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 바라고 염원하다, 희념(希念)

스산한 바람이 들이찼다.

누구도 먼저 입 여는 이 없었다. 김제남의 여식 보경이 눈에 쌍심지를 돋웠다.

“이게 누구시던가.”

여지없이 하정을 알아보았다.

“유생들과 대결 시 한판 벌렸던 악생 아니던가. 감히 중전 마마의 전각을 드나들 신분은 아닌 듯한데, 어인 걸음인지요.”

예의를 갖춘 태도이나 하정이 이 자리에 있음을 터무니없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 아랑곳없는 하정은 그저 말갛게 되물었다.

“누구……신지요?”

보경의 눈빛이 앙칼지게 올라갔다.

“날 모른다고요? 정녕 몰라요?”

날선 물음이 아닐 수 없었다. 하대하는 눈빛하며 가소롭다는 듯이 눈을 모로 뜨고 못마땅함을 여실히 드러내니 하정은 쌀쌀한 가운데 낮은 한숨을 삭혀야 했다.

‘왜 이리 잘난 위인들이 많단 말인가.’

안 그래도 궐에 든 것이 부담스러워 죽을 노릇인데 화려하기 짝이 없는 소저는 제가 누구냐고 반문한다.

“열린 입이 눈에 빤한데 왜 답을 못하죠? 알아요, 몰라요?”

유세와 앙칼짐이 보통 아닌 소저. 대체 왜 생판 모르는 이가 이리 트집을 잡는 겐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나마 왕비의 초대였기에 망정이지 눈앞의 소저처럼 반드시 알아봐야 하고 고개를 숙여야 할 존재들이 수두룩한 궐이라면 절대 드나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부담스럽기만 해.’

하정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외람되나 알지 못하나이다. 혹여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위치인지요.”

이번엔 하정이 되물었다. 그에 보경은 낮잡아 봄이 확연한 태도로서 턱 끝을 도도히 들었다.

“내 부친으로 말하자면…….”

순간, 하정의 입가에 쓴 웃음이 매달렸다.

“대답이 틀리셨네요.”

“뭐라고요?”

“스스로에 자신이 없는 모양이군요. 그쪽이 누구인지 물었을 뿐인데 부친의 위세를 내세우다니요.”

“이봐요!”

“김하정입니다. 아시다시피 악생이고요. 그쪽은요?”

하정은 보경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당차게 더 없이 화려한 보경에게 위축되지 않았다. 도리어 하정의 기세에 보경이 움츠러들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부친이 좌의정…….”

“그러니까 부친이 대단한 직급이라 드나드신다고요?”

정곡에 찔린 보경은 다시금 하정에게 다가섰다. 몇몇 내인들이 둘의 행태를 눈여기고 있었다. 그에 아랑곳없는 보경은 더더욱 언성을 높였다.

“시방 날 폄하하는 건가요?”

“폄하…라니요.”

“그게 아님 무슨 뜻이어요!”

“별 뜻은 없지요. 다만 대단한 부친의 직함이 소저와의 연관이 무슨 소용이기에 그리 상대를 무시해도 좋은 겐지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러합니다. 악생이라 하나 중전 마마께옵서 부르시어 당도함에 문제될 것이 있는지요?”

담담하니 제 처지를 밝힌 하정에 솔직히 보경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유생과의 한판승에 눈에 띄다 못해 빛났던 악생이 저와 동시에 왕비의 전각에 드나듦이 같잖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일단 보는 눈이 있음에 여기서 멈춰야 했다.

“알겠어요. 되었습니다.”

여전히 제 할 말만 한 보경은 대문을 지나치며 대기하고 있는 내인에게 일렀다.

“고해 주세요. 보경이라 합니다.”

어찌나 당당한지 내인은 보경을 먼저 안내했다. 그 다음 하정 차례.

“도와드리겠나이다.”

내인 중 하나가 하정이 등에 매고 품에 안은 악기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하정은 곱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하정의 의견을 수렴한 내인은 알겠다며 오르라 손짓했다.

“이리로 드시어요.”

내인의 안내에 너른 디딤돌에 낡은 신을 벗고 대청에 오른 하정은 앞서 걷고 있는 보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함께 들게 된 모양이야.’

낮게 들이마시는 숨이 보다 답답했다. 그런데 밖의 상황을 전혀 알 리 없는 왕비의 전각엔 앞선 방문객이 있었다.

“이리 반겨 주시어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차분하니 왕비에게 예를 보이는 지수. 홍문관 대제학에 오른 아비를 빌미로 당당히 왕비를 뵙고자 자리했다. 그것도 왕비에게 상소를 올린 직후의 지극한 방문이었다.

더욱이 상소문의 내용이란 세자빈 자격에 관한 것. 세자 독단으로 결정함에 훗날 내명부의 수장이자 일국의 국모를 정함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사안을 구구절절, 그간 왕실의 전례를 예로 들어 상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박 상궁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지수의 뒷모습을 눈여기며 왕비를 주시했다. 어디까지나 왕비는 중립을 유지하며 반겼다.

“손에 꼽을 우수한 유생이라 자자한 만큼 지수 소저가 올린 상소문에 흔들릴 지경이라오.”

“과찬이십니다. 중전 마마. 이 자리에 들게 해 주시어 감읍할 따름입니다.”

“내치다니. 그런……대제학으로 오른 대감께서 옥이야 금이야 지수 소저에 대한 칭찬을 하는 것을. 더욱이 상소 내용은 버릴 것이 없었고. 한데 그 날, 악생들과의 한판승이 벌어졌을 때 세자를 뵈었다고?”

“그렇사옵니다. 비록 먼발치이긴 하나 분명 저하셨습니다. 더욱이 악생의 차림. 유생으로 등청할 것을 알고 있었건만 단 한 번도 성균관에서 모습을 뵐 수 없었던 것이라 의문이었습니다.”

“그렇군. 하면 내 한 마디 하지요.”

“예, 중전 마마.”

“고깝게 듣지는 말아요. 악생으로 분한 세자를 빌미로 이 자리에 온 것에는 그다지 좋게 볼 수만은 없다지요. 그 점은 세자의 모후이기에 그러한 것이니 괜한 오해는 말고. 다만 한 치 앞을 내다보고 있는 세자의 행동에 트집 잡을 것이 아니라면 알은체 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행동이 아닐 터, 그 뜻이 무엇인지는 오직 세자만이 아시겠지요. 아니 그런가요.”

왕비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들여 준 왕비의 인심에 지수는 한시름 놓았다.

“……예. 유념하겠나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중전 마마. 알려 주사이다. 세자 저하의 결정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타당하다면 그 상대는 누구인지를요.”

지수는 다시 한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왕비의 안타까움이 담긴 한숨소리가 들렸다. 고개 든 지수는 잠시 떨리는 심정을 감내했다. 왕비는 혀를 끌끌 찼다. 충분히 봐주었단 의미였다.

“소저는 간과한 것이 있답니다.”

지수를 바라보는 왕비의 눈빛은 더는 자비롭지 않았다.

“그것이…무엇인지요.”

“소저는 너무 먼 미래를 보고 있어요. 또한 세자를 전혀 모르고 있고.”

“그, 그것이 어떤 뜻인지, 이해가 잘…….”

“그게 문제라니까. 세자 본인이 세자빈을 들이겠다는 것에 소저를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없음이라. 더욱이 우리 세자와 지수 소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바, 어찌 세자가 들이겠다는 빈에 대해 소상히 알려야 하는지요. 아니 그런가?”

날카롭고 냉엄했다. 그 와중 어디까지나 왕비는 상대를 위한 배려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야말로 지수가 올린 상소문이라든가 이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린 셈이기도 했다. 지수는 눈앞이 아찔했다.

아비가 대제학에 올랐음이 반가운 나머지 자신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쳐진 것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이왕 이 자리에 온 것, 용기를 내야 했다.

“하면 중전 마마. 혹여 세자빈에 오르려는 이가 좌의정 대감 댁 여식은 아니겠지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그녀는 보경에게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일말의 전말을 이해하게 된 왕비는 자연스레 미소를 덧붙였다.

“이런, 이런. 어찌 소문이 그리 났을꼬.”

“그 날, 유생 사이에 있던 좌의정 대감 댁 여식과도 만났나이다. 단성군 마마와 함께 있더이다. 하면……아니라는 말씀인지요?”

“그럴 리가요. 우리 세자의 심미안에 전혀 미치지 못한 고로 물론 아니지요.”

왕비는 보다 인심 좋게 깔끔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제야 지수도 안심한 모양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그때였다. 고(告)함이 있었다.

“중전 마마. 좌의정 대감댁 보경 소저 들어 있습니다.”

당사자였다. 지수는 당황했다. 그런데 고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고 악생 김하정 들어 있습니다.”

“무어라?”

왕비의 몸이 반쯤 들린 채 문을 향했다. 박 상궁이 다가왔다.

“중전 마마. 보경 소저의 기별은 있었사온데 하정 소저와 동시일 줄은…어찌 할까요…….”

우연치곤 참으로 고약하나 어떤 면에선 흥미진진하기도 했다. 왕비는 보다 미소를 담았다.

“아주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하필이면 그렇게 되었네요. 들라 이르리이까.”

“암, 들라 해야지.”

왕비가 허하자 박 상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지수는 당혹한 것이 여실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박 상궁이 밖을 향해 외쳤다.

“두 분, 들라 이르시게.”

그 즉시 두 개의 중문이 연달아 열렸다. 그리고 들어서는 인물들에게 모두의 시선은 집중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인 채 미동치 못한 지수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기운에 이곳에 든 것을 후회해야 했다.

그 즈음, 좌의정 김제남의 별저에는 소리 없이 스며들어 있는 인영들이 있었다.

환한 대낮이긴 하나 도리어 그것이 눈에 뜨이지 않았다. 내금위장 방의와 내금위 넷, 그리고 세자 진성대군이 그들이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방의의 염려에 세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내금위 셋과 함께 방의와 반대로 움직였다. 긴밀한 소식을 접한 직후였다.

내란을 꿈꾸고 있는 좌의정 대감과 홍문관 대제학 함안, 그리고 단성군과 모후인 숙빈의 집안에서 키우고 있는 사병들에 대해선 익히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런데 그들이 갖출 무기들이 큰 문제란 것이었다. 보기 드문 신무기로 살상력이 어마하여 더 없는 피를 불러올 것이란 정보가 그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확인, 증거까지도 확보해야 했다. 그러자면 명실 공히 세자가 직접 나서야 명분이 서는 바, 도합 여섯인 그들은 두건으로 감싼 채 눈만 내놓은 상태로 바람처럼 움직였다.

별저 한 편 곳간으로 보이는 맞은편에 멈췄다. 앞서 가던 내금위가 세자에게 손짓했다. 세자는 곳간 벽에 바짝 붙었다. 그 사이 내금위는 곳간을 잠근 열쇠를 파하여 문을 열었다. 조심스레 들어선 세자는 희미한 가운데 가득히 쌓아 올린 볏섬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