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높은 곳을 향해

약하게 남아 있는 어둠을 틈타 검은 그림자 하나가 아무도 모르게 임정헌의 집 담장을 넘었다. 불도 밝히지 않은 방에 임정헌은 눈을 감은 채로 앉아있었다. 얼핏 보면 앉은 채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스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임정헌은 조용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임정헌의 눈이 은은한 달빛을 받아 빛이 났다.

검은 그림자는 조용하고도 빠르게 걸어와 임정헌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그를 보고 임정헌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힐끗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핀 사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실패하였습니다.”

그사이 잠이라도 든 것처럼 임정헌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이 서서히 사내의 숨통을 조여왔다. 그대로 있다가는 질식할 것 같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사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실패에 대한 변명이었다. 말을 할수록 제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과 함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끝났느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임정헌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서늘한 기운에 사내의 온몸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날카롭게 벼른 칼날이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섬뜩하였다. 사내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사내 앞으로 임정헌이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작은 주머니가 방바닥에 닿을 때 묵직한 소리가 났다.

주머니의 크기가 작은 것치고 상당히 많은 양이 안에 들었는 것이 분명하였다. 깜짝 놀란 얼굴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목이 떨어질 거라는 예상과는 다른 결과였다.

“다시 부를 때까지는 어디 멀리 떠나 있거라. 넉넉히 넣어 두었으니 한동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너무 놀라서 말을 하는 법도 잊어버렸는지 사내는 말이 없었다.

“이 방을 나가는 즉시 한양 땅에는 미련을 남기지 말고 떠나야 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대감마님.”

지엄한 분부에 사내는 냉큼 주머니를 챙겨 방을 나갔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이미 황송하였다. 거기에 생각지도 못한 재물이 손에 떨어졌다.

사내가 방을 나간 후에도 임정헌은 잠들지 못하였다. 임상은이 저지른 일을 무마하고자 반나절 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였다.

일단 사라진 남윤의 행방부터 알아야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아야 무엇을 하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강원도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한양에서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생사도 정확하게 모르지 않는가.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그때였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에 임정헌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뒤틀렸다. 며칠 전 문국현은 도겸의 일로 저를 찾아와 푸념을 늘어놓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엔 별스럽지 않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때 나눈 이야기가 이렇게 임정헌을 도울지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어렵지 않게 임정헌은 남윤이 도겸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의원 하나가 환자의 치료차 그 집의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사람 하나 구워삶는 건 임정헌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적당히 주머니에 돈을 찔러 넣어주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값을 다 하려고 알아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술술 일이 풀렸다.

일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서 마음을 놓았던 것이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돈은 돈대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끝이 허망하게 되었다.

이제 남윤은 누군가 제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변 경계가 강화될 것이다.

왕이 남윤을 만나기 전에 입을 막으려던 계획으로 인하여 자칫 잘못하였다가는 역풍을 맞게 생겼다. 이럴 때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바람이 잔잔해질 때까지 임정헌은 죽은 듯이 있을 계획을 세웠다.

임정헌이 사내를 조용히 돌려보낸 것도 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여차하여 꼬리가 밟힌다면 그를 방패로 삼아야만 한다.

임정헌이 어수룩하여서거나 마음이 넉넉하여 이런 행동을 한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는 엄청난 재물에 정신이 팔려 제 앞날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세상에 대가 없이 얻어지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다. 대가가 클수록 더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언젠가 사내는 임무에 실패하였어도 손에 쥔 엄청난 재물에 대해서 값을 치르게 될 터였다.

임정헌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뱀처럼 무섭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

시간이 지나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급한 대로 삼층장에서 이불을 꺼내온 도겸이 백운재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덮어버렸다. 시야에 적나라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최종원이 훌쩍거리는 남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종원아, 이게 다 나 때문이야.”

“이게 어떻게 너 때문이야. 이건 사고야, 사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일이 운이 나쁘게 오늘 밤 운재에게 생겼을 뿐이야.”

최종원의 말에 남윤이 고개를 저었다. 울컥 차오른 슬픔에 입술 끝이 덜덜 떨렸다.

고통스러워하는 남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곳에는 서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백운재가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최종원의 눈에도 뿌연 눈물이 차올랐다. 울음을 삼키려 최종원은 고개를 들고 잠시 허공을 응시하였다.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 무렵이었다.

“도련님, 잠시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하인의 목소리에 도겸이 남윤과 최종원을 내려다보았다. 최종원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보십시오. 남윤이 옆에는 제가 있겠습니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미련이 남았는지 도겸이 남윤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으니 나가서 일 보십시오.”

힘겹게 말을 토해내는 남윤의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운 남윤에게 부담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해진 도겸이 방을 나갔다.

남윤이 손가락에 힘을 주며 최종원의 팔을 꼭 잡았다. 의지할 곳을 찾는 남윤에게 짠한 마음이 들었다.

최종원이 부드럽게 남윤의 등을 쓸어주었다. 비록 붕대를 감고 있어 뭉툭했지만, 위로를 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분명히 그 사람이야.”

“그 사람이라니?”

되묻는 최종원의 얼굴을 남윤이 가슴 아프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널 이렇게 만든 사람. 그 사람이 운재도 저렇게 만든 것이 분명해.”

“알고 있구나. 그게 누군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남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기는 해.”

“그게 누구야?”

질문해 오는 최종원의 눈에 섬뜩한 살기가 어렸다.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요절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알려주면 어쩌려고?”

생각보다 침착하게 남윤은 반응하였다.

성치 않은 몸으로는 제 한 몸 지키기도 벅찬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무엇을 어찌하려는 것인지.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윤은 최종원이 걱정되었다.

“당장에 찾아내서 죽여버릴 거야.”

최종원이 분노를 섞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하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남윤이 그런 최종원을 쳐다보았다. 짓궂은 구석은 있었어도 누군가를 해할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붕대에 가려 정확한 표정이 어떤지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은 갔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사람을 원망하는 건 당연하였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남윤도 마음 한 켠에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임상은이 사라지길 바라였다. 그래도 이런 식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길러낼 뿐이었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크고 강해진 복수가 어느 날 목 아래에 놓이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최종원이 하려는 방법.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는지 말해줘.”

“네가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사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남윤아, 그러니 제발 말해줘. 누가 우리를 이런 지옥에 떨어뜨렸는지.”

최종원의 간절한 눈빛에 남윤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를 볼 때면 드는 미안함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희석되지 않는 이상 최종원을 볼 때면 항상 느낄 감정이었다.

흘끗 방 밖을 보았다. 도겸은 괴한을 뒤쫓았던 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사뭇 진지해진 모습을 보니 무언가 알아낸 모양이었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볼을 손등으로 닦은 남윤이 최종원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임상은.”

최종원의 눈이 빠질 듯이 커졌다. 머릿속에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사람을 깔보듯이 바라보는 얼굴이 하나 그려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다. 아픈 줄도 모르고 최종원이 주먹을 힘껏 쥐었다.

“죽여버릴 거야!”

가감 없이 최종원은 분노를 표현하였다.

흥분한 최종원의 팔을 남윤이 꼭 잡았다.

“제발, 너까지 날 떠나지 마.”

애원 섞인 남윤의 말에 최종원이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된 최종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남윤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최종원에게 친구를 만들어준 사람 또한 남윤이었다. 더는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 죽고 싶었을 때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남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