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참을 수 없는 본능, 멈출 수 없는 마음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혹여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정말입니다. 그저 멋대로 잡은 것뿐이고, 저도 놀라 대처가 늦은 것뿐이에요. 다음부턴 절대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정말로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묻는 현을 향해 희온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결백을 증명하듯 고개까지 도리질 치며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모습에, 현이 참기 힘든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운 숨을 내뱉었다.

“정말 미치겠네… 하….”

천천히 웃음기를 가라앉힌 현이 커다란 손으로 두 눈을 살짝 덮으며 작게 읊조렸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 모든 게 자극적인데 어찌 참아내라는 건지.

어젯밤부터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본능은 빠른 속도로 이성을 앞지르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 희온을 스치기라도 할 때면 온몸의 감각이 무섭게 깨어나고 있었으니까.

“온아.”

“예. 폐하.”

닫혀 있던 현의 입술 새로 낮은 목소리가 흐르자, 희온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을 천천히 내린 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젖힌 채 지그시 희온을 쳐다봤다.

순식간에 파고들어 짙게 내리꽂힌 눈빛은 그녀를 단숨에 사로잡아 버렸다. 희온이 묘한 감정을 느꼈는지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말로는 안 될 것 같은데.”

“예…?”

“생각보다 꽤 질투가 나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심장이 속절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알아듣지도 못했던 저 야릇한 말들이 이젠 열기 띤 뺨으로 고스란히 반응하고 있으니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이리 와, 온아.”

앞에 놓인 단상을 옆으로 치워 버린 현이 희온을 향해 커다란 손을 내뻗었다.

“아….”

듣고 또 들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듣고 싶어지는 다정한 목소리.

희온이 주먹을 꼭 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현의 눈을 마주했다.

곧게 뻗친 검은 눈썹.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하고 있는 따뜻하고 깊은 두 눈. 이 사내를 어찌 밀어내나…. 이젠 마음에 전부 박혀 버렸는데.

희온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곤 미세하게 떨리는 가느다란 손을 천천히 내뻗었다.

손끝의 감각이 서로 맞닿자, 현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곤 제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품 안 가득 희온을 담은 현이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조용히 말했다. 짜릿한 전율과 함께 온기가 곳곳에 퍼지자, 희온이 몸을 움찔거리며 그의 목덜미를 꼭 껴안았다.

“온아.”

“예. 폐하….”

애틋하게 마주친 시선에 희온의 커다란 눈동자가 짙은 빛을 내며 요동쳤다. 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목덜미를 감싸 안고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코끝이 스칠 듯한 거리에 희온의 두 눈이 수줍은 듯 빠르게 감겼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자 현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곱게 넘겨 주곤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은 어느새 틈새를 놓치지 않고 거칠게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폐하…!”

따뜻하고 포근한, 마음을 쉼 없이 동하게 하는 특유의 향.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내 기억에 박혔던 그 향이 깊은 곳까지 들어와 마구 헤집어댔다.

희온이 가쁜 숨을 할딱이며 현의 가슴께를 꼭 움켜잡았다.

조금의 틈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현은 쉼 없이 그녀의 곳곳을 부드럽게 탐했다.

“하… 참기 싫어지는데.”

거친 숨을 야릇하게 내쉬며 희온의 목덜미를 살짝 자극한 현이 희온의 반응을 느끼며 말했다. 희온은 흐트러진 얼굴로 현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그의 뺨을 감싸곤 새까만 눈을 짙게 빛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감정, 참을 수 없는 본능, 그리고… 멈출 수 없는 마음.

끊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막아 보려 애써 외면해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이 마음을 이렇게라도 전할 수만 있다면….

“폐하.”

서글픈 목소리로 현을 부른 희온이 옅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러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참지 않으셔도 돼요.”

***

며칠 후, 평복으로 변장한 희온은 정신없이 달려 순임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태헌의 잔당 세력이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절대 안 된다던 현을 설득시켜 가까스로 얻어낸 시간이었다.

그녀는 소매 깊은 곳에 수없이 만지작거려 모퉁이가 해진 서신을 품고 열심히 달렸다.

“순임 할매! 저 왔어요! 언니! 오라버니!”

우렁차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순임은 물론, 문복과 홍 역시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이 낸 목소리가 맞냐…? 저거 온이 녀석 맞어…?”

한 손으로 문 귀퉁이를 짚고 선 채,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희온을 보고 순임이 재미있는 걸 발견한 듯 말했다.

홍과 문복은 천천히 눈을 마주치곤 풉 하고 웃으며 희온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헉… 헉…. 늦게 와서 죄송해요. 저도 어제 오고 싶었는데… 출궁 허락을 안 해줘서….”

“원 녀석, 조금만 있으면 실컷 볼 텐데 뭘 그리 급해서.”

“맞아. 궁에서 더 정신없을 텐데 맘 쓰지 않아도 돼, 온아.”

홍이 희온의 등을 토닥거리며 웃었다. 희온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살짝 눌러 닦아내곤 마주 웃었다.

“그럼 교류회 첫날, 세 분 다 입궁하시는 거예요?”

“응. 그럴 생각이야. 홍이랑 나야 뭐 어머니 옆에서 보좌하는 거지만.”

“진짜 잘됐어요. 처음엔 무슨 소린지 잘 몰라서 당황했는데… 생각해 보니 상단에 좋은 기회잖아요. 더 크게 알릴 기회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온이 네 덕이지, 뭐. 고맙다.”

문복이 희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정히 웃자, 희온이 무슨 그런 소릴 하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순임 할매. 혹시 모르니… 더 조심하셔야 해요. 아셨죠? 괜히 저 때문에 이태헌이 이곳까지 건드리면 어쩌나 싶어서….”

“아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무조건 너만 생각해. 이태헌 그놈은 내 눈에 띄면 바로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생각이니까.”

“그래도… 죄송해요.”

“떽!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거든 내쫓을 줄 알아라, 알았냐? 안으로 들어가자. 안 그래도 네가 올 것 같아서 이것저것 사다 뒀다. 하려던 이야기도 있고.”

순임이 희온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앞장서 들어갔다. 희온은 무슨 말인가 싶어 멀뚱거리다 이내 잰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

“정말이에요…? 정말… 아버지가….”

“그래. 네가 안 내려오면 내가 궁에 찾아가서라도 전해 주려 했다. 이리 좋아할 줄 알았으니까.”

희온은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린 채 덜덜 떨었다. 어느새 한가득 고인 눈물은 넘칠 듯 일렁이다 계속해서 차오르는 눈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며칠만 기다리면 뵐 수 있다니. 기약 없이 그리워만 했었는데… 드디어, 드디어 얼굴을 뵐 수 있다니.

벅차오르는 감정에 희온이 상체를 자연스레 앞으로 숙였다.

움켜쥔 가슴팍을 꼭 짓누르며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모습은 그간 얼마나 이찬을 그리워했었는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당연히 해천 상단이 선출될 줄은 알았지만, 만약의 경우도 있는 법이니 일부러 말 안 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더 무너지는 법이잖냐.”

순임이 희온의 등을 따뜻하게 쓸어 주며 조곤조곤 말했다. 희온은 꽉 막힌 코를 훌쩍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 서신은 네가 직접 전해 주거라. 그 녀석을 만나면.”

“네. 제가 전해 드릴게요… 꼭.”

순임에게 건넸던 서신이 다시 희온의 품으로 돌아왔다. 희온은 잡아 든 서신을 꼭 쥐곤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런데… 궁에 들어오시는 건 위험하지 않으실까요? 아무리 이태헌이 없다 해도 아직 호월 부대원들이….”

“아마 제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하나… 이번만큼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무언가를 하려 하는 것 같더구나.”

“네…?”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그저 느낌이다, 느낌.”

순간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경직되는 희온을 보고 순임이 부러 장난스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희온은 묘하게 올라오는 불안한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아무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안전하다 느껴질 때가 가장 허를 찔리기 좋을 위험한 때니까.”

“…네. 명심할게요.”

순임이 희온의 손을 꼭 잡으며 당부하듯 말하자, 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반짝였다.

분명, 지금은 방심하기 좋은 때였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 사람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고 순간적으로 안심하며 무뎌지기 쉬울 때였으니까.

반드시 지켜낼 거야.

희온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각오를 다짐하듯 큰 숨을 들이마셨다.

***

동국.

“유화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진즉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늦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폐하. 말씀 편히 하십시오. 이리 대우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신이 고개를 꾸벅이며 이찬을 향해 인사하자, 이찬이 화들짝 놀라며 예를 갖췄다. 유화는 소화와 함께 옆쪽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머니와 제 은인이세요. 생명의 은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요.”

“아닙니다. 공주님. 제가 여태 몰라뵈어 송구스럽습니다….”

“우으… 으! 으으…!”

“어머니께서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시래요. 너무 감사하다고요.”

“아닙니다. 태후마마. 그저 황송하고 송구스럽습니다.”

소화는 괜찮다 말하려는 듯 간헐적으로 소리를 내며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제야 이찬에게 제대로 보답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은지 연신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원하실 때 편히 입궁하십시오. 어머니와 유화가 많이 뵙고 싶어 할 테니. 특히 저 녀석이 난리겠지만요.”

“황송하옵니다, 폐하. 태후마마, 공주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저씨가 계신 해천 상단을 대표로 선출하지 않으면 가만 안 있겠다고 폐하께 어깃장을 놨어요! 잘했죠? 월국에 따님이 계신다고 하셨잖아요. 이번 기회에 가셔서 찾아보세요. 저희가 도울 게 있다면 전부 도울게요!”

유화가 이찬에게 바짝 다가와 손을 꼭 잡으며 생긋 웃어 보였다. 이찬은 희온의 모습이 스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