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물 같은 짙은 어둠이 방안 가득 채울 때 쯤, 월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어둠 속에 남겨 진 건 그의 짙은 체취. 아직도 그녀의 몸 구석구석 상흔처럼 남겨진 그의 체취가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 그녀의 깊은 한숨이 잔잔했던 공기를 흩어트리고, 창문 틈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달빛만이 겨우 그녀의 슬픈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월은 다시 한 번 숨을 다잡으며 손을 올려 베개 밑으로 집어넣었다. 차가운 금속이'손끝으로 전해지자 온몸을 타고 자릿함이 느껴진다. 월은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키고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그의 평온한 모습에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환의 그림자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 ‘운명이란 놈을 원망하십시오. 당신과 나를 이리 만나게 한 운명이란 놈을.’' 그녀는 다시 긴 호흡을 가다듬었다. 칼을 다잡은 손가락 이 핏기가 없을 정도로 극한 긴장감으로 그의 심장으로 향할 칼날을 세웠다. 달빛에 빛나는 칼날이 허공을 가로질러 그 심장을 향했지만, 끝내 칼끝은 심장에 닿지 못한 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 ‘제발 나에게 용기를 다오. 흔들리지 마라. 월.’ ' 월은 그의 심장 위에서 흔들리는 칼날을 곧추세워 보지만, 끝내 갈피를 잡지 못 하는 칼을 아니, 자신의 마음을 거두어 내었다. 눈물 한 방울이 그의 옷깃을 적시자, 월은 머금고 있던 숨을 토해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 ‘은애하였구나. 그를 은애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진실 앞에 어찌 그를 은애하는 이로 남겨 둘 수 있을까. 내 운명은 그리 되지 못할 운명이거늘.’ ' 월은 그의 심장에 향했던 칼을 조용히 거두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문득 창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달빛을 보라보았다. ' 곧 여명이 세상을 밝힐 것이다. 새로운 세상, 그 세상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 될 것이다. ' 월은 조용히 침상에서 내려 와, 마치 천금이나 되는 듯 무거운 걸음을 한 발짝 내 딛고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한 소리에도 민첩하게 몸을 날리던 이가 저토록 평온한 것은, 이젠 완전한 자신의 여인이라 믿고 있을 것이다. ' 월은 희미한 미소를 선홍빛 입술에 올리고 그에게 마지막 예를 취했다. 이토록 가슴이 아리고 먹먹한 것은 진정 그를 은애했으리라.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가에 가득고인 눈물이 얼굴위로 흩어졌다. 월은 주먹을 꽉 틀어쥐고는 몸을 돌려 조용히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