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재회

황금빛 햇살이 작은 창을 통해 방 안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좁은 방 안이 금세 황금빛으로 가득하였다.

늦잠을 자는 연을 깨우려는 듯이 햇살이 얼굴 위로 너울졌다. 머지않아 잠이 깨기 시작한 연은 눈살부터 찡그리고 보았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뱃속에서는 거대한 풍랑이 일었다. 젖은 행주의 물기를 짜는 것처럼 속이 뒤틀렸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배를 감싸고 상체를 일으켰다.

연은 한 번도 취하도록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하여 그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숙취로 인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심상치 않은 몸 상태에 연은 덜컥 겁이 났다. 독이라도 먹은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

선량한 저들이 제게 독을 먹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바마마께서 믿기에 저를 맡긴 자들이 아닌가.

불순한 생각이라는 것을 연은 잘 알았다. 그럼 대체 지금 자신은 왜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연은 멍한 머리로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연거푸 술을 들이켰던 기억이 번뜩 났다.

“술이 문제인가?”

숙취와 비슷한 증상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건 그렇고 방에는 어떻게 온 것이지?”

서영익과 함께 방에 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술 주전자가 텅 비어 갔던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뭔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연은 앉음새를 반듯하게 고쳤다. 명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을 감고 손을 가지런히 모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드문드문 순서가 뒤죽박죽인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반복하였다. 연은 그중에서도 한 가지 장면을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졌다.

열기를 식히러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넘어지면 아플 거라는 것과 동시에 창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몸에 숱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몸은 미운 일곱 살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마루의 나무표면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푸라기 하나 잡을 새도 없이 몸이 고꾸라졌다. 그때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아프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하였으며 아늑하기까지 하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검은 천을 펼쳐 놓은 듯한 하늘에 두 개의 별이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 그건 별이 아니라 남윤의 두 눈이었다. 남윤의 볼을 쓰다듬다가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말랑하면서도 적당한 온기가 연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 그 순간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녀의 턱을 잡고 제 입술 위로 가져왔다.

“왜 그랬을까?”

무의식이 반영된 꿈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입을 맞추기는 했을까?”

연이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만졌다. 남윤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해낸 생각이 그거라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이 한쪽 무릎을 세웠다. 엉덩이를 들고 반쯤 일어섰을 때였다.

“멀쩡한 딸자식을 사내 흉내나 내게 시키고.”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서영익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연은 겨우 빠져나온 혼돈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

“아저씨, 안에 계세요?”

백운재의 우렁찬 목소리가 마당에서부터 들려왔다.

남윤이 방문을 빼꼼 열었다.

“아버지는 나가시고 없어. 무슨 일이야?”

“그게 말이야.”

백운재가 힐끗 뒤를 보았다.

큰 키의 백운재에게 가려져 있던 사내가 얼핏 보였다. 챙이 넓은 갓을 쓰고 있는 사내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었다.

그런 탓에 이쪽에서는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도 백운재 못지않게 키가 컸다. 대충 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은 누가 봐도 연을 찾아온 사람 같았다. 신고 있는 가죽 신은 기름칠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그러나 백운재는 연이 아닌 서영익을 찾고 있었다.

떨떠름한 표정을 하며 남윤이 좁은 마루로 나왔다.

“이분이 아저씨를 찾으셔서 모시고 왔어.”

백운재가 옆으로 비켜서자 사내의 완벽한 모습이 남윤에게 잘 보였다.

사내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높게 떠오른 햇살이 사내의 얼굴에 깃들었다.

남윤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같은 얼굴의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얼굴을 어찌 잊겠는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연못에 빠져 정신이 없던 순간에도 뇌리에 강하게 각인 될 정도로 준수한 용모를 갖춘 사내였다.

그에게 입은 은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를 찾는 불온한 세력들에게서 구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그로 인해 지금도 팔자에 없는 사내를 흉내 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게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반가운 마음에 남윤이 버선발로 마당으로 내려갔다.

남윤을 알아본 사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그때 그 여인이 아니십니까.”

“저를 기억하십니까?”

도겸의 코앞까지 걸어간 남윤이 수줍은 기색으로 물었다.

“어찌 잊겠습니까. 별다른 소식이 없기에 무사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련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저를 도와주시고 나서 곤혹스럽지는 않으셨습니까?”

“다행히 아무도 제가 나선 것을 몰라서 괜찮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제가 도련님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남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깨에 지고 있던 많은 걱정 가운데 하나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런 차림이십니까?”

“그게 말하자면 조금 깁니다.”

남윤이 연이 있는 방을 한 번 보았다.

“남윤이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가만히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던 백운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남윤이 그런 백운재를 보았다.

“이분이 나를 구해주셨던 분이야.”

“몰라뵀습니다. 우리 남윤이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백운재가 허리를 아래로 깊숙이 숙이며 고마움을 전하였다.

도겸이 백운재와 남윤을 번갈아 보았다.

도겸과 눈이 마주친 남윤이 민망함에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남윤이 백운재의 옆구리를 슬쩍 손으로 찔렸다.

“왜?”

“네가 우리 부모님도 아니면서 도련님에게 인사는 왜 해.”

“왜긴. 훗날 내 색시가 될 너를 구해주셨으니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지.”

“색시?”

“그래, 색시. 아저씨께서 너랑 나랑 혼례를 시키시려는 것을 알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평소에는 혼례라느니, 장가라느니 따위의 이야기를 누가 꺼내기만 해도 몸 둘 바를 모르던 사람이 바로 백운재였다. 그런 백운재가 제 입으로 혼례나 색시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였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만큼이나 큰 변화였다.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몇 달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난 사내 앞에서 꺼낼 말은 아니었다.

남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백운재의 행동에 낯부끄러움을 느꼈다. 도겸의 얼굴을 바라볼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인이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을 했으나 도겸의 입안은 무척이나 썼다.

말을 달리는 내내 남윤과의 재회를 기대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난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 짝은 포악한 행동을 일삼는 임상은이 아닌 남윤일 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마음이 갔던 것일 수도 있었다.

하긴 이렇게 어여쁘고 착한 여인에게 정인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도겸은 아쉬운 마음을 곱게 접어 추억이라는 공간에 집어넣었다. 언젠가 다시 꺼내어 볼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마음대로 정하신 것입니다. 제 뜻과는 무관합니다.”

불거지는 씁쓸함을 남윤 몰래 누르고 있던 도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혼인은 제가 정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금 그 소리는 못 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엿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도겸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별안간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금 무슨 말을 했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남윤이 만족스러운 낯을 하고 능청을 떠는 도겸을 보았다.

백운재만이 홀로 똥이라도 씹은 얼굴을 하였다.

*****

왁자지껄한 소리에 연이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반가운 얼굴 하나가 마당에 보였다.

아직도 술이 덜 깬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연은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앞을 보았다. 술이 덜 깬 것도 아니었고 착각은 더더욱 아니었다.

반색하며 연이 좁은 마루 위를 걸었다.

문득 도겸이 바라보고 웃음 지는 사람에게 시선이 향하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면서 붉은 것이 잘 익은 복숭아 같은 볼을 가진 남윤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남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누가 보더라도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