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도망쳐. 영영 돌아올 수 없도록

태겸은 본과 진급식이 있어 일주일이 넘도록 제주도에 있었다. 하루 이틀, 점점 떨어져 지내는 시간들이 늘어났고, 처음보다 두 번째가, 또 그다음이 쉬워지는 것처럼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동거에 대해서 여전히 둘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엄마 때문에도 그럴 수가 없었다.

“태겸이가 결혼하자고 했다면서? 결혼할 거 아니야?”

“결혼하면 태겸이랑 해야죠. 만날 그래요. 빨리 결혼하자고.”

“그 녀석 점점 맘에 들어. 책임감이 있잖아.”

엄마는 꿈꾸는 소녀 표정이었지만 말을 꺼낸 그녀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감히 동거 이야기는 꺼내 놓을 수도 없었다.

“책임감……. 너무 있죠. 그리고 너무 보수적이야.”

“원래 남자라는 동물은 자기 여자 단속한다니까. 다른 놈들이 훑어보는 것도 얼마나 기분 나빠하는데. 자기 여자 지키려고 목숨 걸고 싸우기도 하잖아.”

그를 떠올려 보았다. 조선 시대 여인 같은 복장을 하라는 건 아니었지만 짧은 치마나 노출이 있는 옷을 입으면 정색을 했다. 엄마 말을 들으니 딱 맞는 것 같았다.

“빨리 결혼하자는 것도 그런 이유예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엄마는 묘하게 어정쩡한 대답을 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사진을 스크롤 했다. 잘생긴 남자. 키도 크고, 멋진 남자. 그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엄마는 사진을 보고 있는 그녀를 툭 쳤다.

“보고 싶어요. 벌써 3일이나 못 봤는데.”

“어이구. 그럼 그냥 빨리 결혼해.”

“요즘 결혼이 쉬워요? 당장 능력도 없는데 결혼만 하면 끝나는 것도 아니고요.”

“태겸이네서 많이 해주겠지. 나도 모아 둔 돈 좀 있어. 너도 알바 하잖아.”

쉽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사실 엄마도 옳은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태겸이도 지금은 공부가 먼저니까 용돈 받고 있지만, 도움받기 싫대요. 지금도 틈틈이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있어요. 데이트 비용만은 자기가 벌고 싶대요.”

그녀의 말에 엄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다른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와 그녀를 나서서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할 뿐이었다.

“태겸이, 어쩜 그렇게 번듯하게 잘 자랐니?”

“멋있죠? 보고 있으면 심장이 떨려요. 못하는 게 없는 천재 같기도 하구요.”

자랑을 늘어놓으며 어느새 행복한 얼굴이 되어 있는 그녀였다.

“그래. 멋지다. 쟁쟁한 애들 사이에 장학금도 놓치지 않고 말이야. 그런 아들이면 난 매일 업고 다니겠다.”

엄마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그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너무도 멋진 아들, 그런 아들을 왜 그렇게 내버려 두고만 있을까. 그가 얼마나 외로움을 싫어하는지 알기나 할까.

“문태겸 기특해. 나한테 종종 전화한다. 잘 지내냐 어쩌냐면서.”

엄마가 꺼낸 그의 얘기에 그녀는 깜짝 놀라 팔을 세워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태겸이 같은 아들 있으면 좋겠지요?”

자기보다 더 그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엄마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래. 있으면 좋겠다. 이 기지배야.”

“엄마도 늦기 전에 좋은 사람 만나요. 그래서 동생도 많이 낳아 주세요.”

그녀는 진심 반, 장난 반같이 스르르 말을 흘렸다.

“어우, 징그러운 소리 한다. 너나 덜컥 애 낳지 마.”

그녀의 장난에 놀라 발끈하면서 나와 버린 말에 엄마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 마세요. 정말 사랑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 우리 둘 다 확실하니까요.”

“천사랑 완전 능구렁이가 됐네?”

엄마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지만, 그 말 하나로 슬퍼하거나 우울해지기 싫었다. 그래서 발랄하게 재미있게 말하려고 무척 애를 쓰며 꺼낸 말이었다.

어색해지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밝은 표정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조금 들뜬 것 같은 그의 목소리. 술도 한잔한 것 같았다.

-뭐하고 있었어?-

그의 다정한 목소리만으로도 눈물이 찔끔 날 만큼 가슴이 떨렸다.

“엄마랑 수다 중.”

-그랬구나.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보고 싶어.”

엄마가 듣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는 한술 더 떠서 한숨까지 내쉬었다.

-우리 사랑이 안고 싶다.-

“옆에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들으면 어때. 나, 애들이 완전 유부남 취급해.-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녀에게 올인 하는 남자, 앞뒤도 돌아볼 줄 모르는 남자. 그게 태겸이었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고, 알았지?”

-별로 안 마셨어. 아, 제주도는 완전 여름이다. 다음에 같이 오자.-

그는 어디든 그녀와 다시 오자는 말을 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듯.

“그러자.”

-문 잘 잠그고 자. 내일 또 전화할게. 나 들어간다.-

“응 안녕.”

-잘 자. 사랑한다, 천사랑 쪽.-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그를 처음부터 바라보고 있던 은서. 은서와 눈이 마주친 그는 흠칫 놀랐다.

“왜?”

“꼭 그렇게 보고를 해야 하냐?”

“뭐?”

“너, 언제까지 정신 안 차릴 거야?”

“뭐?”

인상을 구기고 있지만, 은서는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언제까지 연애 놀이에 빠져 있을 건데?”

“아……. 이은서. 너 뭔가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니냐? 그래, 네가 우리 집안 어른들과 잘 아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참견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는 거잖아.”

그는 언제부터인가 신경이 쓰이게 거리를 좁혀 와 있는 은서에게 오늘이야말로 선 넘지 말라는 경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기로서 참견하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너희 엄마. 돌아오게 해야지.”

은서가 내뱉은 엄마라는 단어에 그는 놀라 숨이 턱 막혔다.

“야.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제 은서에게 차릴 예의나 여자로서 져주는 그런 배려는 거두기로 했다.

“정신 차리라고.”

빈정대는 말투에 은서도 무언가 단단히 각오한 것 같았다.

“뭐? 야. 이은서 너 대체 뭐냐?”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 친구인 건 몰랐지?”

친구? 엄마끼리 친구? 도대체, 이은서 너는 왜 이러는 건데? 그는 은서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친구?”

“그래. 네 손에 달렸어. 너희 할아버지. 문국남 이사장님. 정말 무서운 사람이더라.”

엄마로 향했던 말이 방향을 틀어 할아버지를 거치는 이유가 짐작이 가서 그는 소리쳤다.

“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 더 이상 안 참아.”

“궁금하면 네가 물어봐. 내가 아는 대로 말은 해줄 테니까.”

천둥같이 소리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은서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그는 은서가 여자만 아니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무언가 아는 눈치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뭘 알고 있다는 거야?”

“너희 엄마.”

“우리 엄마라니? 똑바로 말해.”

분노가 깃든 그의 손아귀는 은서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어깨를 강한 힘으로 잡히고서야 은서는 놀란 눈이 되었다. 그의 눈은 슬픔과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내쫓았다는 거. 돌아오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들을 은서는 태연하게 쏟아내고 있었다. 들었지만 믿을 수 없는 그가 따져 물었다.

“누가 그래?”

“너희 엄마가.”

그 말의 출처가 다름 아닌, 엄마라고? 엄마 스스로가 할아버지 때문에 한국에 올 수 없다 했다고? 이리 당돌한 은서는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는 은서를 잡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스토리였으나, 그는 힘이 스르르 풀려 버렸다. 어이가 없었고, 무언가 가슴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은서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지금 당장, 그는 확인을 해야 했다. 왜 그 혼자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그 사실이 무엇인지.

“엄마. 엄마!”

-태겸아. 이 시간에 웬일이니?-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데요?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오지 못하는 건데요?”

-왜 그래 태겸아.-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큰소리로 재촉하는 아들이 이상했다.

“나 때문인가요? 엄마?”

결국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엄마는 엄마 자신을 보호하려던 걸까, 아님 태겸을 보호하려는 걸까.

-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용기가 없어서 그런 거야.-

“엄마! 할아버지 때문인가요?”

-태겸아, 이다음에, 이다음에 얘기하자꾸나. 지금 엄마 근무 중이야.-

“엄마.”

-그래.-

“엄마, 보고 싶어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엄마보다 사랑이고, 그녀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열 살짜리 태겸이가 가슴속에서 울고 있었다.

사랑이 일하는 카페에 들어선 낯선 남자.

낯설었지만, 그 남자의 시선은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포스 앞으로 다가온 그 남자의 일행이 그녀에게 확인을 했다.

“천사랑 씨. 맞으신가요?”

“네, 제가 천사랑이에요.”

“문태겸 군 아버지께서 천사랑 씨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녀의 시선은 그곳으로 향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외모를 이제야 알아보았다. 그와 똑 닮은 얼굴 이목구비가 이제는 확연히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거리는 스무 발자국 남짓, 그녀는 만리 길을 걸어가듯 한 걸음씩 떼어내기가 힘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