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춘풍화(春風花)

강가의 사위가 흐르는 달빛으로 환해졌다. 강물에 비치는 달빛은 조각이었다.

잘게 부서지는 그 달빛 아래 춤추듯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었다. 작은 아이였다.

아이는 달빛과 조우하며 출렁거렸다. 나부끼는 풍성한 머리칼, 곧고 긴 팔다리, 간혹 짓는 미소까지도 달빛에 반짝이니 빛의 후광이 들이찬 것 마냥 아름다운 풍경화에 스며든 그림처럼 우아하고 몽연했다.

연희는 풍경 속에 녹아 있는 아이를 보자마자 단숨에 얼이 빠졌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는 온데간데없어졌다. 대신 집채만 한 흰 호랑이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 왔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흰 호랑이, 백호가 혀를 내밀어 얼굴을 핥는 것에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도리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두 팔을 얼싸안아 포근히 안아 버렸다. 그 순간,

“헉!”

침상에서 곱게 잠을 자던 연희는 대차게 상체를 일으켜야 했다. 꿈인 것이다.

“부인, 무슨 일이오. 온통 땀이……부인?”

부군, 경천은 부인 연희를 보듬었다. 안 그래도 몸 약한 부인이건만.

“무슨 일이오. 혹여 어디 몸이 안 좋은 것은 아니요?”

“아녀요. 서방님. 그것이 아니라, 방금…태몽을 꾼 것 같나이다.”

“뭐라? 태몽? 그것이 분명하오?”

경천은 언성을 높였다. 그는 부인을 품에서 떼어내며 눈을 맞추었다. 연희는 부끄러운 듯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하고 기다리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경천은 부인을 얼싸 안았다.

“드디어 우리 부부에게도! 더 없이 기쁘오. 그래, 그 태몽이 무엇이었소?”

연희는 부군의 가슴에 기댄 채 생생하기 그지없던 꿈을 또박또박 입에 담았다.

“……어찌나 달빛이 아름답던 지요. 천상의 정원인 듯 더 없이 아름다운 곳에서 흰 호랑이가 내 품으로 들어왔나이다. 눈을 뜬 지금도 품에 있는 듯 너무도 생생합니다.”

부인의 꿈을 귀담아 듣던 경천은 소리도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있나! 나 역시 그래했다면 믿을 수 있겠소?”

“서방님?”

연희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경천은 여전히 감격에 겨워했다.

“들어보오. 나 역시 며칠 전에 흰 호랑이가 달려드는 꿈을 꾸었소. 하면 그게 태몽이었단 말이 구료!”

“세상에. 서방님께서도요!”

“그렇다니까. 흰 호랑이. 백호.”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을 잊지 못하였다. 같은 시기에 같은 꿈을 꾸다니. 그것도 영험한 백호, 이보다 더한 경사는 있을 수가 없었다. 연희는 눈에 물기까지 글썽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태기라 하늘이 아시고 최고의 아이를 점지해 주셨나 봅니다.”

“그런가 보오. 이제 여한이 없는 것 같으오.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이오.”

“서방님.”

한없는 애정으로 서로를 끌어안은 부부는 다시 한 번 태몽에 대한 감격을 나눴다. 다만 내일부터 경천은 큰일을 앞둔 만큼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기에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하니 내 없더라도 부인의 건강에 대해선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오.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인편에 서한을 보내시오. 알겠소?”

“걱정 마시어요. 늘 그렇듯 건강히 잘 기다리겠나이다.”

경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연희는 안심하라는 듯이 부군의 손을 다독였다. 경천 역시 부인의 손을 마주잡은 다음 아직 태도 나지 않는 그녀의 배에 듬직한 손을 올렸다.

“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서 돌아올 것이니…….”

“서방님. 아서요. 불길한 말씀일랑 마시옵고요. 한결같이 무사히 돌아오실 터이니 부디 몸 성히 잘 다녀오시어요.”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부군을 차분하게 보듬은 연희는 이윽고 나란히 침상에 몸을 뉘였다. 여전히 손과 손은 맞잡은 상태였다. 

연희는 눈을 감으며 꿈속의 아이를 그려보았다. 얼마나 기다리던 아가인가. 혼인한 이례 5년 만의 태기에다 영험한 흰 호랑이, 백호를 태몽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경천도 한껏 감격에 겨웠다. 이제야 가문의 어른들에게 면목이 선 것 같았다.

대대로 대장군을 역임한 현감공파 서가(徐家)의 후손인 경천은 경추국 좌부대장군으로써 요 근래 지나치게 위상을 세우고 있는 주현국과의 쟁탈전에서 이기고 돌아 올 것이라 마음먹었다. 더욱이 이번 임무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 역시도 대를 이어 대장군의 직위를 바로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경천은 자신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는 연희를 보았다. 또 다른 꿈이라도 꾸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천은 쉽사리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내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리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애정 하는 부인에게 맹세한 뒤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오밤중 하늘의 달빛은 유유하니 두 부부가 잠든 지붕 위에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

하늘하늘 옷자락이 넘실댄다. 소저는 강물 위를 춤추듯이 걷고 있었다. 환하게 미소 짓는 표정은 걸음걸이에서도 나타났다. 달빛이 반기며 소저와 함께 출렁거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풍성한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니 소저는 빛의 후광이 들이찬 것 신비하고 아름다웠다.

진(辰)은 다가갔다. 그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어깨를 틀었다. 그 순간, 달빛이 영롱하게 소저를 비추니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그마한 아이로 분했다.

‘넌 누구냐.’

저도 모르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답 없는 아이는 두 손을 내밀었다. 진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도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 순간, 사랑스런 아이는 온데간데없어졌다. 대신 집채만 한 흰 호랑이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흰 호랑이, 백호는 긴 꼬리로 그의 다리를 휘어 감으며 앞발을 그의 가슴에 턱 하니 올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백호는 가르릉 거리며 그의 얼굴을 핥기까지 했다.

기분 나빠야 옳았다. 그러나 사랑스럽기 그지없으니 그와 백호의 시선이 만났다. 찰나, 진은 빨려들 것만 같았다. 절로 숨결이 가빠지며 나지막한 신음이 흘렀다. 정말이지 백호의 눈빛은 홀릴 만큼 깊었다.

스스로 제어치 못하는 상황에서 잠시 눈을 깜박이자 놀랍게도 백호는 눈앞에 없었다. 대신 달빛아래 노닐던 소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진은 물을 도리밖에 없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대는……누구인가.’

그는 소저의 턱 끝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또한 소저의 등과 허리를 끌어당기며 그대로 입술을 밀어붙였다. 소저의 매끄러운 두 팔이 그의 목덜미를 부여안자 폭발일보 직전이 되고야 말았다. 열화가 들끓었다. 이토록 뜨거운 입맞춤은 난생 처음이었다.

인내심 따위 저 멀리 던진 그는 소저의 옷고름을 잡아당겼다. 서서히 떨어지는 옷자락, 그리고 달빛아래 드러난 눈부신 살결……. 당장 품에 안고자 움직이는 순간, 소저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안 돼!”

진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이곳이 어딘지 깨닫고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른 자신의 침전이 분명했다.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꿈이었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매끄럽기 그지없던 살결의 촉감이 생생했다. 또한 소저와의 뜨거운 입맞춤도. 안타까운 한숨을 들이마신 뒤 마른세수를 했다.

“그게 꿈이라니.”

그 달달했던 감각, 향기로운 체향까지 맡을 수 있었건만 어찌하여……. 분명 사실처럼 지극했다. 이처럼 꿈에 연연하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이미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잠시 후, 뿌연 새벽 미명이 되살아나는가 싶더니만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뒤를 이어 숨죽인 발소리들이 그의 침전 앞에 다다랐다.

“폐하. 기침 하시었는지요.”

읍이 들렸다. 뒤이어 그의 침상이 있는 곳까지 이어진 세 개의 중문이 연달아 열리며 마침내 침전의 문이 열렸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

몇 년 동안 이어진 황실의 후환으로 어지러운 정세를 버티고 있는 주현국.

건덕전의 위용 아래 대신들은 다소 조급한 발걸음으로 열을 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정전이나 상석에 자리해야 할 황제는 없었다. 대신 드높은 기개와 대담성으로 다음 대의 황제임을 확고히 하고 있는 둘째 황자 진이 한 단 아래에 자리했다. 황자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대신들을 하나하나 꿰뚫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대신들은 황자의 무거운 시선에 감히 시선을 들 수가 없었다. 머리를 조아린 대신들의 모습들이 절절했다. 그러나 황자 진은 쉽사리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다만 확인하고 있었다. 마치 검증하듯 신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충분히 심사숙고 한 만큼 결정을 내릴 시기이긴 합니다. 다만 말씀들을 해야 나아갈 것인지 물러날 것인지 판단할 것입니다. 아니 그런지요.”

다소 진중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 분명 나아갈 길이라 하였소이다. 하니 마지막으로 그대들의 소관을 알고자 합니다.”

황자 진은 다시 한 번 나지막이 되물었다. 마침내 큰 결심이라도 한 양 우후죽순 대신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최고집정관인 승상 유술이 목청을 돋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