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직 단 한 번의 성인식

밤에도 대낮처럼 LED 형광등이 눈부시게 밝은 수학 학원 어느 교실.

수학 문제가 안 풀리는지 죽상을 하고 있던 맨 뒷자리의 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문태겸, 양지윤, 우리 땡땡이 좀 치자.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우리도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어쩌겠냐. 이제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잖아.

그게 우리 고딩들의 운명이라잖아.

대학이 인생에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고등학생들에게는 전부 맞잖아.

오늘따라 더 힘겨워하는 민우가 안쓰럽기는 하다만,

그래, 오늘만 뛰쳐나가 보자. 저 유리창 밖에 정말 태양이 있는지…….

열일곱 살, 고 1인 문태겸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타칭 괴물이었다. 공식 취미는 농구이며 어지간한 잡기는 다 잘해 내는 엄친아 중에 엄친아였다. 그의 친구인 김민우와 양지윤과는 초등학교부터 과외며 학원, 일타 강사를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 멤버였다.

죽을 것 같다던 민우를 적진에서 구조해 나왔지만, 그럴듯한 스케줄이 있는 사람은 지윤뿐이었다.

“친구? 양지윤 네가 친구가 다 있어?”

믿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듯 민우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윤을 뚫어져라 보았다.

자랑할 거리는 아니지만, 나 홀로 학창 시절에 겨우 친구가 생겨 뽐내고 싶었을까. 지윤은 보란 듯이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어, 사랑아. 나 지금 지하철 타면 금방 도착해. 조금만 기다려.”

혈기 왕성한 남자 고등학생들의 귀를 간질이는 새로운 여학생의 존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고, 수컷의 호르몬이 왕성하게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태겸과 민우는 본능에 따라 홀린 듯 지윤을 뒤따랐다.

거북해진 지윤이 뒤를 흘끔거렸다.

“아 너네 뭔데, 니들 갈 길 가라고, 이 미친놈들이.”

거친 말을 툭 뱉어 놓고 부담을 느낀 지윤은 냅다 달려 도망을 쳤다.

건장한 남자 고등학생들이, 게다가 키가 187cm, 188cm의 장신인 남자 고등학생이, 그맘때쯤 체력이 얼마나 좋은지 지윤은 미처 알 턱이 없었다. 금세 따라잡혔고, 아니, 되레 추월당해 버렸다.

도착한 커피 전문점.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식상한 표현, 되게 멋없다고 생각했던 태겸의 눈에 천사랑의 모습이 영화처럼 정확히 들어와 지지직 하고 두 눈에 박혔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 오뚝하게 세워진 콧날, 주름 없이 탱글탱글한 입술, 인형 같은 조합의 얼굴. 윤기 흐르는 보드라운 흑갈색 긴 머리, 뽀얗고 하얀 피부, 가늘게 뻗어 나온 긴 팔다리. 교복 스커트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여고생 천사랑. 그녀의 첫인상이었다.

태겸의 얼굴에 설명하기 곤란한 작은 경련 같은 미소가 번졌다.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은 심장 박동 수가 급작스럽게 빨라지고 뜨거워진 심장이 파드득 조여 왔다.

쿵쿵 쿵쿵, 불규칙적으로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마른침만 자꾸 삼켰다.

저렇게 예쁜 여자애가 세상에 있었나? 이거…, 현실 맞는 거지?

꺽다리에 어울리지 않지만, 수다스러운 민우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진짜 천사랑이야?”

“맞아.”

“이름도 예쁘네. 천사도 되고, 사랑도 되고.”

만화에 나오는 딱따구리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딱 민우였을 거다. 사랑은 민우가 만들어내는 소음 속에서 오로지 태겸의 모든 동작을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사랑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태겸은 당황하는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줍어할 만큼 소심한 그가 아니었지만, 자꾸만 마주치는 그녀의 눈은 볼수록 보고 싶은 눈이었다.

첫 만남의 시간이 끝나 감을 아쉬워하던 그 둘.

그때, 어디에서 용기가 샘솟은 걸까.

야리야리 천생 가녀린 그녀가 먼저 용감하게 태겸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와 그녀의 인연.

“문태겸. 이번에도 1등 찍었다고?”

감정이라고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아버지 문시혁 원장의 말투는 늘 그랬다. 1등이 대수롭지 않은 듯, 항상 1등을 해내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명산 서울 병원 병원장, 명산 재단 봉사단 단장, 정형외과 교수, 명산 병원 이사장의 차남, 태겸의 아버지 문시혁은 이런 사람이었다. 가정보다 병원에서의 일, 재단에서의 위치가 무엇보다 소중한 사회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까지 수많은 날을 방황했지만 한 번도 어긋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주어진 집안의 환경은 그랬고, 삐딱하게 살고 싶지 않은 건 오히려 태겸의 신념이기도 했다. 집안의 어른들을 싫어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하고 학습되어 가는 삶을 택했다. 그 이유는 엄마 때문일지도 몰랐다.

문시혁 원장이 앉은 소파 뒤로 오래된 액자가 오늘따라 처연해 보였다. 엄마 아빠와 언제 찍었는지 아주 어린 태겸이 부모님 사이에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 이제는 낯설었다. 문시혁 원장은 지금보다 살짝 젊어 보였지만 표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시선이 엄마에게 가 닿았을 때, 눈가가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엄마와 헤어지던 그날, 공항 넓디넓은 공간에서 엄마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열 살짜리 태겸의 손을 잡고 말했었다.

“태겸아. 엄마가 공부 많이 해서 얼른 돌아올게. 우리 태겸이도 그동안 많이 자라 있어야 해. 알겠지?”

벌써 열일곱 살, 키도 187cm이나 될 정도로 많이 자라 있었다. 충분히 많이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시혁 원장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남은 말을 건조하게 털어 냈다.

“계속 그렇게 하는 거야. 얼마 안 남았어. 최고 의대만 입학해라. 그게 아버지 소원이고. 또 할아버지 바람이니까. 알고 있지?”

“네. 열심히 할게요.”

“최고 의대 입학만 해. 그다음부터는 자유야. 얼마든지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해줄 테니. 사달라는거 다 사주고, 해달라는 거 다 해줄 테니. 공부만 열심히 해. 알겠어?”

“네.”

문시혁 원장은 태겸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부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요즘 밥은 먹고 다니는지, 그러한 안부는 문시혁 원장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두둑하게 주는 용돈, 얼마든지 붙여 주는 유명한 선생. 오로지 문시혁 원장은 태겸이 최고 의대 입학만 바랐다. 열 살부터 혼자였던 어린 아들 문태겸은 겉으로는 잘 견디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짙은 외로움이 몸집보다 더 크게 자리 잡았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런 그에게 하늘이 보내준 사람일까. 외로움에 수장되어 가고 있던 그에게 꿈결같이 다가온 천사랑.

엄마보다 천배는 예쁜, 엄마보다 천배는 더 내 걱정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 천사랑.

그녀를 사랑한다고 깨닫게 된 날은 그녀가 곁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시험기간 편두통에 심하게 힘들었던 날, 그녀는 편두통 약을 손에 쥐여 주고는 울먹였다. 포근하게 안아 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참을 올려다보던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진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우리 엄마는 미혼모야. 나하고 엄마밖에 없어.”

울먹이며 간신히 꺼내 놓은 그녀의 고백. 놀라웠지만 놀란 척하기 싫었다. 그녀가 힘들게 털어놓은 말들이기에 듣는 가슴마저 뭉클했다.

“그래서 우린 아프면 서로 너무 안타까워해. 그런데 네가 아프다니까 너무 마음이 안 좋았어. 너, 아픈 거 싫어.”

마음이 아팠다는 그녀의 말에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감동이라는 감정,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파장이 온몸 구석구석 피를 따라 돌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용감한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솔직한 그녀 앞에 내놓을 수 없는 그의 가족사가 자꾸만 발목을 붙들었다.

말을 끝낸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고마웠다. 가슴 시리도록 고마웠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어서 행복했다.

버티다 보면 반드시 끝도 있는 법.

고교 시절은 내내 시험과 시험 사이를 높고 험한 허들을 넘듯 고난의 시간들뿐이었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빨리 고등학교 교복을 벗어 던져 버리고 싶은 그 하나로 버텼는지도 몰랐다.

태겸은 예상대로 최고 대학 의과 대학에 최종 합격을 했다.

이제 사랑이 차례만 남았다.

“아 떨려. 아, 나 못하겠어.”

그녀는 울 것처럼 징징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고 안타까운 그가 키보드를 끌어갔다. 엔터만 치면 끝이었다.

“아, 나 떨어졌을 것 같아.”

그도 그녀만큼 떨렸지만 차분하게 마우스를 클릭했다.

“사랑아.”

눈을 감고 뒤돌아서 있는 그녀를 불렀다. 목소리는 알 수 없이 차분했다. 그녀는 슬픈 예감이 자꾸만 들어서 돌아서기가 겁나서 자꾸만 망설였다.

“사랑아. 네가 직접 봐.”

주저하고 있는 그녀를 그가 다시 재촉했다.

-천사랑 님 합격을 축하합니다!-

모니터를 확인하는 순간, 사랑은 기쁨에 참을 수 없는 환호를 질렀다.

“합격이야. 태겸아, 나 합격이래. 합격.”

그의 목을 끌어안고 기쁨을 마음껏 소리치는 그녀는 빨갛게 들떠 있었다.

1초 전후가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은 1초 차이였던 걸까.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의 학교는 아이들의 마음이 먼저 떠나 버려 썰렁했다.

진학할 대학이 있는 자들은 그 시간이 너무나 꿀맛 같은 휴식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