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공작님에겐 약혼녀가 있었다 (합본)



#<1> 내겐 너무 예쁜 vvip 고객님

“……그래서 안타깝게도, 고객님의 혼인은 다른 분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남자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색색의 깃털들로 장식된 화려한 부채와 그 부채를 잡고 있는 작고 가는 손가락.

그리고 그 부채 너머 들려오는 미성의 중저음 목소리였다.

“아니. 그녀는 내가 무엇이 부족해 거절한 건가! 이유라도 알게 해 주게!”

남색 모자를 깊게 눌러 쓴 남자는 꽤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며 점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채로 가려진 입꼬리가 기다렸단 듯 매끄럽게 올라갔다.

“……퍼슨드 자작님. 고객님은 이미 훌륭하십니다. 소유하고 계신 재산들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고…… 양친 모두 제국에서는 꽤 괜찮은 평판을 내고 계시더군요.”

“그래, 내 말이 그 말일세. 근데 그런 나를 왜 마다한 건가! 내가 얼마나 많은 정성과 사랑을 그녀에게 주었는데, 이럴 수는 없네!”

그 순간, 사내는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렸던 고풍스러운 깃 부채를 더욱 위로 올리며 이야기했다.

“그건…….”

부채 위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는 마치 루비처럼 영롱했고 무언가를 빨아들일 것처럼 강렬했다.

“귀하께서 생각해보실 문제입니다. 저희는 연을 닿게 소개해 드릴뿐. 그 이상은 고객님께서 이뤄내셔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그러자 사내의 말을 들은 퍼슨드 자작은 벌떡 일어났다.

“뭐? 지금 내가 여기에 부은 돈이 자그마치 얼마인 줄 알아? 제국에서 유명한 결혼공작소라고 사교계에 소문이 자자해서 와봤는데 이제 보니 순 사기꾼 아니야!”

흥분해 소리치는 자작의 목소리에, 앞에 앉아있는 사내의 미간이 티 나게 좁혀졌다.

“말씀을 이상하게 하시네요. 귀하께 대여해 드린 데이트 의상비용과 기본적인 데이트 핵심 매너 수업비용, 개별 마부와 고급 마차 대여 비용, 진심을 담은 편지 작성 방법과 이성에게 호감을 사는 악기 교습 비용 등…… 이 정도면 저희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의 목소리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지만, 자작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전혀 다른 사람의 눈빛처럼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하아, 아니지. 자네 말이 맞네. 그러니 제발 내가 에뉴아 백작가의 영애를 신부로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게. 내 은화라면 얼마든지 더 내겠네.”

“흐음, 그러시다면…….”

사내의 목소리가 자작의 애간장을 태우듯 늘어져 갔다.

“자작님. 혹 상급 데이트 코스를 배워보시겠습니까?”

“상급 데이트 코스? 그런 것도 있나?”

“예. 한정된 고객분들에게만 열어드리는 특별 클래스이긴 한데…… 자작님께서 절박해 보이시고, 저 또한 두 분의 연이 이왕이면 좋은 결실을 보기를 바라니…… 어떠십니까.”

“당장! 당장 하겠네! 은화는 몇 냥을 더 지불해야 하는가.”

“음…… 계산해 볼까요?”

그는 자신의 책상에서 이미 꺼내두고 있던 말끔한 안내서를 자작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디, 이렇게 되면 총 은화 20냥을 더 지불해주셔야 합니다만.”

“얼마든지. 그녀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 상관없네!”

“흐음, 이리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라니 저 또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사내의 양 볼에 있는 보조개는 이때다 싶어 진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고 붉은 눈동자는 더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제대로 된 결혼 준비를 진행해 볼까요?”

***

“……피곤해.”

붉은 망토를 뒤집어쓴 한 여인이 꽤 지친 듯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오늘 소득이 꽤 짭짤하니까.”

여인은 은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는 떠날 수 있겠지?”

여인은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깊은 밤에서 새벽을 지나가는 하늘은 옅은 분홍빛과 보랏빛이 섞여 아름답게 흘러가고 있었고, 고개를 든 여인의 붉은 망토는 잔잔한 달빛을 받으며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바이올렛색의 구불거리는 긴 머리칼은 어딘지 만져보고 싶게끔 윤기가 흐르며 부드러워 보인다. 새하얀 피부와 붉은 루비를 닮아 매력적으로 빛나는 눈동자, 오뚝한 코와 눈동자만큼 붉은 입술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아차, 오늘 아버지께서 네일 백작님 댁으로 일찍 출발하신다고 하셨는데. 서둘러야겠다.”

그렇게 여인은, 다시 붉은색 후드를 뒤집어쓰며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

“이블린 아가씨! 이제 오시면 어떡해요!”

감귤 색의 머리칼을 양쪽으로 땋은 리체가 조심스럽게 뒷문을 열어주며 속삭였다.

“미안. 오늘따라 고객님들의 불만이 많아서. 아버지는?”

“알몬드 백작님은 벌써 이른 아침을 드시고 계세요. 늦기 전에 얼른 방으로 올라가 보세요.”

이런. 큰일이다.

생각보다 긴박한 상황 속 내 방으로 몰래 올라가던 나는, 리체가 가져온 베이지색 원피스 잠옷을 바쁘게 뒤집어쓰며 카펫이 깔린 계단을 소리 없이 밟았다.

[또 한 번만 야밤에 외출한다면 넌 진짜 외출 금지다!]

저번 달 두 눈에 번뜩이는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내게 경고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외출 금지라니. 끔찍해.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걸리면…….

“이블린.”

……안 돼.

그때보다 조금 더 화가 난 것 같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올라가던 계단 너머 가장 안쪽에 있는 내 방을 애가 닳도록 쳐다보며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블린!”

그리고는 몇 배는 더 높아진 아버지의 부름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버지…….”

“기어코 내 명을 어겼구나.”

짙은 갈색빛의 머리를 한쪽으로 단정히 넘긴 채 외출 준비를 마친 내 아버지는, 안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에 힘까지 주고서 날 바라보고 계셨다.

“아버지, 그게 아니라…….”

“시끄럽다! 내 명을 어겼으니 그때 말한 대로 넌 한 달간 외출 금지다!”

……안 돼. 한 달이라니!

한 달이면 벌써 놓치는 고객이 몇 명이야, 그럴 수는 없어!

“아버지.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 나이 벌써 스물셋. 이 나이에 외출 금지라니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 그렇다면 이 아비와의 약속을 지켰어야지! 말뿐인 약조는 아무 효력도 없는 문장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느냐!”

“알아요. 하지만 저도 제 삶이 있어요! 저는 지금보다도 자유롭게 여러 사람도 만나보고 싶고, 더 다양한 세상을 경험하고 싶단 말이에요!”

“여러 사람을 만나? 그건 사교계 모임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아.”

영 떨떠름한 내 표정과 행동을 잠자코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썹이 더 좁게 모아졌다.

“너 설마…….”

단정했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갑자기 바쁘게 누군가를 찾았다.

“리체! 너라면 알고 있겠지?”

옆에 쥐죽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리체가 몸을 움찔거리며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이블린이 최근에 다녀온 사교계 모임에 대해서 전부 읊어 보아라.”

“그, 그게…….”

리체의 가녀린 몸은 더욱 떨려오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바라만 볼 수 없던 난 결국 옅은 숨을 들이마시며 리체의 어깨를 감싸 안고 소리쳤다.

“……며, 몇 번 가보긴 했어요! 하지만 그곳은 정말 재미가 없었어요, 아버지.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애들밖에 없고 누구 하나 진심으로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도 없었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사교 모임을 안가? 후우, 머리야…… 이블린. 사교 모임이 네 친구를 사귀러 가는 곳은 아닌 거 알고 있지 않으냐.”

아버지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매만지시며 한숨을 쉬셨다.

“하지만 아버지, 저는 제 삶에 그들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아니, 애초에 어울리고 싶지가 않아요. 그들은 여우 같고, 능글맞고, 또…….”

“……그만. 네 뜻은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이블린. 후에 이 아비와 어미가 세상에 사라지고 없을 때 네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니.”

“알아요, 아버지. 아버지께서 걱정하시는 게 뭔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방법이 꼭 사교모임은 아니라는 거 아버지도 아실 거라 믿어요.”

“…….”

잠시 고민을 하던 아버지가 한층 가라앉은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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