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정장을 빼입은 시은이 포토폴리오를 가득 안고 집을 나선다. 가방에서 열쇠를 찾으려 뒤적이는 데 잘 찾아지지 않는다. 이러다 면접에 늦기라도 할까봐 시은의 손놀림이 더 다급해진다. 한 손 가득 든 포토 폴리오 파일더미 때문에 더욱 찾기가 수월치 않다. 아씨.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예쁜 아가씨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오면 안 되지.”''그때 포토폴리오를 든 손이 가벼워지는 가 싶더니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얼마 전에 본 옆집에 산다던 그 남자다.''“내가 들어 줄 테니까 천천히 찾아봐.”''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시은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 네. 고마워요.”''시은은 가방을 열어 제대로 열쇠를 찾기 시작한다. 열쇠는 가방 제일 안쪽에 들어 있었다. 아, 여기 있다. 시은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 나왔다. 조만간 열쇠고리라도 하나 제대로 된 걸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열쇠를 꺼내 문을 잠갔다.''“고마워요. 이제 주세요.”''문을 잠근 시은이 몸을 돌려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 가는 길?”''남자가 시은에게 파일더미를 줄 생각은 않고 물었다.''“면접 보러요. 늦었는데 좀 빨리 주시면 안 될까요?”''그런 남자의 태도에 시은이 짜증스레 대꾸하며 남자에게서 파일을 재촉한다.''“늦었나본데 데려다 줄게. 마침 할 일도 없고.”''남자가 그런 시은의 태도에 씩 웃으며 시은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뒤돌아 앞장선다.''“저기요!”''그런 남자의 태도에 시은이 황당하다는 듯 남자를 불렀다.''“늦었다며. 빨리 오지 그래?”''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몸을 돌려 시은을 보며 말한다. 시은이 무겁게 들고 있던 포토폴리오를 가볍게 들고는 흔들기까지 하며. 그 여유로운 모습에 시은이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그의 뒤를 따라간다. 어쨌든 면접에 늦으면 안 되니까.'' ''“여기야?”''남자가 한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우며 물었다. 의외였다. 가벼워보이던 이 남자는 제대로 된 그것도 꽤 좋은 중형차를 가지고 있었다. 직장인인가? 평일인 오늘 할 일이 없다는 걸 보니 그냥 부모님이 부자인 백수인가? 순간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 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은이 고개를 두어 번 흔들어 생각을 떨쳐낸다.''“네 여기에요. 감사합니다.”''시은이 남자에게 대답하곤 포토 폴리오 파일을 안고 차에서 내리기 위해 차 문을 열었다.''“이거 참 당황스럽네.”''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남자의 말에 시은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본다. 무슨 말이냐는 듯 한 표정의 시은을 보며 남자가 웃는다.''“운명이라는 거 믿어?”''“네?”''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시은이 물었다. 이상한 남자다. 갑작스레 모르는 사람에게 친한 척하며 구는 것부터 갑작스러운 이상한 소리까지 해대는.''“난 운명 따위 안 믿는 주의거든? 근데 이러면 어쩐지 믿고 싶어진단 말이야?”''남자의 말에 시은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 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운명이라니. 나이 꽤나 먹은 남자 입에서 나온 소리 치고는 낯간지럽다.''“이 승후.”''차에서 내리는 시은에게 남자가 말했다. 시은이 무슨 소린가 싶어서 창문을 통해 남자를 본다.''“내 이름이야. 그　쪽은?”''남자가 시은에게 웃으며 물었다. 개구쟁이 같은 장난기 어린 그 미소가 어쩐지 낯익었다. ''“유시은이에요.”''시은이 이렇게 말하곤 가벼운 목례로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건물 안으로 빠르게 들어간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어 조금은 불안한 그 걸음걸이를 바라보며 승후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커다란 도로의 소음에 묻혀 버린다. 웃음기 띈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승후가 차를 출발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