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말도 안 돼.”
TV 화면을 바라보는 시연은 머리를 세게 맞은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현재 자신이 며칠 밤을 새워 가며 맞이한 충격적인 게임의 엔딩을 바라보며 넋을 놓아 버렸다.
“이런 반전이 있었다니. 아니, 왜 남주가 여주를 버리는 엔딩이 나오는 거냐구!”
침착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내 충격으로 인해 갈라졌다.
성공적인 로맨스일 줄 알았던 게임에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시연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결말의 충격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려 버리는 일을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인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시연이 현재 하는 게임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흔히들 말하는 명작 게임의 반열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 지금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제법 뒤늦은 감이 있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리뷰 같은 것 좀 더 찾아보고 사는 거였는데….”
입 안에 감돌고 있는 씁쓸함이 기분 나쁘게 느껴져서인지 그녀의 말에 가시가 제법 돋쳐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게임의 남자 주인공은 그야말로 모든 여성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했으니까.
물론 여자 주인공이 다가가면 다소 거부감을 보이기는 했지만, 원래 공략하기 어려운 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재미와 열정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시연이 바라고 바라던 진짜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남자 주인공의 호감도를 끝까지 채워야 했으므로 몇 번의 실패를 겪으며 겨우 달성한 성과였다. 그런데 노력의 끝이 배신으로 이어지며 허무한 결말이 나오니 이제는 화가 치밀어 오를 지경에 이르렀다.
“이딴 게임을 명작 게임이라고 소개하다니…. 미친 게 틀림없어.”
시연의 입장에서는 사기를 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봤던 블로그의 운영자가 이 게임 업체와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임과 관련해서는 인지도가 꽤 있었던 탓에 그 사람의 평가를 맹신한 자신을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역시 뭐든지 쉽게 믿으면 안 돼.”
아무것도 모르는 안면조차 없는 이의 말을 쉽게 믿은 것에 대한 자조적이면서 씁쓸한 미소가 그녀의 고운 얼굴에 그림자와 함께 드리웠다. 물론 그 블로그 운영자를 믿고 산 대부분 게임들이 만족스러운 끝맺음으로 끝난 경우도 많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정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이었다.
“에휴….”
항상 오늘처럼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만 떠오르는 기분 나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니 시연의 입 밖으로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아서 나오는 한숨이라고 하기에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연이 무겁게 들려왔고, 냉기가 감도는 집 안을 서서히 무거운 공기로 채워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연은 큰맘 먹고 외출을 결심했다.
평소 사람 만날 일은커녕 집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거의 없는 그녀에게는 하나의 연례행사와 다름없는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최근처럼 이것저것 배달시키기 편안해진 사회에서 시연이 집 밖으로 나가는 빈도는 더욱이 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하는 건 아니었다.
대개 집순이, 집돌이라고 하는 종족들은 한 번 외출할 때 과연 이걸 하루 만에 다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 마련이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오랜만에 외출에는 들뜬 기분과 함께 별거 아닌 무언가라도 해보고 싶기 마련이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사치를 좀 부려야겠어.”
그녀가 말하는 사치란 것은 기껏해야 편의점이 아닌 케이크 가게에 가서 그녀가 좋아하는 레드벨벳 조각 케이크와 커피를 포장하고, 평소 자주 가는 식당에서 육즙이 흘러넘치는 스테이크를 사와 먹는 것이었다.
어쩌면 서울에 오피스텔 한 채를 가지고 있는 건물주에게는 너무도 소박한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었지만, 시연은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듯 벌써부터 갈색의 눈동자가 영롱한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
케이크 가게에 먼저 들러 케이크와 커피를 산 뒤에 시연은 스테이크를 사기 위해 항상 찾는 가게로 향했다. 슬슬 기온이 내려가던 날씨는 오늘로써 영하의 온도를 찍으며 밖으로 나온 시연에게 쌀쌀한 냉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을 선사해 주고 있었다.
길을 지나가다 보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모자를 눌러쓰며 최대한 그 차가운 바람을 피하고자 노력하는 반면, 시연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오히려 자신을 맞이하는 냉기를 온몸으로 느끼려는 모습을 보였다.
‘역시 나는 겨울이 좋아.’
왠지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사라진 그녀의 어여쁜 얼굴이 서서히 빛에 물들기 시작해서인지 바람에 의해 찰랑거리는 그녀의 갈색 곱슬머리도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함께 그녀를 짓누르던 좋지 않은 기억들이 함께 날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어? 눈이다.”
풍미가 가득한 냄새로 가득한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포장해서 나온 시연은 마침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첫눈에 잠깐 그 자리에 서서 세상을 하얗게 뒤덮어 가고 있는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했다.
시연은 차가운 겨울을 좋아했다.
그녀는 차가운 겨울에 내리는 차가운 눈을 좋아한다.
하얀색은 순백의 상징과도 같았다.
속세에 물들지 않고 단순히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생각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순수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새하얀 눈은 그저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눈발이 제법 센 데다가 분명 오늘 새벽까지 눈이 내릴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으니 분명히 이 작고 연약해 보이는 눈송이들은 결국에는 이곳을 완전히 하얗게 물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분명히 만지면 움찔할 정도의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는 것인데 바닥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 눈을 보면 어째서인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차가운 본질과는 다르게 겉보기에는 따뜻해 보이는 겉과 속이 다른 부분이 시연에게는 상당히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물론 사람이 그러면 별로겠지만.”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다.
그녀가 가장 힘든 시기에 자신을 외면해 버린 이들에 대한 약간의 분노와 허탈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당시의 기억이 또 떠오르려 하자 불그스름한 색상의 도톰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궁상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오늘처럼 운이 좋은 날에 더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는 시연의 단호한 태도 때문이었다. 확실히 지금의 그녀는 아까 전 게임을 할 때 충격으로 넋을 잃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듯 보였다.
애초에 그런 게임 자체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밝은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집으로 향했다.
‘좀 더 쌓여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길을 완전히 덮어 버린 눈을 밟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 그녀의 게으른 성품에 굳이 눈을 밟으려고 나올 일은 가능성이 아예 없는 이야기였다.
“으, 근데 이제 슬슬 추워지네.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
겨울을 좋아하고, 눈을 좋아한다고 해서 추위를 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결국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반들반들하면서도 하얀 눈과 비교했을 때 거의 뒤처지지 않을 것 같은 새하얗고 아름다운 볼이 추위로 인해 점점 붉게 물들어 갔다.
적당히 살집이 있어 말랑해 보이는 볼이 붉게 물든 모습은 감기라도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온종일 친구들과 뛰노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연상케 했다.
춥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차가운 눈과 몸을 맡기는 그런 어린아이. 하지만 그녀는 나이가 차 있는 성인이었고,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겨울이 좋고, 눈도 좋았지만 역시 추운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집으로 향하는 시연의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
모든 것이 거의 완벽했던 하루였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지루한 일상으로 보일지 몰라도 시연에게 있어서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먹기 위해 외출을 한 데다가 첫눈을 봤으니 더없이 좋은 하루였다. 애초에 특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이런 소소한 행복을 찾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좋은 방향성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게임과 관련된 문제를 훌훌 털어내고 그녀는 혼자 자기에는 다소 크고 넓어 보이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스테이크에 케이크까지 먹어 잠이 솔솔 올 정도의 포만감에 시연은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여기까지 본다면 더없이 좋은 하루를 보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만 것이었다.
“으음….”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악몽으로부터 도망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큰아버지.’
물론 가끔가다 시연은 악몽을 꾸기도 했고 언제나 악몽 속에서의 악당은 자신의 큰아버지였다. 악마처럼 흉악한 미소로 점점 다가와 숨통을 조이려고 하는 그 커다란 존재로부터 시연은 꿈속에서조차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도망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꿈은 항상 시연이 큰아버지로부터 잡히면서 끝났는데 항상 잡히자마자 잠에서 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잡히고 나서 점점 숨이 쉬어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잠에서 깰 수가 없었고, 그 바람에 그녀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