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늦었다. ''아직은 6월, 때 이른 열대야로 밤잠을 설친 준희의 투정으로 시작된 아침은 결국 지각으로 이어졌다. ''어린이집 버스를 놓친 탓에 직접 데려다 주고 출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출퇴근시간 지옥철이라 불리는 서울의 지하철을 타게 되면서 신경 쓴다고 차려입은 정장에 구김이 갔다. 수지는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몹시도 불편했다. ''정작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미모 때문에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아 타인의 시선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키 168에 48킬로. 허리까지 이어진 긴 생머리는 티 없이 하얀 얼굴이 아니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난히 긴 속눈썹은 말할 것도 없었다.''말 그대로 지옥철인 지하철을 뒤로하고 서둘러 사무실의 문을 열었을 때 먼저 유니폼을 갈아입은 동료들이 눈에 들어오고 대기 중인 환자들이 보였다.'수지는 개인 성형외과 병원의 간호사였다. 외모 지상주의를 반영하듯 손님은 나날이 늘어 그에 따라 병원도 증축을 해서 웬만한 2차 병원 수준이다.'서둘러 유니폼을 갈아입고 안내 데스크에 자릴 잡자마자 원장의 호출이 이어졌다. 살아 돌아오라는 동료 영인의 윙크를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원장실 문을 열었다.''인자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깔끔한 솜씨로 손님들에게 인기가 높은 최인수 원장은 수지에게 특별한 은인이자 존경의 대상이었다.''“수지가 어쩐 일로 지각을 다 했지? 혹시 준희가 아프기라도 한가?” '' 미안함이 묻어나는 물음에 수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어젯밤에 유난히 더웠잖아요. 준희가 열대야에 잠을 설치더니 아침부터 유난히 보채서 어린이집에 직접 데려다 주느라고요.” ''“음, 그놈 벌써 꾀가 느는 게로군. 그러고 보니 준희도 벌써 다섯 살 인가? 세월 참 빠르군.”''최 원장의 회상하는 듯한 아련한 목소리에 수지도 잠시 지난날을 생각했다.''''''절망을 헤매던 6년 전 겨울. 신년을 맞는 설렘으로 북적거리는 거리 속에서 열아홉을 바라보는 나이에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던 수지, 삶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의 끈을 놓으려 했던 수지가 죽음을 소망하며 달리는 차에 몸을 날렸을 때 어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삶의 무게가 주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그것도 정해진 운명처럼 선택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안식임을 어린 수지로선 알지 못했다. ''수지가 뛰어든 차는 바로 최 원장의 차였다. 반사 신경이 뛰어난 운전기사의 솜씨 덕에 가벼운 찰과상만으로 의식을 잃은 수지를 병원에 눕혀놓고 최 원장이 호통을 쳤다 .젊은 사람이 할 짓이 없어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느냐고, 그런 오기로 살기를 각오하면 못할 것이 없을 거라며 수지의 울음 섞인 사죄의 말에 더 이상 나무라진 않았지만 보호자를 대지 못하는 수지의 행동을 바라보다 망설이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쉴 곳을 마련해 주신 고마우신 분이었다. 탈진 상태였던 수지는 최 원장이 이끄는 대로 군말 없이 따랐다. 타인의 손길이 이렇듯 따뜻함을 미처 알지 못했던 수지로선 최 원장의 인자한 얼굴에서 한 가닥 희망을 붙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훗날 안 일이지만 사람 좋게 생기신 사모님이 그 당시에 자신을 원장님이 실수로 낳은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다음날, 눈을 떠 보니 낯선 침대에 연 보랏빛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고 있었다. 낯선 곳, 낯선 침대……. 주마등처럼 지난밤의 일이 떠오르면서 민망함과 당혹감에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 가만히 문이 열리며 어젯밤에 본 중년의 남자와 인자한 미소를 지으신 아주머님이 들어오셨다.''정신이 든 그녀를 보던 두 내외가 물었다.''“정신이 좀 들어?”''“간밤엔 서로 정신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이 양반한테 사정 설명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죄송합니다.”''“그런 말 듣자는 건 아니고, 이름이 수지라고?”''“네.”''“밤새 생각해 봤는데, 수지양도 사연이 있는 것 같고 하니 여기서 한동안 지내면서 나중 일을 생각 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그리고 어디 연락할 사람이라도 있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거야. 전화부터 해 줘.”''문득 준혁이 떠올랐다. 일순 수지의 몸이 뜨거워지다, 급속히 얼어버렸다. 이제는 절대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절대로. 수지는 눈을 감아 버리고 고개를 저었다.''“아뇨.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요.”''“저런, 그럼 그냥 우리와 지내자. 우리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다 보니 수지양을 그냥 이대로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우리에게도 수지양보다 네 살 위인 쌍둥이 남매가 있거든. 지금 아들 녀석은 군대에 가고, 딸 희수는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서 마침 집이 적적하던 참이었는데.”''“저를 어찌 믿으시고.”''“후훗, 이 나이가 되면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좀 생기거든.”''“그래요. 부담 갖지 말고 한동안 우리랑 생활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도록 해요.”''“흐흑, 흐흐 흑…….”''“저런, 저런.”''가만히 안아주시는 사모님의 품은 수지에게 삶의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