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거 시작

지영은 지금 정신이 없다. 돈이 많다는 사람들만 모이는 파티에 왔기 때문에, 정치계고, 기업관계자고, 후계자고 다 엮인 곳이다. 지금까지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아빠의 사업이 잘되는 바람에 순식간에 졸부가 되어버렸다. 애매한 위치. 원래부터 가진 사람들은 내려다보고 그게 아닌 사람들은 부럽다고 우러러보지만, 속으로는 시기 질투가 가득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이 자리.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맛있는 음식들을 먹지도 못하고 와인 한잔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다. 결국 파티장 안을 나와 밖을 서성거린다. 그때 귓가에 음성이 꽂힌다.

“이번에 온 졸부 봤어? 수준이 안 맞아서 진짜. 겨우 쇼핑몰 하나 잘된다고 이런 자리에 오고. 격 떨어져.”

지영의 얘기였다. 귀가 쫑긋거린다.

“좀 빈티 나 보이더라. 역시 원래 가진 게 없다가 올라와서 그런가?”

“원래 그런 사람들이 좀 그렇지.”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이 없다고 할까. 반대로 하얀이는 정말 예쁘더라. 공주님 같아.”

여자들은 둥그렇게 모여들어서는 험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내 욕이잖아? 지영은 눈을 가늘게 뜨곤 여자들 앞으로 조용히 걸어간다.

“입이 싸구려인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지영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본 여자들은 당황하며 얼굴을 돌렸다. 하지만 그중에 한 명만은 당당하게 지영을 노려본다. 그 눈빛은 마치 한낱 벌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뭐야!? 이딴 게 어디서…….”

“교양도 없고 개념도 없고 생각도 없고.”

뭐? 여자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설마 잘못 들은 걸까 싶었다.

“너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럼 내 앞에 그쪽밖에 없는데 누구한테 말하겠어요?”

비아냥거리는 지영의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여자는 지영의 드레스 방향으로 와인이 가득 들어 있는 잔을 집어던진다.

“허억……!”

“민우야!!”

하지만 조준을 잘못했는지 한 남자의 블랙 슈트로 와인이 뚝뚝 떨어졌다. 와인 잔을 집어 던진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남자의 곁으로 다가간다. 그는 돈 있는 사람 중에서도 유명한 남우 기업의 후계자 강민우였다.

“민우야. 괜찮아? 미안해. 너한테 하려는 게 아니라 저 여자애가 너무 주제를 모르고…….”

“시끄러워. 비켜.”

옆에서 쫑알거리는 여자가 귀찮기만 하다. 어제까지 서류정리를 잔뜩 하다 와서 그런지 민우의 눈은 피로하기만 했다. 형식적인 파티도 솔직히 말하자면 달갑지가 않았다. 곁에 다가온 사람들이야 많았다. 가벼운 근황, 업무 얘기. 미래얘기. 투자금 얘기. 파티에 오기 전에도 일 처리에 잔뜩 쌓여있었고 파티에 와서도 일 얘기밖에 할 수가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밖을 나온 잠깐 사이 슈트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들러붙었다. 여자들이 혜동 쇼핑몰 딸을 욕하는 소리는 다 들려왔다. 하지만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흥미가 가기 시작했던 건 지영이 여자들에게 다가가 쏘아붙였을 때다. 그는 다람쥐를 닮은 외형과 조그마한 체구로 당차게 여자들에게 말하는 지영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민우의 비키라는 말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여자들이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그의 주변을 가르며 사라졌다. 남아 있는 여자는 지영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달려와 민우의 정장 상태를 살피며 인상을 찌푸린다. 왜 사람 얼굴을 보고 인상을 써? 민우도 덩달아 미간을 좁힌다.

“저기요.”

“…….”

“저 때문에 그렇게 되신 거죠? 정말 죄송해요.”

지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상관없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게다가 언뜻 봐도 민우의 옷은 고가였다. 지영은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벗으세요.”

“뭐……?”

그 말에 당황한 민우는 그대로 돌덩이처럼 굳었다.

“제가 책임질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작은 입으로 쫑알거리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처음 보는 여자가 달려와서는 벗으란다. 왜? 내 몸을 노리는 건가. 아니면 혹시 얼굴만 멀쩡하고 정신이 나간 여자인가. 게다가 책임까지 지겠단다. 뭘? 머릿속은 점점 혼란으로 가득 찬다.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그게 아니라면, 세탁비 따로 청구해주세요!”

혼란을 깨주는 지영의 음성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됐습니다. 버리면 됩니다.”

민우는 더러워진 정장 재킷을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휙 던져버린다. 쓰레기통에 순식간에 고가의 정장이 처박혔다. 겨우 옷에 와인 하나를 엎었을 뿐인데 버려진 정장을 지영이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민우는 뒤를 돌고는 아쉬움 없이 가버린다. 그녀는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덩그러니 서있었다. - 그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누나. 빨리 와.”

그때 도혁이 가만히 서 있는 지영을 크게 불렀고 그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강민우. 뉴스로만 많이 접했던 인물. 실제로 본 그는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돋보였다 피곤해 보이는 느낌조차도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흑발의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커다란 키는 연예인 같기만 했다.

잘생긴 것들은 얼굴값을 한다고 했던가. 성격이 부드러워 보이진 않았다. 사실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

3년 뒤, 지영의 집안은 쫄딱 망해버렸다. 집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빨간딱지가 그 사실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지영의 집안에서 운영하던 온라인 쇼핑몰은 갑자기 이상한 소문이 떠돌아 순식간에 더 큰 대형쇼핑몰에 잡아먹혔고 점점 무너져 내렸다.

“휴우우우.”

사람 일은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 날개 돋친 듯했다가 금방 추락해버리다니. 씁쓸하다. 커다란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겨갔을 때 부모님의 허탈함과 무거운 표정을 고스란히 보아야 했던 지영은 독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그와 동시에 회사가 다시 잘되길 바라고, 우리 가족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목표들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일을 해야 했다. 작은 원룸에서 달칵, 달칵 지영은 노트북을 켜고는 마우스를 굴린다.

“취업이 쉽지가 않네.”

이력서를 내는 족족 떨어지기 바빴다. 면접을 보러 가도 내정자 있는 곳들도 있어 허무함을 느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빨리 돈을 벌어야 하는데. 통장잔고에 있던 돈들이 사라지다 못해 증발 수준이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지. 앞이 막막하여 한참 고민에 빠져 있을 때쯤.

지이잉-지이이이이잉-

휴대폰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려댄다. 수신자를 확인하자 오랜 친구 나리였다.

-얌. 뭐해?

언제나처럼 밝은 목소리. 벌써 사회로 나가 유치원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힘들긴 했지만 뿌듯하다고 했다. 지영은 나리랑 같이 있으면 괜히 자기가 초라해 보여 이리저리 연락을 피하곤 했지만 나리는 언제나처럼 지영의 곁에서 떠나지는 않았다. 잘될 때도 못 될 때에도 언제나처럼 있어주었다.

“그냥, 일자리 구하고 있지.”

-술 마실래?

“안 돼. 돈 없어.”

저번 달에 못 낸 월세에 이어 이번 달도 못 내 월세까지 밀렸다. 찢어진 지갑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만 들어있을 뿐이다.

-사줄게. 한 번만 나와라. 응?

나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술집에 도착하긴 했는데 사람들로 북적이고 불빛이 반짝거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등 뒤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지고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나리가 보인다.

“이게 얼마 만이야. 얼굴 좀 보여줘야지. 진짜 오랜만에 본다. 우리.”

나리는 신나서 재잘 재잘 떠들며 팔짱을 끼고는 지영을 자리로 안내한다. 자리에는 꽃을 담은 칵테일이 들어있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잘 지냈어?”

“요새 정신없지 뭐. 애들도 말도 안 듣고.”

나리가 투정하지만, 그것마저 부럽게 느껴져 칵테일을 한 모금 삼켰다. 미래는 언제나 불안했고 초점이 없다.

[지이잉- 지이이잉-]

울리는 휴대폰에 수신자의 번호를 확인해 보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번호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 이지영 씨 되시죠? 다름이 아니라 남우 기업 합격하셔서 연락 드렸어요. 월요일부터 출근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지영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면접까지 갔지만,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는데 운 좋게도 합격이란 단어가 들려오자 여기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뚝- 전화를 끊고 나자 몇 년 전에 봤던 민우생각이 났지만,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회사가 엄청나게 넓었으니 딱히 그 사람이랑은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다.

“뭐야? 무슨 전화길래 그렇게 기쁘게 받아?”

“나 취업했어!!”

“정말!? 축하해. 장하다! 내 친구!!”

나리와 지영은 얼싸안고 기쁨의 시간을 만끽했다. 요란스러운 두 사람의 행동에 사람들이 힐끔힐끔 두 사람을 쳐다본다.

*

출근 첫날. 지영의 등 뒤로 땀이 주룩 흘렀다.

“제가 지영 씨 사수입니다.”

지영이 소속된 곳은 마케팅팀. 이곳에 왜 이사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이 사람이 왜 사수란 말인가. 눈알이 핑글핑글 돌아간다. 그때 만났던 남자였다.

“일 처리는 똑바로 해주세요. 두 번 일하는 건 싫어해서요.”

실수했다가는 머리털이 다 뽑힐 것 같다. 끄덕끄덕끄덕.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 사람은 변한 게 없구나. 커다란 키도. 얼굴도. 말투도. 가지고 있는 위치도. 이 사람은 내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사람들을 많이 상대할 텐데 기억이나 하겠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겠지.

“그리고.”

“…….”

“이번에는 제 옷에 실수하지 말길 바랍니다.”

지영의 그렇지 않아도 큰 동공이 더 커졌다. 3년 전에 딱 한 번 몇 분 마주친 게 다인데 기억하고 있었다.

“네네. 조심할게요.”

“그래요. 이 서류들 좀 복사하고 기본 업무부터 익혀요. 파일 줄 테니.”

건조한 음성으로 민우는 서류 더미를 지영에게 내밀었다. 작은 지영의 얼굴이 서류에 가려진다. 곧 민우의 미간이 좁아진다. 지영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저렇게 작아서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나. 바람이 불면 후 날아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손은 또 왜 저렇게 작아. 손도, 얼굴도 자신보다 월등히 작았다. 게다가 몸 선도 여리여리한 게 어쩐지 지켜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잠시 들었다.

“줘요.”

결국 민우는 자기가 다시 서류를 들며 곧 자신이 쓸데없는 생각을 했음을 알고 표정이 굳어진다.

“감, 감사합니다.”

지영은 무서운 표정으로 검은 오로라를 뿜어내는 민우 옆에서 잔뜩 긴장했다. 왜 저렇게 저기압이시지?

타닥-타닥-

대기업이라 그런지 몰라도 첫날부터 야근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한 가득하였다. 하품이 계속 나왔지만 지영은 눈을 비벼가며 열심히 일 한다.

“지영 씨. 이만 퇴근해.”

“아, 저 이것만 좀 더 하고요.”

사람들은 하나, 둘 나가고 마케팅부 안에서는 지영만이 자리를 지킨 채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