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처음은 드라마처럼''''''# 12월 24일 - 민 서 하''''‘끔찍하다.’''오늘은 그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크리스마스이브다. 그런데 이 설레는 날, 나는 복날 개 끌어오듯 떠밀려 이곳에 와있다. 이곳은 신촌의 클럽 중에서도 가장 물이 좋다고 소문난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끌려온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신들린 듯 온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친구들 옆에서 박자무시하며 박수를 치는 일이다. 거리는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조명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내고 있을 텐데, 고작 이런 지하실에서 흥도 나지 않는 일에 박수나 치고 있어야한다니 처량하기 짝이 없다. 내 20살의 크리스마스 계획은 이곳으로 끌려온 순간 산산이 깨져버렸다. ''거기다 이 컴컴한 지하실은 테러의 향연장이다. 쉴 새 없이 번쩍거리는 조명을 쏘아대니 시각테러요. 시루 속 콩나물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의 소음만으로도 충분히 시끄러운데, 그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로 음악을 틀어대고 있으니 청각테러요. 눈만 마주치면 잡아끌어대는 웨이터들의 촉각테러까지. 그리고 결정타는 이 끔찍한 테러의 향연장에 나를 끌고 온 명분이다. 오늘 모임의 명분은 바로 내 생일파티다. 정말이지, 누구를 위한 파티인지 묻고 싶다.''‘이것들아, 니들 눈에는 내가 즐거워 보이냐?’''12월 24일에 이곳에 들어왔지만 지금쯤 25일이 되었을 거다. 그러니 난 이 끔찍한 곳에서 20번째 생일을 맞이한 거다. 도대체 내가 왜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생일을 맞이해야 하는 거냐고 눈앞에 녀석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마도 예수님도 자신이 목숨 바쳐 구원해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일을 유흥을 즐기는 날로 활용하는 사실을 보면서 나만큼이나 비분강개하고 계실 거다.''난 20살 생일은 이제 막 숙녀가 된 내게 찾아올 운명의 남자를 기다리면서 느긋하게 야경이나 즐기며 맞이할 생각이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이 못된 것들아! 난 내 운명의 상대를 이런 어두컴컴하고 매캐한 지하실에서 만나고 싶진 않단 말이다.’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지만 신들린 듯 날뛰고 있는 친구라는 것들이 내 바램을 들어줄리 만무하니 그냥 혼자 삭이는 수밖에.''그나마 위안이라면, 지금 무대위에서 음악에 맞춰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사로 중얼거리고 있는 DJ아저씨다. 막 패션잡지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말끔한 옷차림에 상당히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든 바람머리에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까지. 여자들에게 시각적 쾌감을 주기에 뭐하냐고 부족한 것이 없는 남자다. 홀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무대를 향해 서서 춤을 추고 있는 모양새로 짐작컨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닌듯하다. 하지만 내가 위안을 받고 있는 것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외모 때문이 아니라 흔하지 않은 저음의 목소리 때문이다. 위압적인 음악소리에 실려 들려오는 그 낮은 목소리는 마법사의 주문처럼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그렇지만 아무리 눈과 귀가 즐거운들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억지로 끌려와 허우적거리며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늘 내가 당한 이 테러는 누가 보상해 줄 수 있단 말이다. 산타할아버지? ''지금 눈앞에서 굿판의 신 내린 무당마냥 날뛰고 있는 놈들 중 가장 키가 큰 녀석이 내 불행의 원흉이다. 오지은, 이 녀석이 선동해서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절대로! 놀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신촌에 위치한 대학을 선택했고, 기적적인 합격과 더불어 인생의 행복을 찾았다는 이 녀석의 대학생활을 단 한번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여기에 끌려오기 전에는 말이다. 겨우 이런 유흥가에서 행복을 찾았다고 하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 건지. 아니, 생각은 하고 살고 있는 건지 시간을 내서 붙잡고 얘기해봐야겠다. 내가 여기서 제 정신으로 살아나갈 수 있다면 말이다.''아무리 생각 해 봐도 이곳은 정말 마음에 안 든다. 희박한 공기와 빛이 없어도 짐작할 수 있는 소파의 청결상태. 담배냄새와 섞여있는 정체모를 불쾌한 오물냄새. 거기다가 엄청난 술값. 누군가 이곳에 대한 불평해보라고 한다면 다음 크리스마스까지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다니는 온갖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만 이곳을 나가야 갰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이름뿐인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 빠져나간다고 얘들이 재미없어들 할 리가 없다. 사실 내가 빠져나간 다고해도 알아챌 지 의문이다.''결심한 김에 지은이의 얼굴을 향해 손을 흔들어 시선을 끈 뒤, 엉성하기 그지없는 마임으로 목이 말라 자리로 들어간다는 의사를 전했다. 내 모습을 보던 지은이는 흔쾌히 웃으며 그러라한다. 해방이라는 생각에 들떠서 이리저리 치이며 자리에 돌아오면서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 그럼 친구들아, 잘들 있어라. 늦었지만 이 몸은 크리스마스의 야경을 즐기며 집에 가련다. 원하지 않는 방식의 축하였지만 그래도 고맙다.’''무대를 바라보며 춤사위를 뽐내고 있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른 가방을 둘러매고 끔찍한 지하실을 벗어나 차가운 겨울 밤거리로 뛰어나갔다. ''세상에. 대체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걸까? 노점상과 들뜬 사람들의 행렬로 길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놀기 위해서 이곳에 위치한 대학을 선택했다는 지은이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나보다. 아무리 크리스마스라고 그래도 그렇지, 서울시내 정신 나간 사람들 중 태반은 여기 모인 듯이 보이니 말이다. ''사람들의 행렬에 뛰어들다가 우뚝 멈춰서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신촌에 와본데다가, 올 때 지하철로 왔기 때문에 방향감각이 전혀 없다. ''택시를 타기는 해야겠는데 대체 어디서 타야 하는 거지?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지갑에 돈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을 찾으려고 등 뒤에 둘러맨 가방을 뒤적이는데, 있어야할 매끈한 느낌의 지갑이 잡히질 않았다. 가방을 등에서 내려 구석구석 눈으로 확인하면서 뒤져보았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나를 웃으며 보내준 지은이 녀석의 얼굴이 떠올랐다. 발칙한 것! 내가 사라질 것을 미리 간파했었나보다. 아니, 그렇다고 지갑을 가져가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확인도 안하고 택시를 탔으면 그 후에 일어날 불상사는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 시간에 엄마를 깨워서 택시비를 달라고 말하면 아마 아침 해가 밝아오도록 잔소리를 들으며 거실바닥에 앉아있어야 할 게 뻔한데 말이야. ''“오! 오 지은. 네가 정녕 내 친구이기는 한 거냐?”''도망쳐 나올 때의 쾌감은 온데 없이, 월담하다 뒷덜미 붙잡힌 여고시절의 기분으로 클럽의 입구를 돌아봤다. 지금 저기를 내 발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거야? 한숨을 내쉬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볼을 툭툭 건드린다. 그 감촉에 등을 타고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제2장 딱하게 한걸음씩''■ 제3장 거와 현재의 조우(遭遇)''■ 제4장 콜릿처럼 달콤한''■ 제5장 혀드는 실타래''■ 제6장 짓말 하는 날에''■ 제7장 주보며 다가서기''■ 제8장 져들다''■ 제9장 랑하기 때문에''■ 제10장 끝에서''■ 제11장 함께 하는 세상''■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