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시작되는 인연

명색이 첫날밤.

긴장감이 엄습했다. 초조함은 덤이었다.

공식적인 세자빈이 된 하정은 두 눈 똑바로 뜬 채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세자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하릴없는 순간이 길게도 지나치니 급기야 숨조차 내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무거운 대례복도 힘겹거늘 익숙지 않는 머리장식 탓에 목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마치 시험에 든 양 참을성을 바라나 싶을 정도였다. 오기가 생겼다.

‘좋습니다. 얼마나 가나 보지요.’

하정은 허리를 피며 다소 여유 있게 세자를 눈여겼다. 무심한 공기에 촛불만 휘어졌다. 여전히 상황은 그대로였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다 말 못할 고통이 찾아왔다. 모아 얹은 발목이 시큰데다 못해 스리슬쩍 쥐가 올라온 탓이었다.

‘아이고, 발 저려.’

식은땀까지 났다. 그러나 먼저 손 내밀긴 죽기보다 싫으니, 옷자락 사이 꿈지럭, 주춤주춤. 소맷자락이 너울지며 발목을 향해 움직였다.

잠시 후, 조심스레 저린 발을 조물 거리자 저린 기운이 가셔지는가 싶었다. 겨우 한시름 놓았을까.

“큭.”

바람 소리가 났다. 찰나, 하정의 시선은 번쩍 들렸다. 세자가 보인 반응이란 예상을 넘어 비웃음조였다. 납폐도 없고 친영도 없는 가례를 치른 뒤 혼자 이곳에 들었다. 더욱이 멀찌감치 떨어진 것이나 진배없는 세자가 자신을 이리 대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보자보자하니 이젠 보자기 보다 못해 보이나 보지!’

더는 참기 싫었다. 하정은 되바라지거나 말거나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이보셔요. 세자 저하!”

강단 있는 음조였다. 감히 지엄한 세자에게 당당하게 외쳐대나 사실 떨리긴 했다. 그럼에도 이판사판 삼세판. 이왕 내뱉었으니 끝을 보자는 심산이었다.

하정은 어깨로 숨을 몰았다. 그리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마주한 세자는 드리운 그림자 사이 지독히도 빛났다.

“이미 가례를 올린 이상, 세자빈올시다.”

쩌렁쩌렁 살 피운 음색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하정의 들숨날숨이 머리꼭대기까지 치받았다. 겹겹이 걸친 옷자락을 거머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힘듭니다.”

명료한 제 음색은 더더욱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래, 힘들다. 이 곤궁한 처지가 심히 괴롭다. 여직 미동도 않는 세자, 그의 짙은 그림자가 자신을 바라봄에 몸서리치게 서럽고 성난다.

“무거운 장식 탓에 목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하정은 매듭진 허리께에 손을 올렸다. 일말의 손짓은 애틋했다.

“답답한 끈으로 인해 숨쉬기도 힘듭니다. 얼마나 더 벌 받듯 이리 있어야 하는지요.”

저도 모르게 속내를 내비친 하정, 다소 격한 적막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건…….”

스르륵 혀끝에 담기는 이름이 입 밖으로 끄집어졌다. 순간적으로 세자의 눈빛에 광채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하정은 느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저하!”

하정의 목청에 힘이 주어졌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 세자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렇지만 기막힌 말문이 먼저였다.

“그대는 손이 없는가, 발이 없는가.”

차갑기가 엄동설한 눈덩이 같은, 딱 세자다운 어조가 아닐 수 없었다.

합방을 위한 첫날밤, 촛대의 불꽃이 세자의 시린 기운에 파들거렸다. 더 없는 냉기였다. 그 냉담함이 허물어지려는 하정에게 옮겨졌다. 눈과 손에 힘이 주어지나 그에 반해 그녀의 어깨는 아래로 쳐졌다.

“지금 내외(內外)를 가릴 처지란 말이군요.”

“…….”

“아무리 이 처지를 자처했다손 치더라도 꼬리가 밝히면 꿈틀할 밖에요.”

꽤 당차게 일렀다. 여전히 세자의 그림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정은 아랫입술을 슬며시 물었다. 이젠 승부를 가려야 할 순간이라 여겼다. 하여 목청을 한결 여리게 낮췄다.

“이리 오래도록 무거운 옷자락에다 함지막한 머리장식을 걸친 채 옴짝달싹 못 하는 바 꼭 입으로 말씀 올려야 이해될는지요. 어찌 그리도 야박하시옵니까? 쇠막대 보다 못한 저하.”

대놓고 비웃으며 공략하니 그제야 세자가 꿈틀했다. 하정은 게서 멈추지 않았다.

“머리장식 좀 내려주사이다! 하고 관례대로 이 매듭도 풀어주사이다.”

하정의 외침은 눈물 반 오기 반이었다. 첫날밤 소박을 맞아도 상관없었다.

기세를 누르고 싶다. 절 못난이, 멍충이라 구박하는 못된 세자의 코를 아주 납작하게 내리 눌러 다신…….

그런데 생각도 못한 순간, 하정의 몸 위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언제 뽑혔는지 머리장식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어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육신이 뒤로 넘어가니 어느새 세자의 두 팔은 하정의 옆얼굴에 세워졌다. 거기다 세자의 숨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이 옷고름, 풀어 달라 했다. 맞느냐, 아니냐.”

분명 그랬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처럼 보료에 몸이 뉘어진 채 세자의 긴 손마디가 노골적으로 고름을 잡고 있는 것을 바란 건 결코 아니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에 반해 세자의 은밀한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를 적셨다.

“하면 기다 이거군. 그렇다니 내 빈궁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밖엔…….”

가까워지고 있는 세자의 눈빛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정의 전부를 덮으려 했다.

“김하정. 그러니 애초에 왜 그랬어.”

타박하듯 묻는다. 하정은 대답치 못했다. 일순, 벽의 한 면을 차지한 반월창으로부터 달빛이 들이찼다. 그 덕에 세자의 수려한 낯빛이 온전히 드러났다. 하정은 다른 의미로 숨 막혔다.

“고집불통 같으니.”

어찌나 달달한 음색인지, 하마터면 그의 품으로 득달같이 달려들 뻔했다. 그런 하정의 속을 알았는지 세자 진성 대군의 손끝이 그녀의 옷깃에 닿고 있었다.

대문에 걸린 등롱이 파닥대고 처마마다 드리운 유리등불도 달빛과 함께 빛을 뿜어내니, 지붕 위 샛별이 그에 질세라 한껏 빛을 머금었다. 성급하게도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샛별임에 분명했다.

#一. 상추잎에 맺힌 이슬

일 년전.

오랜 환란 뒤 천하가 태평하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우가 되는 오월동주라, 너른 대륙과 삼면을 바다로 둘러싼 이곳은 오래도록 화평이었다.

초가을. 왕비 안씨의 처소 화희전.

저녁 달 아래 어린 그림자가 드리웠다. 올해 열 넷인 진성대군이었다.

보다 의젓한 모습으로 대청에 올라서자 시립한 궁녀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진성대군은 그네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고하라.”

깎아놓은 옆선이 누구보다 두드러진다. 훤칠한 외향으로 말미암아 장래가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보이는 외향이 다는 아닌지라 시선 하나 돌리지 않은 채 엄하게 내뱉는 모습은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호기심 어린 신참 궁녀가 슬며시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날아오는 날벼락은 난데없었다.

“어딜 보는 게야! 감히!”

낮으나 매서운 고함이었다. 위엄이 그득한 음성에다 격한 호통이 뜻밖이라 심히 놀란 궁녀는 당장 머리를 조아렸다.

“그, 그것이…….”

“감히 뉘가 고개 들라 했더냐.”

“마, 마마…….”

“마마도 저마고 그리 못난 눈으로 함부로 담지 말라! 만일 다시 한 번 그 눈초리를 보였다간……충분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시선은 앞만 고정한 채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냉기가 흐르던지 겨우 시선 한 번 들었다고 모진 타박을 받은 궁녀는 억울한 듯 눈에 물기까지 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성대군은 열린 문으로 의젓하게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시립한 궁녀는 진성대군의 시린 타박에 훌쩍이는 신참 궁녀를 조용히 다독였다.

“진즉에 알려줘야 했는데. 있잖아. 앞으로 우리 진성대군께는 함부로 시선을 보내지 마.”

“그게 나도 모르게…….”

“알지. 그 마음. 절로 눈길이 가는 분이시니 어쩌겠어.”

“그러게요. 저절로 그냥…….”

“덧붙이자면 누구나 진성대군께 그런 타박을 받는다지. 냉하기 그지없는 성정에다 지독한 미를 숭상하시는 분이시니.”

“그게 무슨 뜻인지…….”

“우리 대군 마마의 눈에 아름답지 않으면 아름다운 게 아니니까. 우리 눈엔 그리도 단정한 미인인 궁녀 하나가 못난이라 불린 뒤 처소를 옮긴 경우도 있었어.”

“세상에. 그게 참말인가요?”

“쉿! 목소리 낮춰. 이건 암암리에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니 절대 새어나가면 아니 돼. 중전 마마께서 특별히 내리신 전교야.”

“내 그것도 모르고……하면 진성대군께옵선 그리 독특한 성향을 갖고 계신 게 참말인 게군요?”

“독특하시긴 하지. 유별날 정도니까. 모습 그대로 지독한 심미안의 소유자이신 고로 절대미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으시니 심지어 먹을거리조차도 눈에 차지 않으시면 입에 대시지 않으신다지. 의복이야 말해 뭐해. 동궁의 자리한 화초들은 어떻고. 색색 별로 눈에 거치적거리지 않는 것들만 심겨져 있는 것을.”

“아! 그래서 수라간, 소주방 궁인들과 침방 궁인들이 그토록 대군 마마를 어려워하…….”

“쉿. 뉘가 들을라.”

조근조근한 선배 궁녀의 설명에 그제야 이해가 된 신참 궁녀는 눈에서 물기를 거두며 보이는 것과 달리 더 없이 까다로운 진성대군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