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도움의 손길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눈앞이 아찔해서 두 눈을 꼭 감았다.

한 손은 차 문 잠금장치를 열려고 했던 시도는 이미 한 번 해보았지만, 곧바로 실패했다. 오히려 이렇게 왼손은 그의 손아귀에 꽉 잡히고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김재현을 저지하고 이 차 안에서도 나갈 수 있을까.’

은하가 그를 보며 방법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순간 가방 안에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서태주 선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 간 건지 알려 달라고 선배가 말했었지…….’

은하는 고민 끝에 폴더폰 통화 키를 눌렀다.

문자는 시간이 많이 들고 전화로 여기가 어딘지 키워드만 말해도 얼핏 전달될지도 몰랐다.

은하는 통화 키를 누른 채 재현을 보았다.

마음속에는 제발, 간절히 태주 선배가 내 전화를 듣기만을 바란다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발음했다.

“냇물이 흐르는데 샤브샤브집은 반짝반짝한데 야경으로 참 예쁘고, 나 배고파요. 우리 차에서 나가면 안 돼요?”

말을 끝내고서 은하는 가방 속 폴더를 천천히 닫았다.

혹시라도 태주 선배에게 은근슬쩍 지금 위치를 알리는 말을 했음을 재현이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다.

낌새를 보아서 재현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가 은하를 보았다.

“맞아, 분명 당신이랑 샤브샤브를 먹을 생각이었어. 처음에는 그랬는데 송아 님과 대화를 하다 보니 그럴 마음이 사라졌어. 이 문을 열면 송아 님은 먼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고민이 들어서 말이에요.”

한껏 힘이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낌새가 이상했다. 미묘한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은하는 말해야 했다.

“재현 씨가 방금처럼 막, 집요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난 도망 안 가요. 맹세할 수 있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 어디 서태주에게도 전혀 마음이 없다고 한 번 더 말해 봐요, 저번처럼.”

말속에는 ‘안 믿는다’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드러운 말투이긴 했지만, 배려라기보다는 치솟는 감정을 억누른다는 느낌을 자아냈다.

어디까지 떠들 수 있나, 재현은 그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더욱 공포심을 느껴야 했다. 상태가 어디까지 아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말할 수는 없다.

서태주 선배는 은하가 재현과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왜 좀 더 조심하지 못했나.

후회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이런 상황에서 믿으라고 우겨 봤자 더 의심만 살 게 뻔했다.

재현은 이어 말했다.

“부정은 안 하네? 서태주 말고 날 좋아하기로 선택해요. 그러면 나는 이 차 문을 열 수 있어. 거짓말인 거 뻔히 알아도 나는 믿을 수 있어요.”

은하는 말끝을 잘라 얼른 답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을 힘으로 억압하는 당신을 좋아할 마음 없어요. 꿈 깨요.”

힘주어서 은하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재현 씨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이것보다 훨씬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줄 줄 아는 사람인 거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어울리지 않게 날 겁주지 말아요.”

되도록 우리가 좋은 관계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서로 감정적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하게 말하려 애썼다.

하지만 재현은 비웃지 않았다. 대신 그 눈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늘 당신이 떠날까 봐 계속 불안해. 이런 날 이해할 수 있을까? 황은하.”

“왜 그래요?”

은하가 방어적으로 묻자, 재현은 혼란스러워했다.

왼손을 잡은 김재현의 손에서 온 떨림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떠날 것 같다고? 이미 은하는 2019년으로 돌아가려는 목표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재현에게는 하지 않았다.

말이 없는 은하가 답답했는지 재현은 웃음을 풀었다. 대신 다시 사진을 꺼내서 은하의 무릎으로 단호하게 놓았다.

“뭐라고 말 좀 해봐요, 황은하. 아니 황은하.”

그렇게 천사같이 웃으며 은하에게 호의적이었던 남자는 태도가 바뀌어 버렸다.

조소와 비웃음이다. 방심했다는 걸 재현은 질책하기라도 할 셈인가?

은하는 재현이 어떤 행동을 할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여긴 황은하의 조부모님이 영향력을 떨치고 계시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세월이 지났다고 아무도 못 알아본 채 은하가 활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것 자체가 사실은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대답을 원해요?”

침묵이 길어지는가 싶을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그 꼬마 황은하가 이렇게 숙녀가 되어 나타난 거예요?”

‘12년 후 미래에서 왔어요.’

그렇게 말한다 한들 눈앞에 이 사람이 믿어 주기나 할까?

어느새 재현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운 채 은하에게로 거리를 좁혔다.

그녀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열기가 닿는 그의 손은 건조했다.

은하를 여유롭게 탐색하던 눈은 다시금 날카로워지더니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가설을 세워 봤어도 답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계속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어요. 당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거. 그렇다면 나도 미래로 데리고 가요.”

본능적인 촉으로 위협을 느꼈지만, 은하는 답하지 않고 그를 외면했다.

“황은하가 누구예요? 난 황은하일 뿐, 그냥 날 닮은 여자일 거예요.”

은하의 의지를 읽었는지, 재현은 소리 내 유쾌하게 웃었다.

지금까지라면 기분 좋은 제스처였겠거니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어쨌거나 여긴 밀폐된 차 안이고 재현과 단둘이었다. 그가 마침내 웃음을 멈추고 짧게 답했다.

“당신이 계속 발뺌하겠다면 나도 말할 거리야 아주 많죠. 당신의 입을 열 증거 말이야.”

“내 얘기부터 해볼까요?”

여유로운 그의 음성이 차 안 가득히 메웠다. 그와 접촉한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은하가 경계하는 건, 재현이 지금 시한폭탄처럼 금방이라도 뭔가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였다.

의식한 순간 손을 옥죄는 느낌이 굉장히 불편해졌다. 은하는 슬며시 손을 비틀며 말했다.

하지만 은하가 벗어나려 할수록 재현은 손에 더 힘을 줘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억세진 악력과는 달리 재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면 뭐든 안 좋은 사태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내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거든. 당신과 고로케를 만들 때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죠. 오히려 사고뭉치였어요. 당신이 혼자 했으면 더 빨랐을 정도로.”

“왜 그렇게 말해요. 나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고로케 주문으로 재현이 일을 도왔을 때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일이 더 커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빵에 관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위협적인 자세가 싫지만, 재현이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은 더 싫었다.

하지만 재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나는 원래 그랬어요, 뭐든. 그래서 아버지는 당신의 뜻에 따라야만 한다고 늘 강조하셨죠. 나는 어머니의 손에서 강제적으로 빠져나와서는 늘 아버지가 터주는 길만을 걸으며 28년을 살았어요.”

“재현 씨…….”

“늘 아버지에게서 독립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안락함에 파묻혀 있는 것도 좋았어요. 그러다 당신을 만났고요. 은하수 제과에서 처음 당신을 봤어요.”

“은하수 제과라면?”

현재에서 은하가 대표로 있는 빵집이 아닌, 2007년의 할머니가 대표인 은하수 제과를 말하는 것일 터.

재현이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은 뭐가 무서운지, 화장실에 쏙 들어가서 미자 여사님과 서태주의 대치 상황을 살피고 있더군요. 충돌을 극도로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과거를 회상하는 재현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맴돌았다.

그때는 손녀를 알아보면 어쩌나, 엄청나게 조심스러웠던 게 사실이었다.

재현이 여전히 웃음 섞어서 말을 이었다.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아버지의 감정 파편에 맞지 않으려면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거든. 늘 눈치를 보며 사는 건 당연했고.”

“무슨 마음인지 알겠어요.”

상황은 달랐지만, 은하는 과거에 처음 왔을 때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러워했으므로 재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현은 은하를 타박하듯 대꾸했다.

“사람의 감정을 섣불리 안다고 말하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말을 잇던 재현은 그때를 여전히 생각하는 듯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런데 그렇게 조심스럽던 당신이 당당히 자리에 나가 제 목소리를 내더군요. ‘황은하입니다.’라고요. 나는 그때 당신이 참 예뻐 보였어요. 당신과 좀 더 많이 알아 가고 싶었고, 친해지고 싶었고 또…… 좋아하고 싶었어요.”

재현의 말속에 약간의 정적이 있던 순간, 까만 눈이 다시 은하를 응시했다.

이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순수하고 어떤 부수적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눈이었다.

오로지 당신을 원한다는 100퍼센트의 감정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은하는 가슴 언저리가 저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