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동물원의 산신님 2권 (완결)


#9-2

“저는 아기 백호는 처음 봐요. 건강하게 태어난 건가요?”

정신없는 사이에 호랑이 서식지에서는 경사가 생겼다. 지수는 눈앞에 놓여 있는 작은 생명체를 보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하얀 털에 푸른 눈을 가진 아기 백호는 인형 그 자체였다.

“다행히도 엄청 건강해요. 예정일보다 빨리 나와서 걱정했었는데, 체구가 좀 작은 거 빼고는 문제없는 거 같아요.”

“경사네요, 경사야. 동물원에서 백호가 태어나다니. 다 가연 씨가 온 덕분인가 봐요.”

“그게 무슨…… 이건 다 대표님 덕분이죠.”

지수의 칭찬에 얼굴까지 붉히면서 부끄러워하는 가연의 모습에 지수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속리에게 신수를 돌려준 뒤로 가연의 불행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동물원도 문제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에 아버지도 반대를 접고 지석의 뜻대로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참이었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지수는 지석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인상을 구겼다. 그런 지수의 모습에 가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거라도…….”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오빠 놈이 생각나서요.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살아야 하고, 나는 정략적으로 팔려 가게 생겼는데 도와주지도 않는 게 아주 괘씸해서요.”

“그건 오해세요. 차마 말을 못 했다고 많이 괴로워했어요, 지석 씨가.”

“그건 직접 사과를 해야 하는 거니까, 가연 씨가 대신하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오빠가 잘해 줘요?”

“……네.”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몸을 배배 꼬며 대답하는 가연의 모습에 지수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고는 지석이 괴롭히면 자신에게 말하면 혼내 주겠다고 말하면서 백호를 다시 바라봤다. 조그맣고 하얀 털이 신비스럽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심지어 보고 있으면 집으로 데리고 가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비주얼에 지수는 홀려 있었다.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부여잡은 지수는 문 앞에 서 있는 백운과 마주쳤다.

3일 만에 만난 백운은 초췌해 보였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었음에도 밥을 몇 끼나 굶은 것처럼 힘이 없어 보였다. 바쁠 것이라고 미리 말을 해주긴 했었지만, 제대로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였기에 지수는 보자마자 반가움도 잠시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여기 있어요. 사무실에서 기다리지.”

“무사히 태어났는가?”

“그럼요. 엄청 건강하대요, 생각보다 조그맣게 태어나긴 했지만. 혹시 몰라서 당분간 가연 씨가 일대일로 케어할 예정이에요. 그런데 3일 만에 겨우 만난 건데, 첫마디가 백호 걱정이에요?”

“문제없이 무사히 태어난 것이라니 정말 다행일세. 내 꽤나 걱정을 했다네. 그리고 첫마디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인가. 생명이 문제없이 태어난 것이 더 중요한 것이지. 처자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겐가?”

한참 자신의 말만 하고 있던 백운은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지수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듯 말을 멈췄다. 점점 험상궂어지다 못해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버린 지수의 얼굴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백운은 문제가 도통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왜냐는 소리가 나와요! 우리가 며칠 만에 만난 건데. 첫마디가 뭐 중요하냐고? 백운이랑 나는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커플이라구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뭐가 잘못된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아니 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리될 거라 하지 않았나. 그리고 내가 백호를 걱정한 것은 다 처자랑…….”

“필요 없으니까 가버려요!”

지수는 백운의 말을 끊어 버리고는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밖을 향해서 달아나 버렸다. 달려가는 지수의 모습을 쳐다보며, 백운은 어쩔 줄 몰라 동물 치료실 문과 지수가 사라진 방향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 망설이던 백운은 지수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사파리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백운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지수를 발견했다. 무언가를 외우듯 중얼거리면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지수를 찾은 백운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그는 천천히 지수에게로 다가갔고, 인기척을 느낀 지수가 무릎에 묻고 있던 얼굴을 빼꼼 들어 백운을 올려다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어쩐 일은. 처자를 찾아왔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겐가. 다리는 괜찮은가?”

“알게 뭐예요. 상관하지 말아요, 내가 아프든 말든.”

“정말 처자는 말본새를 고칠 필요가 있다고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일어나게, 어서.”

“누가 누구 말투를 지적하는 거예요. 백운은 뭐 예쁜 줄 알아요?”

백운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던 지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자신의 손을 그 위에 포갰다. 백운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살며시 끌어당겨 지수를 일으켰고, 지수는 이내 다리에 밀려오는 저린 느낌에 끙하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비틀거렸다.

“거보게. 이러니 내가 처자만 놔두면 마음이 놓이겠는가.”

“이게 다 백운 때문이잖아요!”

“그래그래. 다 내 탓일세. 그러니 도망치지 말고 뭐가 그리 처자를 서운하게 만들었는지 말해 주면 되지 않겠는가. 말해 주지 않으면, 나는 느린 사람이라 잘 모른다네.”

백운의 이야기에 입을 삐죽거리면서 시선을 피하던 지수는 갑자기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3일 동안 백운이 보고 싶어서 계속 찾아가고 그랬는데…… 나한테 보고 싶었다던가 그런 인사도 없이 호랑이만 무사히 태어났는지 확인했잖아요.”

“내가 미안하네. 나는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네. 그래야만 처자와 함께 오래도록 있을 수 있어서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이유를 모르는 처자는 섭섭했을 거 같네.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 내가 다 설명하겠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생각하지도 못한 백운의 설명에 지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백운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지수의 손을 잡은 채로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말 그대로일세. 산신과 인간이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나도 나 나름대로 처자와 함께 있을 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찾아다녔다네.”

“그래서요?”

“그래서 찾은 것이 백호였다네. 내 전에 동물원에 호랑이 하나가 새끼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나. 마침 녀석이 백호로 태어날 운명이었기에 그 아이를 제자로 들이려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네.”

“그럼 이번에 태어난 백호가…….”

“내 제자가 될 아이일세. 이 동물원의 산신이 될 아이지.”

뿌듯한 표정을 하고 어깨를 펴며 당당히 말하는 백운의 모습에 지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키고 있었다.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만 바라보는 귀여운 모습에 지수는 잔뜩 차 있었던 화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제자를 맞이하는 거랑,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거예요?”

“속리가 조언해 준 방법 중 하나네만, 제자를 온전한 산신으로 만들 때까지 스승 산신은 인간계를 떠날 수 없다네.”

“어차피 산이 있으니까 있고 싶은 만큼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하는 지수의 모습에 백운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잡고 있던 손을 이끌어 근처 벤치에 지수를 앉게 했다.

“속리가 선계로 돌아간 것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사실 나도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네. 물론 그 친우보다는 여유가 더 있었지만.”

백운은 말을 하다 말고 품속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 구슬 안에는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었는데, 위쪽 작은 공간만 제외하면 거의 가득 차 있는 모양새였다.

“그런 말 없었잖아요. 그리고 그 구슬은 뭐예요?”

“용에게는 여의주라고 불리는 것이지. 모든 산신은 이렇게 생긴 보옥을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다네.”

“그래서요?”

“처음 신이 되면 스승에게 받게 되는데, 이 구슬은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차오르게 되어 있네. 모두 행적이 다르니 차오르는 속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보옥 안에 정기가 가득 차게 되면 선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만은 같네.”

“그렇다는 건…….”

백운은 지수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보옥을 품속에 다시 감추었다. 그러고는 지수의 추측에 대답을 해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속리는 산신이 될 때부터 친우 사이였다네. 그러니 돌아가는 시기도 비슷해야 했지. 물론 많은 힘을 사용하기도 했고, 정기도 몇 해 제대로 모으지 못했으니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고작 인간에게는 몇 년뿐일세. 거기다가 처자가 이렇게 멋진 산을 만들어 준 덕분에 정기가 차오르는 속도는 내 예상보다 빠르더군.”

계속되는 백운의 설명에 지수의 얼굴은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해 갔다. 그런 지수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백운은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안심시켰다.

“그리 걱정하지 말게. 내 그래서 수를 내기 위해 바빴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백호를 제자로 삼을 것이니 그가 온전한 산신이 될 때까지는 충분히 시간이 있다네. 보옥 안에 정기가 가득 찬다고 해도 바로 떠나지 않을 구실이 생기는 것이지.”

“아니 그래도 대왕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막 당장 돌아와라.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하, 할아버지라니. 에휴, 물론 그런 것도 생각 안 한 것은 아닐세. 하지만 제자가 있는 산신이 온전히 산을 넘길 수 없음에도 선계로 올라가는 일은 없네.”

“전에 제자가 있는데도 산을 떠난 산신이 있다고 했잖아요. 속리가 백운한테 그래서 그곳에 산신이 되라고…….”

불현듯 떠오른 얼마 전의 기억을 이야기하자 백운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말하기 껄끄러운 것처럼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백운은 결심한 듯 지수의 옆에 앉았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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