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피바람이 불던 날

“모조리 죽여 버리세요. 전부.”

“태, 태후마마…!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곳엔 아주 어린아이들도….”

눈치 없이 끼어든 목소리는, 차갑게 굳어 버린 가여의 표정에 짓눌려 점차 힘을 잃고 기어들어 갔다.

호월 대장 이태헌 역시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곁눈질로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소, 송구합니다….”

자신을 향한 매서운 기운에 남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반역(反逆)의 씨를 살려 둔다면, 그 역시 반역(反逆)임을 명심하세요.”

“예! 태후마마!”

냉랭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하는 가여의 모습에, 호월 대장 이태헌과 정예 대원들은 목청을 높여 우렁차게 대답했다.

가여는 이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싱긋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모든 것들을 완벽히 끝내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호월 대장.”

“예. 염려치 마십시오.”

이태헌이 고개를 숙이며 단단한 음성을 뱉어내자, 가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쓸고 뒤돌아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가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이태헌은 주먹을 꽉 쥔 채 비장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는 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밤, 척월촌(剔月村)을 완전 소탕하고 반역의 씨를 모조리 제거한다.”

***

“우리 폐하께서 무슨 고민이 있으신지요? 어찌 나와 계십니까?”

“아…! 어마마마 오셨습니까.”

반짝이는 두 눈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현은 갑자기 들려온 가여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급히 예를 갖췄다.

“오늘 밤은 별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요?”

“예….”

자신에게 바짝 다가와 손을 잡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가여를 보던 현은 고개를 숙이며 작게 대답했다.

벌써 잡힌 손을 빼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황상.”

“예. 어마마마.”

“반드시, 이 어미를 잘 따르는 황제로 자라 주어야 합니다.”

현은 가여의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슬쩍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저 말만 몇 번째인지. 이미 수천 번은 들은 것 같았다.

잡힌 손에 슬쩍 힘을 풀며 그저 아래만 응시하고 있자, 가여가 자세를 낮춰 현과 눈높이를 맞추곤 말했다.

“저 하늘에 수없이 많은 별처럼, 이 어미가 수없이 많은 사람을 황상 앞에 무릎 꿇게 할 겁니다.”

순간적으로 섬뜩하게 빛나는 가여의 두 눈에 현의 동공이 살짝 부풀었다. 어쩐지 묘한 살기가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현이 아무 말 않고 멍하니 서 있자, 가여는 홀로 무언가 생각하다 만족스럽다는 듯 소리 내 웃곤 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침전에 들도록 하세요.”

또다시 순식간에 냉한 기운을 머금은 가여의 목소리에 현이 고개를 숙여 조그맣게 대답했다.

가여는 지그시 고개를 끄덕이곤 홱 하고 돌아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휴우….”

제 어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야, 현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난 싫은데….”

조그마한 입술이 벌어지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곤 그 속이 답답한지 끙…,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아, 응!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해진사.”

“바깥에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옥체가 우선이니 오늘은 이만 안으로 드시지요.”

“응. 알겠어…. 그럼 가서 서책이나 더 보다 잘래.”

“예, 알겠습니다. 폐하.”

현의 말에 해진사가 따뜻하게 웃어 보이곤 고개를 숙였다.

현은 애써 웃어 보이며 큰 숨을 내쉬곤, 다시 한번 반짝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정말 많다….”

쏟아질 듯한 별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수놓고 있었다.

***

척월촌(剔月村).

“손에서 놓지 말아라… 꼭 쥐고 있어. 누가 해하려 하거든, 휘두르는 거야. 알았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날 선 무기를 제 아이의 여린 손에 꼭 쥐여 주며 여자는 온 힘을 다해 터질 듯한 눈물을 참았다.

아직 예닐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눈을 끔뻑거리며 일그러지는 제 어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저 아는 듯했다.

이제 영영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서두르세요, 어서요! 지금 아이들을 보내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예, 예…! 다 했어요. 다 했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다급하게 말하는 남자를 향해 여자는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이의 소매 속과 허리춤에 미리 만들어 두었던 주머니를 열어 준비해 둔 것들을 넣고 야무지게 동여맸다.

그 속엔 넉넉지는 못해도 이 세상을 살아갈 조그만 밑천과 아이의 이름 그리고 아이에게 남겨 주고 싶은 한 줄의 글귀가 적힌 낡은 종이가 있었다.

‘만약’ 살게 된다면,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 이것들을 쓰고 읽어 주기를.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주기를.

“자, 이제 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가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여자는 이를 꽉 물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아이의 등을 슬쩍 밀었다.

“엄무이….”

“……!”

아이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어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한없이 터져 나오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던 여자의 속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럴 운명인 줄은 알고 있었다지만 막상 다가오니 어찌 이리도 모든 게 애달프게 짧기만 한 건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주친 고운 아이의 눈망울에 여자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제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아이는 울지 않았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집어삼키고 끅끅대며 참아내고 있었다.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 사는 거다. 어미랑 약조한 거야.”

“응…!”

아이는 손에 들려 있는 뾰족한 물건을 꽉 움켜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등을 돌려 뛰어나갔고, 이내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 조여 왔지만, 여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어쩌면 오늘이 정말 마지막인 듯했다.

***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가 당도했습니다.”

“호월의 규모가 언제 이리 커졌단 말인가….”

모든 날의 밤을 지켜 줄 것이란 믿음으로 이 나라 월국(月國)에선 황제를 달(月)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달(月)을 최측근에서 지키는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호월(護月)이었다.

하나, 호월은 그 수의 제한이 있었던 법이거늘….

아마도 무자비한 피바람을 일으키고 자신의 어린 아들을 허수아비 황제로 앉힌 가여는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바꿔 버리고 있는 듯했다.

“휘, 호월 군은 어디까지 진입했지?”

“척월촌의 들머리를 뚫고 들어왔습니다. 현재 무공께서 선봉을 지키며 고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버티는 것밖엔 할 수 없습니다. 대장,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현재 상황에 척월의 대장인 염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예상했던 싸움이었기에 일말의 망설임은 없었으나,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힘에 어쩔 수 없이 좌절감이 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피 장소로 모두 이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사히 월국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겁니다, 대장.”

척월의 부대장인 휘와 이찬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목소리로 염에게 말했다.

염은 지그시 고개를 끄덕인 후, 큰 숨을 들이마시고 주먹을 꽉 쥐었다.

“찬아.”

“예. 대장.”

“대피 장소로 가서 아이들의 도주로를 확보해라. 반드시 해야 한다.”

“예…!”

“그리고 휘야.”

“예. 말씀하십시오.”

“넌 나와 함께 무공에게 간다. 모든 전력을 동원해 들머리부터 시간을 벌 것이다.”

“예.”

염은 이미 버릇이 된 한숨을 다시 한번 내쉬고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는 이찬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염의 뒤를 따라나섰다.

홀로 남은 이찬은 어쩐지 저도 모르게 드는 서운한 마음에 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애꿎은 자신의 검을 꾹 움켜쥐었다.

늘 염은 휘를 먼저 찾았지만, 어쩌면 정말 ‘끝’일지도 모를 마지막 순간인 지금만큼은 자신도 염의 곁에서 함께 싸우다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 스친 탓이었다.

“찬아.”

“예…! 대장.”

갑작스레 돌아와 자신을 부르는 염의 목소리에 이찬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갖추고 대답했다.

염은 그대로 이찬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이찬의 두 눈이 빠르게 팽창했다.

믿는다는 저 말 하나가 이렇게나 소중하고 귀하다니.

그는 뜨겁게 차올라 목구멍을 막아 버리는 무언가가 밖으로 새어 나오기 전에 황급히 허리를 숙여 버렸다. 차마 소리를 낼 수 없기에 대신하는 대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염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꼭 살려다오. 부탁한다.”

***

척월촌 들머리.

“무공! 염 대장님과 휘 부대장님께서 이쪽으로 오시고 있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야 한다!”

“예!”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는 척월 군들은 안간힘을 쓰며 호월 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