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좋았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간질간질한 손길이 따뜻하고 달콤했다.

흐음,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삼키며 잠에서 깨어나는 찰나에, 점점 머리가 또렷해지며 강렬한 현타가 왔다. 복잡한 마음이 현실성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깔끔하고 아늑한 이 침실 때문인가 보다. 심지어 집주인 녀석은 내 입 주위를 매만지며 싱긋 웃고 있었다.

“나, 미쳤었나 봐? 제정신인 네가 막았어야지. 이게 뭐야? 개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낯선 침대에서 깨어나자마자, 태연한 자태로 옆에 누워있는 규진에게 탄식의 소리를 질렀다.

“난 좋았는데.”

규진은 내 볼과 귓볼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나긋한 목소리로 웃었다.

“응?”

난감함에 되물었다.

“온몸이 뻐근한데. 기분은 최고야.”

눈매를 야시시하게 휘며, 기지개를 켜듯 몸을 죽 펴더니, 잠에서 깨길 기다렸다는 듯 바짝 다가왔다.

뒤로 공간이 얼마나 있는지 슬쩍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야? 너랑 나랑… 아휴. 가까이 오지 마.”

멘붕이 와서 정신이 없는 모습도, 아랑곳없이 그는 맨몸으로 나를 꽉 껴안았다.

단단하고 탄탄한 근육이 감겨 오는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이리와… 어딜 도망가려고. 후 후.”

귀에 대고 장난스레 속살거리는 녀석은 위험했다.

“놔줘. 케엑 켁… 생각 좀 해야 해. 앞에 좀 치워.”

휘말리기 전에 빨리 떼어내야 했다.

“싫어.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가뿐 숨결이 섞인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발 풀어줘. 놔줘. 미쳤어?”

날카롭게 소리를 빼애액 지름과 동시에 규진의 탄탄한 가슴팍을 있는 힘껏 손으로 밀었다. 그제야 그는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풀어 주었다.

아무리 편했던 남사친이라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나서 멀쩡한 얼굴로 장난을 치는 규진의 뻔뻔함이 낯설었다.

허둥지둥 침대 한쪽에 걸터앉아, 베개 위에 있는 브래지어와 티셔츠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팬티와 협탁 위에 있는 바지 등을 수거하여 입었다.

등 뒤로 규진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쑤욱 뻗어온 손이 아쉬운 듯 등과 허리 주변을 또 집요하게 지분거렸다.

‘규진의 손이 이렇게 컸었나?’

하얗고 길고 섬세하다고 느꼈던 그의 손이 허리의 반은 움켜쥘 듯 크고 우악스러워 보였다.

티셔츠부터 청바지까지 서둘러 챙겨 입고, 손마저 밀쳐내고 일어났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크음’ 하고 목을 클리어하고 입을 뗐다.

“너도 옷 좀 입어. 얘기 좀 하자. 응?”

따스하게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신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바짝 침대에 엎드려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에게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싫은데. 난 더 여운을 즐기고 싶은데. 응, 응, 으음.”

심지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내 신음 흉내를 내었다.

‘이게 진짜 돌았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집에 갈 거야. 그래, 이제 무슨 얘길 하겠니? 평생 모른 척 살자. 잘 있어!”

숨도 안 쉬고 할 말들을 냉랭하고 단조로운 어조로 마구 뱉어내고, 휙 돌아섰다.

규진이 침대에서 후다닥 뛰쳐나와서, 돌아서는 나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무슨 소리야. 남자의 동정을 가져갔으면 책임을 져야지?”

지금까지의 장난스럽고 느긋하던 말투와는 달리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의 빠른 태세 전환이 놀라웠다.

능청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빙글거리던 놈이, 금세 단호한 눈초리와 굳게 다문 입으로 바짝 책임을 따져 물었다.

녀석의 눈빛에 겁박이라도 당한 듯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맨몸으로 벌떡 서 있는 규진 쪽으로 훽 돌려지자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랐다.

‘얘는 뭐가 이리 당당한 건데? 매일 짐에 다닌다더니, 몸 부심이 지나치잖아!”

탄탄한 가슴의 근육과 울퉁불퉁한 팔 그리고 얍삽한 허리로 이어지는 다부진 선은 한껏 물이 오른 성숙한 남자의 몸이었다.

이런 몸을 그동안 이성으로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손끝으로 느껴지던 감촉까지 되살아나서 몸이 간질간질해졌다.

“휴우.”

우물쭈물 고개를 숙였다.

“하아.”

더 흠칫 놀라서,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미간을 잔뜩 찌푸린 매서운 눈을 마주 보았다.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일부러 쿡 웃었다.

규진도 그제야 구겨진 얼굴을 펴고, 얄밉도록 잘생긴 얼굴로 씨익 웃었다.

“농담하지 마. 내가 왜 책임을 져? 너도 나 책임 안 져도 되고. 아, 정말 정신없으니까, 옷 좀 입고. 손 놓자. 응?”

다시 은근하고 다정하게 말하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듯 입을 한참 씰룩거리더니, 규진이 체념한 듯 손을 놓았다.

“너, 티셔츠 거꾸로 입었어. 제대로 입고 아침 먹고 가. 샤워하고 데려다줄게”

옷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왜 목 주위가 칼칼하고 불편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래, 거실에서 기다릴 테니까. 샤워하고 나와.”

“너도 샤워 같이할래?”

규진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아휴, 좀!”

‘샤워하러 들어가면 빠져나가자. 내 가방은 거실에 있는 건가? 침실로 들고 왔었나?'

침실을 죽 스캔해 보았다. 침대 양옆의 벽에 붙어 있는 무드 등, 베란다로 향하는 전면 유리를 덮고 있는 두꺼운 밝은 회색의 겉 커튼과 얇게 하늘거리는 속 커튼, 침대 옆 작은 커피 테이블까지, 완벽했다. 완벽하게 고급 호텔 방 같았다.

‘침대는 왜 킹사이즈인데? 혼자 살면서.’

긴 장식용 서가 위에 있는 규진의 가족사진, 친구들의 사진 그리고 몇 권의 책이, 이곳이 공용 공간이 아니라 규진이의 사적인 공간임을 보여 주었다.

후유, 어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근래 우울함으로 가득 찼던 공간이었지만, 그곳이 엉망진창으로 얽힌 내 뇌의 회로를 풀어 줄 것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밖에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오더라도 술을 마시는 건 정말 아니었는데….

“너 가면 안 돼. 기다려.”

수건을 들고 욕실로 들어가면서도, 다짐을 받으려 했다.

“그래, 기다릴게. 얼른 샤워나 해. 후유.”

자꾸 정면으로 돌아서는 당당함에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큰 목욕 수건으로 앞을 가리고, 성큼성큼 와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바지 벗어줘.”

“뭐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샤워하러 들어가면, 도망가려고 생각 중이잖아?”

수가 뻔하다는 듯이, 입을 비뚜름히 하고 비소를 날렸다.

가방을 찾으러 분주히 시선을 움직이던 나는, 규진의 내 머릿속이라도 들어갔다 나온 듯한 말에 흠칫했다.

“무슨? 집 예쁘네. 그럼, 샤워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안 데려다줘도 되니까.”

부정도 긍정도 없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싫어. 샤워하고 말끔한 얼굴로 함께 아침 먹고 싶다고.”

말투에 어리광스러운 투정이 묻어났다.

그의 말끔한 얼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엉망일 내 얼굴이 떠올랐다.

립스틱도 다 번져 지워졌을 거고, 울어서 얼굴도 퉁퉁 부은….

화들짝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얼굴 엉망이지?”

“응. 그러니까 샤워 같이해.”

또 뻔뻔스럽고 은근하게 요구했다.

체념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난 거실에 있는 화장실에서 세수 좀 할게. 샤워하고 나와.”

요즈음 규진과 얽히면서 삶이 코미디가 되어 갔다.

그러다 지금 막장 드라마로 막 장르 전환을 했다.

****

어제는 불금이었고, 그래, 불금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남친과 아니다 무려 약혼자와, 헤어진 마당에.

회사를 마치고 집에 일찌감치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엄마 아빠와 TV를 보며 깔깔거리다가,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눈물이 차올라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눈치 빠른 진수 놈이 집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흐르는 눈물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둘 거야.’

아 이런, 절절한 비극의 주인공이 따로 없네.

그때 띠리리 규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뭐하냐?]

규진의 메시지나 전화는 언제나 이 말로 시작했다.

“응, 집에 있어.”

[뭐하면서?]

“그냥 있어.”

[나와라.]

“나갈 기분 아냐. 집에서 쉴래.”

[그러니까 나와 봐.]

“그냥 내버려 둬라. 잘 거야.”

[잠은? 아직 8시도 안 됐는데. 나와! 치맥 사줄게.]

“…….”

[…….]

“네가 불렀으니까, 네가 사는 거야?”

[그래. 언제 네가 산 적이 있다고 그러냐?]

“뭐래? 요즘 잘 나간다고, 예전 기억을 못 하네.”

[먹고 싶은 거 다 사줄 테니, 나와.]

“알았엉. 20분 내로 집 앞으로 모시러 와라.”

퇴근하자마자 샤워하고는 대충 말리고 빗지도 않았던 머리를, 성긴 빗으로 빗어서 머리끈으로 질끈 동여매었다. 손 세수 후에 로션과 립스틱을 바르고, 손에 잡히는 긴 박스 티셔츠에 가장 좋아하는 스키니진을 꿰어 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규진도 집에 있다 나왔는지, 편안한 일상복이었다.

조수석 옆에 긴 기럭지를 기대고 있던, 그는 차 문을 열고 정중하게 몸을 기울였다.

“타시지요?”

“흠, 자네, 수고가 많네.”

잠시 잘생긴 운전사와 사모님의 역할극에 심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