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하나. 맞잡은 두 손

기다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도복을 입은 터라 발을 디딜 때마다 ‘퍼억’ 휘날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다시 찾은 것만 같은 설렘과 떨림은 심장 박동 소리로 표현됐다. 요동치는 심장 박동과 거친 숨소리, 수아의 볼은 빨개져만 갔고 손을 ‘꽉’ 잡으며 말을 건넸다.

“싫은 거야…? 그럼 나갈게. 잘 자.”

예진이가 알려준 대로 여지를 남기며 돌아섰다. 그러자 수아는 ‘꽉’ 잡은 두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을 건넸다.

“아니거든 바보야!”

“아무 말도 없길래.”

“떨려서… 그리고 좋아서.”

“바보….”

“흐앙, 집에 가기 싫어.”

“저기 너희 집 아니야?”

“어디?”

고개를 뒤로 젖히자 주방 창문이 열린 채로 유일하게 ‘주황색 불빛’ 켜진 곳이 있었다. 누군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희미한 실루엣이 시야에 잡혔다. 그러자 수아는 누구인지 아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하아, 씨!”

“왜 그래?”

“언니야! 또 저기서 구경하는 거 봐. 내가 나가면 주방 창문으로 구경한대.”

“진짜? 누나 귀엽다.”

“귀엽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누나도 연애하고 싶은가 봐.”

“몰라, 또 뭘 요구하겠지. 그냥 좀 독서실 좀 가지.”

“더 있으면 엄청 놀리겠다. 들어가. 푹 쉬고 찜질도 잘하고.”

“알았어. 조심히 가구 문자 해. 알았지?”

“응. 문자 꼭 보낼게!”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오랜만에 경험하는 상황이었다. 수아는 계속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손짓했으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까지 그 자리에 서성였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동안 겪었던 무게와는 달랐다. 고민과 걱정이 말끔히 해결되었고 수시로 변하는 감정의 고통은 가라앉혔다. 여전히 영롱한 달빛은 거리 곳곳을 밝혔으며 한 번씩 스쳐 지나가는 습기 먹은 바람은 한줄기 땀을 반기기에 충분했다. 길고양이들은 자유를 얻은 마냥 이곳저곳을 무리 지어 이동했으며 아파트 정문에 다다르자 주차를 마친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현수야!”

먼저 보시고는 어머니께서 반기셨다. 재빨리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향했으며 숨기지 못한 표정을 보시더니 말을 이으셨다.

“너 수아랑 다시 사귀는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얼굴에 다 쓰여 있네. 쓰여 있어.”

“누가 봐도 다 알겠다.”

“그 정도예요? 나름 무표정으로 달려 온 건데….”

“얼마 전까지는 잘 숨기더니 이젠 숨기지도 못하네.”

“누굴 닮아서 이렇게 감정을 잘 드러낼까?”

“누구긴 누구야. 당신이지.”

“내가 대학 때 별명이 포커페이스였어. 포커페이스!”

“잔말 말고 당신도 짐 들어.”

“현수야, 짐 들고 와.”

항상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상대가 되지 못하셨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전과 다른 애정과 달콤함이 묻어났다. 또다시 찾아온 잠의 기운, 살며시 눈을 감았지만, 그곳으로 인도되지 못했다. 그러자 수아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오글거리는 말들이 등장하자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고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아갈 정도로 기쁨을 표현했으며 미소는 한동안 곁에 머물렀다. 아침부터 혜원은 문자가 아닌 전화를 걸었고 한쪽 눈을 반쯤 뜬 상태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희 다시 사귄다면서, 문자를 보냈어야지!”

“어…? 응, 미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지금 몇 시야?”

“7시 반인데.”

“오늘 일요일이야. 네가 아침 일찍 전화해서 그런 거야.”

“뭐가 일찍이야? 앞으로 너 수아랑 운동도 하고 그래야지.”

피로에 쪄 들어 간신히 숨만 쉬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이어갔으며 혜원은 준영처럼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귓가에 닿는 모든 소리는 금방 묻혀갔으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고 또다시 찾아온 잠의 기운에 깊은 꿈속으로 발걸음을 나섰다. 혜원은 한숨을 ‘푹’ 쉬며 문자 한 통을 남겼다.

“아아악!”

*

얇디얇은 비명이 집안에 울려 퍼졌다. 몸의 피로는 꽤 많이 풀렸는지 소리와 동시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서 난 듯했지만 아무도 그곳엔 없었고 안방을 열자 어머니께선 아버지를 때리고 계셨다.

“이게 뭐야, 이게! 이 돼지야!”

자고 있던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어머니에게 맞으셨고 자리에 주저앉으셨다. 볼펜 정도 크기의 무언가를 아버지에게 보여주셨지만, 비몽사몽 한 채로 손에 쥐시더니 곧장 다시 침대로 누우셨다. 그러자 또다시 얼굴을 때리셨고 아버지께선 화가 나신 듯 일어나시면 말을 뱉으셨다.

“왜 그래? 왜! 잠 좀 자자. 여보.”

“잠이 오게 생겼어? 이것 좀 보라고!”

“이게 뭔데?”

아버지께선 손에 쥐신 물건을 보시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셨다. 다시 한 번 어머니의 눈을 마주쳤고 또다시 그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놀라신 듯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셨다. 곧, 환호성을 지르시며 미소를 보이셨고 연신 말을 건네셨다. 그러자 어머니께선 손바닥의 윗부분으로 입술을 살살 치시며 말을 이으셨다.

“이게 좋아할 일이야? 이게! 조심 좀 하라고 했지. 이 돼지야!”

“뭐 먹고 싶어? 아니 나가자. 여보.”

“아이구, 이 화상아! 현수가 올해 열여섯이야. 열여섯!”

“그게 뭐? 우리 어차피 결혼 빨리해서 괜찮아.”

아리송한 얼굴로 두 분을 바라봤다. 도저히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지 몰랐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방으로 향했다. 좋아하시는 것인지 화를 내시는 건지 두 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 번의 노크 소리, 어머니께서는 손짓하며 거실로 부르셨다. 아버지께선 입이 찢어질 듯 미소를 보이셨고 어머니께서는 묘한 표정을 지으셨다. 곧, 아버지께서 건네신 말에 자연스레 입을 ‘쩍’ 벌리며 어머니를 바라봤다. 예상하셨는지 눈을 살며시 감으시며 고개를 짧게 끄덕이셨다.

“현수야… 괜찮아?”

“아, 아… 네. 괜찮아요.”

“혹시 뭐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좋은 일인데 왜 안 좋게 생각해요. 그냥 당황스러워서요….”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엄마한테 축하한다고 해줘야지.”

“별로 안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요?”

“여보, 안 좋아?”

“조용히 해. 이 화상아.”

“여보, 그런 말 하지 마. 다 들어!”

“하아…. 당신 회사 이제 악착같이 붙어 있어야 해. 걱정 안 돼?”

“내가 조금 덜 먹고 덜 사고 그러면 돼. 악착같이 붙어 있을게.”

“그럼 병원은 언제 가세요?”

“내일 가봐야지. 너도 같이 갈래?”

“저도 가도 돼요?”

“그럼. 같이 가자.”

“나도 내일 잠깐 말하고 데리러 나올게.”

들릴 듯 말 듯, 핸드폰 벨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점점 방문에 가까워질수록 소리의 세기는 높아졌으며 끊임없이 방안에서 울려댔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울려대던 소리는 한순간 사라졌다.

‘전화왔다 메세진데 속았지?’

수아의 문자였다. 같이 산책을 하기 원했고 우리는 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터라 부모님을 따라 마트로 향했다. 오전이라 그런지 마트 주차장은 꽤 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으며 어머니의 옆에 바짝 붙어 이동했다. 어머니는 그럴수록 부담스러우셨는지 배를 연신 ‘콕’ 찌르며 말을 내뱉으셨다.

“그만 좀 해. 진짜, 유난은.”

“당신 나이도 있고, 조심해야 해. 조심!”

부담스러울 정도의 자상함과 배려에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욕을 내뱉고 싶어 하는 표정이셨다. 하지만 한숨만 내쉴 뿐 어떠한 부정적인 말도 건네지 않으셨고 채소 코너를 돌아 과일 코너로 진입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형님.”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향하자 수아네 가족이었다. 짧은 인사와 대화가 이어졌고 나란히 노란 카트를 민 채, 이동했다.

“잘 지냈어? 우리 또 낚시 한번 가야지.”

“겨울 되기 전에 한번 가시는 거 어때요?”

“좋지. 아참, 근데 우리 이번 연도는 힘들 거 같아.”

“무슨 일 있어요?”

“현수 동생 생겼거든.”

“동생이라뇨?”

순간의 정적과 동시에 모두 어머니로 시선이 고정되었다. 눈을 질끈 감으시며 아버지의 등에 스매싱을 내리꽂으셨고 어색한 웃음을 보이셨다. 수아 부모님께서는 그런 모습에 미소를 보이시며 말을 건네셨다.

“형수님 축하해요!”

“언니 축하해요.”

“축하는 무슨… 아직 병원도 안 가봤어. 확실한 것도 아니고….”

“테스트기로 해 보신 거예요?”

“응.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에휴….”

“언니 이렇게 된 거, 우리 식사 같이하는 거 어때요? 축하할 일이니까 저희가 살게요.”

“그래요. 형수님 같이 식사해요. 수아도 오늘 현수랑 약속 잡았다고 하던데.”

“너희 약속 잡았어?”

“네. 산책 하려고 했어요.”

“그럼 식사 같이할까?”

수아 부모님의 안내에 따라 뒤를 따르며 외곽지역의 음식점으로 향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하얀 벽돌의 짙은 갈색 나무문은 오는 이로 하여금 추억 속으로 젖어 들기에 충분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이 시선에 잡혔다. 조금 낡은 듯한 집기류와 타일 벽에 붙어 있는 빨간 글씨의 부적들, 하얀 바탕과 검은 글씨의 메뉴판은 한눈에도 역사가 오래된 가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