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바닷가 근처 펜션에 도착했다. 성빈이 시동을 끄자 펜션 앞마당 벤치에 앉아 있던 여자가 차로 다가왔다.

‘여자네. 여자가 오고 있어.’

하얀은 안전띠를 풀지도 못하고 웃으며 다가오는 여자를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봤다.

“차에 있을래?”

하얀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자 성빈이 물었다.

“제가 차에 있는 게 좋으세요?”

저 여자랑 단둘이 만나고 싶은 거예요? 하얀은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왜인지 간절하게 성빈에게 물었다. 하얀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해 성빈은 놀란 듯 그녀를 조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나야 늘 네가 좋아하는 쪽으로 하고 싶지.”

“저도 갈래요.”

하얀은 안전띠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성빈은 그런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차에서 내렸다. 어느새 차 앞까지 온 여자가 성빈을 보며 말했다.

“신성빈 씨죠?”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봐? 그럼 아무 관계도 아닌 거네? 하얀은 성빈과 여자를 번갈아 보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곧 나올 거예요.”

여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펜션 안에서 젊은 남자가 한 명 나왔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하얀은 짧은 탄식을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과거에 성빈의 가족이었던 남자였다. 사진보다 나이가 조금 들었지만, 하얀은 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남자는 저벅저벅 빠른 걸음으로 차 앞까지 순식간에 걸어왔다. 하얀은 그가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성빈의 팔을 꽉 잡았다. 성빈이 긴장한 하얀의 얼굴을 보고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반갑습니다.”

남자는 웃지 않고 무뚝뚝하게 성빈에게 악수를 청했다. 성빈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하얀은 남북 정상의 악수를 텔레비전에서 볼 때보다 더 가슴이 뛰었다. 지금이라도 남자가 나머지 손으로 성빈에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상상됐다.

“도움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오실 것까지는 없었는데요.”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꼭 한번 보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남자의 까칠한 말에 성빈이 여유 있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남자는 피식 웃더니 성빈의 손을 놓았다.

“커피라도 내올게요.”

여자가 그렇게 말하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성빈에게 잠깐 앉았다 가라고 말하며 아까 여자가 앉아 있던 벤치로 향했다. 성빈이 뒤돌아 뭔가 말하려는 순간 하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오세요. 전 여기 있을게요.”

“그래. 잠깐만 기다려.”

하얀은 둘이 나눌 사적인 대화를 자신이 들을 권리는 없다 생각했다. 성빈이 남자와 벤치에 앉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펜션을 둘러봤다. 넓은 앞마당을 펜션 몇 동이 둘러싼 모양이었다.

“좋네. 바다도 가깝고 풀장도 있고.”

놀러 왔다면 참 좋았겠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얀은 성빈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남자 둘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대화하고 있었다. 곧 여자가 나와 남자 둘에게 커피를 전하고, 하얀에게 다가왔다.

‘어? 나도 주려고 그러나? 안 그래도 되는데.’

엉거주춤 서 있던 하얀은 괜한 긴장감에 몸에 힘을 주고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여자는 웃으며 하얀에게 종이컵을 하나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종이컵을 내려다보니 달콤한 냄새가 코까지 올라왔다. 색을 보니 믹스 커피인 거 같았다.

“믹스 커피 안 좋아하세요?”

커피를 보고만 있자 여자가 물었다.

“네? 아니요. 좋아해요. 뜨거운 걸 잘 못 마셔서요.”

“그래요? 다행이네. 펜션 준비하느라 사람을 못 만났더니 엄청 반가워요.”

붙임성이 좋은 여자가 다시 웃으며 말해 하얀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 문 안 연 거예요?”

“네. 다음 주부터 오픈이에요. 여름은 다 갔지만, 낚시 손님이 있어서 예약률이 괜찮아요.”

“잘됐네요. 번창하길 바랄게요.”

하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여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진성이가 맘 잡고 열심히 살려고 해서 다행이죠.”

여자는 성빈과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름이 이진성이었지. 하얀은 그런 생각을 하며 구두 끝으로 땅에 슥슥 선을 그었다.

“이제 아빠가 됐으니 돈 들어갈 일도 많은 데 도움을 주셔서….”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하얀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란 하얀을 보더니, 여자가 부끄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진성이는 절대 돈 안 받는다고 그랬는데 제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그래서 많이 미안해요.”

“아이는 혼자 만드나요? 미안해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하얀이 흥분해서 말하니 여자가 웃어 보인 뒤, 아련한 눈으로 남편 쪽을 바라봤다.

“그래도 저는 미안해요.”

네. 그럼 그러시던가요. 하얀은 갑작스레 너무 많은 정보량을 접해 머리가 다 아찔했다. 7월에 출소하고 몇 달이나 지났다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생겨? 그때 성현이는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성현이는 이 사실을 알까? 커피를 다 마셨을 때, 성빈과 진성이 벤치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 이제 가자.”

성빈의 말에 하얀은 옆에 있던 여자에게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여자도 말없이 인사했다. 차 문을 닫자마자 하얀이 빠르게 말했다.

“결혼하고 아이도 있대요!”

하얀의 말에 성빈이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렸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동을 걸었다. 차는 천천히 후진해 펜션을 벗어났다.

“출소한 지 석 달 정도 지났는데 빠르긴 하지.”

성빈이 높낮이가 없이 말했다. 하얀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옥 안에 있던 시간은 3년이니 제삼자가 빠르다고 말하기 좀 그렇기도 하고.”

하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제삼자도 못 되는 자신이 옳다느니 그르다니 할 일이 아니었다.

“성현이는 알아요?”

하얀이 성빈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직접 보고 말하고 싶어서. 겨울에 들어오면 말할 생각이야.”

하얀도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성현이 미국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의지할 사람이 적은 타국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화로 듣는 건 그녀에게 분명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하얀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하얀의 눈에 가득 찼다.

“지금 서울로 출발해도 휴게소에서 저녁 먹어야 할 테니 여기서 먹고 갈까?”

여전히 노을을 보며 옆에서 들리는 다정한 목소리에 하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펜션에서 멀리 가지 않고 한 바닷가 옆 식당에 멈췄다.

“아까 여기 맛있다고 추천하더라고.”

시동을 끄며 하는 말에 하얀은 픽 웃었다. 아까 성빈과 진성이 대화하는 분위기가 꽤 심각해 보였는데 근처 맛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게 웃겼다. 뭐, 그거만 이야기한 건 아니겠지만. 하얀은 안전띠를 풀며 다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평소 진지한 성빈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얀의 웃음을 보고 성빈이 무슨 생각하는지 안다는 듯 조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안 물었어. 저녁 먹을 때 됐는데 근처에서 먹고 갈 거면 여기가 좋다고 추천하더라고.”

“원래 여기 사람이래요?”

“부모님 고향이 여기인가 봐. 간장게장 좋아해?”

성빈은 차에서 내려 머리로 간판을 가리키며 하얀에게 물었다. 하얀이 고개를 끄덕이니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유리문을 잡아 주었다. 문에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마친 뒤 하얀이 성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3년을 생각하면 빠르다고 하기 어렵다고 하셨잖아요.”

하얀은 성빈이 불편할까 싶어 감옥이란 단어는 일부러 빼고 말했다. 컵에 물을 따르던 성빈이 고개를 들어 하얀을 봤다.

“그럼 원래 알던 사이래요?”

“글쎄? 언제 어떻게 알게 됐는지까지는 모르겠네.”

성빈이 하얀의 앞에 컵을 놓으며 대답했다. 하얀은 시시콜콜한 거까지 질문하지 않은 점이 성빈답다 생각했다. 하지만 성현은 분명 그런 점까지 알고 싶어 할 텐데. 하얀이 한숨을 한번 짧게 내쉰 뒤 컵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성현이는 알고 싶어 하겠지?”

하얀은 성빈이 초능력자는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아까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걸 맞히고 있었다. 하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성빈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연락이 닿았을 때 결혼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고. 더 이상 물을 필요 없다 생각했지.”

“아마 성현이는 다 맘에 안 들어 할 거예요. 본부장님이 연락한 것도, 돈으로 도움 준 것도.”

“성현이 맘에 들라고 한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지.”

성빈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하얀은 눈을 크게 떴다. 이 모든 일이 성현을 위해서 한 게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위해서?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였거든.”

“저요?”

하얀의 눈이 더 커졌다. 자신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성빈이 힘들게 말을 꺼내려 하는 순간 음식이 나왔다.

“간장게장 정식 나왔습니다.”

목소리 큰 아저씨가 한 상 가득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놓고 자리를 떠났지만 두 사람은 쉽게 수저를 들지 못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성빈이었다.

“네가 날 괴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본부장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나쁜 건 회장님이잖아요.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위로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성빈은 젓가락으로 커다란 게딱지를 하얀의 앞 접시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이마저도 안 하면 아버지랑 같은 인간이 맞을 테니까. 그런 사람을 네가 좋아해 줄 리 없잖아.”

자신을 보고 싱긋 웃어 보이는 성빈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하얀은 입을 어서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 회장과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을 할까? 그래도 자기 아버지인데? 그게 정말 성빈이 듣기 원하는 말일지 하얀은 의문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니 말 한마디 못 한다 해도 괜찮겠지.’

하얀은 애써 그리 생각하며 성빈에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다 안다는 듯 그녀의 미소에 웃음으로 회답했다.

간장게장은 맛있었다. 하얀은 이렇게 맛있는 집을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알려 준 진성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뭐, 좋은 사람이니 아직 젊은데 결혼이 두 번째겠지. 음? 포장 판매도 하네? 하얀은 벽에 적힌 종이를 보며 부모님을 떠올렸다. 포장을 해갈까 생각하다 이 심각한 분위기에서 간장게장을 포장해 가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고민했다.

‘역시 좀 그렇지. 차에서 냄새가 날지도 모르고.’

포장을 어느 정도로 잘해 주는지는 모르지만 만에 하나 트렁크에 국물이라도 새면 큰일이란 생각에 하얀은 효심을 거두었다. 별말 없이 식사를 마치고, 성빈이 계산대에서 한 말에 하얀은 눈을 크게 떴다.

“간장게장 5kg 두 개 각각 포장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성빈이 눈이 똥그래진 하얀을 보며 말했다.

“부모님 가져다드려. 나도 하나 가져다드릴 테니까.”

“본부장님 진짜 초능력 있으세요?”

하얀이 참지 못하고 묻자 성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경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짧은 인내력을 후회했다. 성빈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초능력? 네 마음을 읽는?”

“제 마음만 읽으면 초능력이라기에 너무 쓸데가 없죠. 제가 이상한 이야기했어요.”

자신을 놀리는 거란 생각에 그녀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네 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가지고 싶네.”

하얀의 찌푸린 표정을 보더니, 성빈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진짠데? 진짜로 가지고 싶어.”

“저 먼저 나가 있을게요.”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 사이 다시 성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여간에 기회만 있으면 사람을 못 놀려서 안달이야. 하얀은 입술을 조금 내밀고 가게 앞에 깔아 둔 작은 자갈을 구두로 헤집었다. 곧 웃는 얼굴로 아이스박스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성빈이 나왔다.

“화난 거 아니지?”

하얀은 트렁크에 짐을 싣는 성빈을 말없이 지켜보다 그가 조심스레 묻는 말에 대답했다.

“이렇게 직장 상사가 간장게장도 사주는데 제가 왜 화가 나겠어요?”

“직장 상사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거 보니까 화난 거 같은데.”

못 당하겠네, 진짜. 하얀은 장난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성빈을 조금 노려보다 자신도 웃고 말았다. 그녀는 놀림당했단 불쾌함보다 성빈의 기분이 좋아진 게 다행이란 생각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