, 너는 무슨 소설을 쓰는 거냐?”

“응, 주로 스릴러인데, [골드 코스트 해변에서의 살인] 이런 걸 쓰지.”

이러면서 엄지로 목을 휘익 긋는 시늉을 했다.

“경험에 기반한 거야?”

어학연수 한 달 만에 나는 서양식 유머를 구사하는데 꽤 익숙해져 있었다.

“하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기분 좋은 듯 장단을 맞춰 주었다.

“와, 대단한데.”

대화하면서도, 손은 빠르게 타이핑을 해대는 잭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부모님 따라 왔니?”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나는 ‘나’를 따라 왔어.”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즉답했다.

많은 호주인이 나를 십 대 취급을 했었다. 성숙해 보이는 서양의 십 대에 비해서, 막강 동안의 외모를 지닌 아시아인의 숙명이겠거니 했다.

“학생이야?”

“응, 대학생.”

장기 투숙객과 친해진 덕분에, 호스텔에 있는 모든 종류의 빈둥거리는 인간 군상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체스도 하고, 포켓볼도 하고 그래도 심심하면 잡지에서 수도꾸와 낱말 퍼즐을 찾아서 하며 시간을 보냈다. 스티브는 서핑하러 가거나, 조깅을 하거나, 리셉션을 볼 때를 제외하고는 이 에어컨 방의 한쪽 구석에서 제법 두꺼운 책을 읽었다. 얼핏 화학 기호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전공 공부를 하는 듯 보였다.

“하이.”하고 인사를 하면, 그는 빠르게 ‘하이’하면서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책을 펼쳐 들었다. 리셉션에 있을 때의 그 비즈니스 미소도 없었다.

우리 빈둥거리는 루저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외국에 나가면, 하루하루가 돈이라는 비용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아무리 빈둥거리는 체질이라도, 본전 생각으로 부지런해지기 마련이다. 아침에 해변을 따라 핫팬츠와 스파게티 셔츠를 입고 조깅을 하다 보면, 버뮤다 팬츠만 입고 조깅을 하는 스티브를 마주쳤다.

“하이, 스티브. 굳다이.”

하이톤의 경쾌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곤 했다.

“하이.”

건방지고 무심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면서 지나쳤다.

‘흥, 재수. 그래도 멋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