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어두운 실내는 아릿한 열기로 넘실대고 있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아니 그 전에 공부를 핑계로 2년여를 더 칩거 했었으니 거의 4년만 이었다. 가끔 지나가듯 스쳐가며 얼굴들을 보긴 했지만 오늘처럼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앉아있을 수 있는 자리는 지운으로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정말 대단하다. 정지운. 내 술 한잔 받아라.”'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정호의 술을 받으며 지운은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다. 시험 준비를 하고 연수를 받는 동안 술을 멀리 했었다. 그 사이 술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지운아 넌 아직 못 들었지? 민규 녀석 좋아하는 사람 생겼단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냐? 난 궁금해서 미치겠다.”'“내가 세상을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언제나 여자와는 담 쌓고 지낼 녀석 같더니.”'마음은 주지 않았지만 가벼운 만남들을 유지했던 자신과는 달리 여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민규였다. 아니 관심이 없다 기 보다는 마음이 움직여야 몸이 움직인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던 친구였다. 공부와 연수로 소원히 지냈던 지난 시간들이 그에게 많은 변화를 오게 한 것 같았다. 친구들의 궁금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그레 웃으며 술잔만 돌리던 민규가 한마디 했다.'“아직 네 녀석들에게 소개할 단계는 아니야. 몇 달 전에 소개받았는데 아직은 그냥 친구처럼 보자고 한 상태라서.”'여기저기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몇 달이나 됐다고? 오래 됐네. 그러지 말고 오늘 여기서 다들 인사 시키자. 지운이 너도 곧 약혼 한다며? 유경씨도 부르고. 다들 여자 친구들 불러.”'어디선가 한 녀석이 제안을 했다. 누구의 여자 친구가 먼저 오는지 내기를 하자는 녀석도 있었고 벌써 핸드폰을 꺼내 드는 녀석도 있었다. 친구 녀석들의 너스레 같은 소란 속에서 민규의 한마디가 지운의 귓가에 꽂혔다. '“굳이 약혼을 해야 하니?”'웃으며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던 지운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사랑이란 감정을 굳게 믿고 있는 민규는 지운의 약혼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혼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가정을 만들어 꾸려가도 소소한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법이었다. 지운이 사랑보다는 편안함으로 결혼을 결정했다는 것이 불안했다. 저렇게 쉬운 마음으로 결혼했다가 운명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그때는 가정을 깰 수 없을 것이고 사랑을 떠나보낼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버릴 수 있었다.'“민규야 사랑이 뭘까? 섹스? 그리움?”'지운이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 정색을 하며 민규를 보았다. 그가 읽었던 책들 중에 예전의 철학자들이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여러 종류를 정의 내려놓았었다. 에로스, 아가페, 플라토닉 같이 흔하게 듣는 정의 말고도 루드스, 스토르지, 프레그마, 마니아등등 처음 들어보는 것들도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사랑들이 주위에 넘쳐흘렀지만 지운은 그런 학술적 정의 또는 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는 육체적 끌림들, 그 모든 사랑의 종류를 경험해 보지 못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친구들 간의 우정 이외의 감정은 모두 감성적인 여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