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물일곱. 그저 그런 날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크지 않았다. 학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봄이 다가온 것처럼 날씨는 포근했고 기분 좋은 냄새가 거리 곳곳에 풍기는 것만 같았다. 바람은 찾아볼 수 없었고 모처럼 얇은 바람막이 옷이 몸을 덮었다. 비둘기들은 가는 곳곳에 자리를 지킨 채, 사람들을 맞이했으며 길고양이들은 얼굴을 핥으며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식빵 모양의 하얀 뭉게구름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학원 건물 위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곳엔 반달 미소를 품은 예진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늘도 수아 병원 다녀오는 길이야?”

“응. 봄 방학이라고 해서 낮에 수업할 줄 알았더니, 저녁에 하네.”

“그러게. 낮에 하면 좋을 텐데. 수아는 어때?”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아직 오래 걷는 건 무리인 거 같아.”

“빨리 나아야 하는데… 오늘 애들이랑 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역시 준영이더라.”

“왜, 무슨 일 있었어?”

“애들이 모르는 거 다 알려주더라고. 근데 준영이 아직도 혜원이 좋아하는 거 같던데….”

“응? 무슨 소리야.”

“누가 날 좋아하는지 이런 거 다 알거든. 혜원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어떻게 맘을 쉽게 접겠어. 안 그래?”

“둘이 잘 됐으면 좋겠는데… 혜원이가 맘을 안 열어.”

“열 수 없을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해?”

“확고하니까 준영이도 알아. 단지 그냥… 음… 지켜볼 뿐이지.”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대로 최선을 오케이?”

“뭐래. 빨리 들어가자.”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강의실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애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학원버스가 일찍 도착한 탓에 우리의 자리는 사라져 있었다. 별수 없이 우린 서로 짝지어 앉아야만 했고 첫 교시 수업부터 곳곳에서 하품이 터져 나왔다. 눈이 서서히 잠기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꾸벅꾸벅 조는 애들이 있는가 하면 손을 꼬집거나 뺨을 때리는 모습이 계속 시야에 잡혔다. 그러자 원장 선생님께서는 창문을 여셨고 짧은 스트레칭이 시작되었다.

“으읔 하아… 윽! 하아….”

손을 잡은 채 팔이 하늘로 향하자 앓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탁한 공기는 창문이 열린 곳으로 사라졌으며 금세 맑아진 것만 같았다. 모두에게 머물고 있던 잠의 기운은 사라졌고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칠판으로 향했다. 그런 모습에 원장 선생님께서는 흐뭇하신지 웃었고 저녁 식사를 알리는 6번의 종소리가 울러 서야 밖으로 발걸음을 향할 수 있었다.

“벌써 개학한 거 같아.”

“아, 힘들다.”

“이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하냐.”

“와, 공부 잘한다고 우리한테 저러는 거 봐.”

“원래 저래. 내버려둬.”

“뭐가, 기운 내자고! 그런 뜻에서 떡볶이 사주려고 했더니.”

“사랑해. 준영아!”

“너 오늘 진짜 멋있는 거 같아.”

“왜 그래. 하지 마! 그런 거 수아한테 가서 해.”

“수아한테는 자주 해주는데, 뭐….”

“말끝이 흐린데? 무슨 일 있어?”

“전혀. 부끄러워서….”

“아, 진짜! 너무 닭살 떤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내가 대신 사과 할게.”

다친 이후로 자주 생각이 났고 말끝마다 수아의 이름이 나왔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 속에 조금 더 함께하고 싶었고 그럴 수 없음에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떨어진 순간에도 수아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핸드폰의 진동이 울릴 때면 빠른 속도로 확인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예진과 준영은 옅은 미소를 보이면서도 한숨을 ‘푹’ 쉬었다.

“여보세요? 응. 나 현수랑 준영이랑 밥 먹고 있어. 알았어. 현수한테 말할게.”

우리의 이름이 귓가에 닿았다. 시선은 예진에게 향했고 부담스러웠는지 손을 ‘휙’ 손짓하며 말을 건넸다.

“수아한테 전화 왔어.”

“응? 연락 안 왔는데.”

“나한테 뭐 좀 물어볼 겸 전화한 거야.”

“근데 나한테 뭘 말해?”

“오늘은 빨리 잘 거래. 피곤하다고 내일 문자 보낸다고 하네.”

“아, 그래? 약 기운 때문에 그런가 보네.”

살짝 삐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예진은 젓가락을 식탁 위로 세게 놓았다. 준영은 그런 모습에 예진을 쳐다보았고 본인도 세게 놓았던 것에 놀란 듯 살짝 머뭇거렸다. 그러자 준영은 코웃음을 시작으로 크게 웃었고 예진은 민망한 듯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크게 웃던 준영의 웃음이 귓가에 머무르지 않자 예진을 보며 말을 건넸다.

“너무 세게 놓았어. 너 알지?”

“모른 척해줘. 민망하게 그걸 크게 웃냐.”

“웃긴데 어떻게 해 그럼. 너도 한 번씩 웃겨.”

“혜원이처럼 너도 나한테 맞아볼래.”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치….”

“근데 무슨 말 하려고 한 거야?”

“너 보니까 팔불출 같아서 그래.”

“팔불출?”

“어리석거나 약간 모자란다고 뭐, 그런 뜻인데.”

“왜? 무슨 말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해.”

“그렇게 말하면 욕 같잖아.”

“그런가? 뭐 자식 자랑이나 여친 자랑 막 하는 사람들한테도 쓴다고 생각해. 궁금하면 사전 찾아봐.”

“아… 뭐지… 이상하게 기분 나쁜데.”

“나쁠 수도 있고 안 나쁠 수도 있지.”

“맞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안 좋은 거잖아.”

“너 너무 닭살 떨고 수아가 부탁해서 전달해줬더니 삐져 버리는 게 어울리지 않아서 그래.”

“와… 너무들 하네. 좋아하는데 어떻게 해. 갈수록 그 마음이 커지는데!”

“오, 뭔가 멋있었어.”

“이런 게 멋있어? 남자들이란… 에휴….”

“멋있지. 식어가야 하는데 더 커진다고 하잖아.”

“너희 싸워는 봤어?”

“응… 금방 풀고 그랬는데.”

“심하게 싸워봤냐고.”

“그 정도는 안 해봤는데.”

“내가 장담하는데 수아나 너나 성격이 보통 아니라서 둘이 싸우면 바로 헤어진다.”

“안 그럴 거야! 수아가 얼마나 착한데.”

“수아 착하지. 근데 수아도 고집이 세. 난 욱하는 게 있고.”

“너 욱하는 건 잘 아네?”

“조용히 좀 해줄래. 혜원이처럼 때려줘야겠네.”

“아니에요. 계속 말하세요.”

“여튼 지금은 수아가 아파서 글지. 예전처럼 몸 괜찮아지면 너희 싸우는 날이 많아질 거야. 오래 사귀고 싶으면 참고 이해해줘.”

“알았어. 노력할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

“그건 나중에들 생각하고 우리 빨리 밥 먹자. 면 불겠다.”

대화가 끝이 나자 멈춰있던 손은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먹는 내내 찜찜한 기분은 곁에서 맴돌았고 복잡한 감정들은 물밀듯 밀려왔다. 그럴수록 머릿속에는 학교 운동장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 들춰줬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릇을 비워나갔고 숨은 거칠게 반응했다. 물을 한 컵 마시며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왜 그래… 대체… 안 좋은 생각보다 좋았던 생각 하자. 제발….’

눈을 뜨자 예진과 준영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연신 바라보았다. 잠시 감았던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고 꽤 긴 시간 동안 머릿속을 괴롭히는 생각들과 싸웠던 것 이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며 나가자는 손짓을 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는 시야에 잡히지 않았으며 보라색 빛 하늘이 들어서자 ‘주황색 가로등 불빛’은 우리의 안내자가 되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에 타자 예진은 입술을 뗐다.

“아까 무슨 생각을 그리했어?”

“맞아. 뭔 생각했냐?”

“이런저런 생각.”

“뭐야, 맥 빠지게.”

“난 또, 어디 아픈 줄 알았네.”

“아프긴… 한 번씩 예전 일들 떠오르면 차라리 눈을 감게 되더라고.”

“예전 일들?”

“우리가 들어줄게. 말 해봐.”

“뭐하러. 혼자 앓으면 되지. 이런 건 말하는 거 아니야.”

“힘들면 말해. 네 여친 수아도 있잖아!”

“그래.”

“들어가자.”

정확한 타이밍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더는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강의실에는 이미 자리를 모두 지키고 있었지만, 마음가짐은 전과 달라 있었다. 예습이나 복습을 하는 인원은 찾아볼 수 없었고 모두 대화를 나누거나 핸드폰을 만지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고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시작 알림 소리에 모두 자리로 되돌아갔다.

“너희 너무 풀어진 거 같네?”

“네?”

“1월에는 이제 중3이라고 다들 예습, 복습하더니 너희 이러다가 원하는 고등학교 못 가. 실업계나 예체능 계열이 나쁜 거 절대 아니야. 그쪽에 관심이 있거나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쌤한테 말해. 부모님께 말해줄 테니까…. 너희한테 엄포 주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야. 한 번의 선택으로 되돌리기 힘든 순간이 될 수 있어. 그러니까 너희 잘 생각해. 늦지 않게, 부모님 설득해드릴 테니까 알았지?”

“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으며 표정은 굳어있었다. 피곤함에 자연스레 나타난 것이 아닌 고민과 압박감에 생겨난 증세였다. 꽉 찬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며 우린 다시 계단으로 향했다. 그러자 준영은 한숨을 ‘푹’ 쉬며 말을 건넸다.

“아까 국어 쌤이 말한 거 어떻게 생각해?”

“진심이셔. 그리고 부모님의 강압 때문에 학원 다니는 애들 아시니까 설득 해주겠다는 거야. 작년에도 몇몇 형, 누나들 예고나 상고 갔어.”

“나랑 친한 언니도 상고 갔는데 자격증 공부하느라 오히려 더 바빠. 그리고 인문계 가고 싶으면 지금보다 더 공부하라는 거잖아. 놀지 말고 할 때는 화끈하게 하라고.”

“나도 그 말 알지. 근데 학원에서 친해진 애들 그만두면 연락하는 게 쉽지 않잖아. 뭔가 하아….”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예진이 봐봐. 수아랑 혜원이 다른 학교인데도 친하잖아. 연락도 하고.”

“마음만 있으면 연락쯤이야.”

“너 누구 좋아하는 애 있냐?”

“없어! 아놔, 진짜.”

“보니까 이제 현수가 준영이 놀리네.”

“개학만 해봐! 아주 그냥.”

“먼저 간다. 조심히들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