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의 이름

이른 아침부터 라디오국의 분위기는 분주했다. CD와 책이 잔뜩 쌓여 늘 정신없던 책상들이 깔끔하게 치워진 사무실, 그 안의 모두가 들떠있는 느낌이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인다. 나는 조금 민망해 고개를 떨궜다. 후배 진영이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오더니, 내 팔을 부여잡으며 한껏 반짝이는 표정과 높은 목소리로 묻는다.

“언니, 언니. 있잖아요. 이따가 저희 국장실 앞에 구경 가도 돼요? 막 우르르 몰려가서 구경하면, 우리… 너무 없어 보이나?”

나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뭐 어때. 그런 반응에 익숙한 사람일 텐데.”

“언니, 고마워요, 그럼 살짝만 가서 볼게요?”

한껏 신난 진영을 뒤로하고, 김 피디님에게 향했다.

“저 왔어요.”

피디님은 어제도 잠을 못 잔 듯,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다.

“어…! 디제이도 거의 다 온 것 같아. 오늘은… 가볍게 인사만 하러 오는 거니까… 국장님한테 인사시키고, 대충 구성표 보면서 잠깐 얘기하고 보냅시다.”

“네.”

멀리서 우리 팀 서브 작가 다은이가 자리에서 삐죽 일어선 채, 미어캣처럼 초조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내 피디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정현의 매니저다.

“네, 10층 국장실로 오세요. 지수 씨, 가자. 도착했대.”

-

며칠 만에 다시 본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그는 반갑게 국장님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고,

“어! 우리의 새로운 디제이! 우리 가족! 환영해!”

국장님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영광이네, 우리 채널을 선택해주다니, 앞으로 잘 부탁할게. 필요한 거, 의견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얘기해요, 내가 정현 씨한테는 무조건 전격적으로 지원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국장실의 한쪽은 통유리. 피디들, 작가들 할 것 없이 몰려와있는 바람에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그를 구경하는 소리가 새어들었다.

“진짜 정현이다…! 어떡해.”

“드라마보다 실물이 낫다….”

“지수 언니… 너무 부러워….”

그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당황해 그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반갑다는 듯 살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작가들이, 자동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꺄!”

새 DJ의 이름은 정현.

나는 이번 프로그램 기획안을 작성하며, DJ 소개란에 이렇게 적었다.

정현.

본명 이현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신인 배우.

모델 출신으로 다양한 화보를 통해 얼굴을 알리다가, 우연한 계기로 단편 영화에 출연해 연기자로 데뷔. 

이후 지상파 하이틴 드라마 주연을 맡아 아이돌 급 인기를 얻었으며 최근, 케이블 로맨스 드라마에서 지고지순한 순정을 지닌 서브 남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함. 2030 여성들의 사랑을 넘어 4050 여심까지 빼앗아버림.

단정한 외모에 예의 바른 성격, 지적인 이미지까지. 대단한 매력으로 출연작들을 연속 히트시킨.

여성 팬, 광고주, 방송관계자들이 모두 사랑하는 남자.

올해 최고의 유망주.

그런 그의 등장으로 일순간, 10층 라디오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했다. 모두가 기대에 차 있었고, 모두의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한 사람, 나만 빼고.

그는 김 피디님과 나란히 국장님 옆 소파에 앉았고, 나는 멀찍이 선 채였다. 국장님은 그에게 다정하게 이런저런 얘길 건넸다.

“우리 김도원 피디, 라디오국의 인재지… 생긴 대로 성격 깔끔하고, 매너 좋은 사람이니까 서로 대화 잘될 거야. 감각도 있고. 뭐든 정현 씨가 원하는 거 잘 만들어줄 거야. 서로 마음 잘 맞춰보라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지수 작가… 우리 지수 작가가 메인치고 좀 어린 편이야. 그런데, 실력은 어리지 않아. 잘 알고 있죠?”

“네.”

국장님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너무나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정현 씨, 그냥, 내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왜 그렇게 지수 작가를 고집한 거야? 아… 나, 지수 작가가 이 중요한 타이밍에 일 그만두고 쉬고 싶다고 해서… 설득하느라 엄청 고생했잖아… 알아요?”

“예, 들었습니다.”

“우리 JBC에 좋은 작가님들 많이 계신데… 정현 씨가 지수 작가가 메인 맡는 조건으로 프로그램 맡는다고 해서… 지수 작가 아니면 안 한다고… 너무 강력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내가 좀 난감했네.”

국장님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질문을 이었다.

“뭐…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어떻게… 둘이 어디서 같이 작품 해본 사이인가?”

국장님의 질문에 모두의 귀가 집중됐다. 지난 얼마간, 그 질문은 10층에서 일하는 모두의 뜨거운 관심사였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동할 때 라디오 자주 들었거든요. 지원 선배님 방송 항상 들었는데, 이 작가님이 쓰신 대본이 늘 좋았습니다.”

나는 그 대답에 말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럴 리가. 네가 내 글 때문에 나를 선택했을 리가.

하지만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국장님은 너무나 좋아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 <우리가 닿는 시간> 계속 들었던 거야? 아주 인연이네.”

그의 대답에, 국장님의 열정이 배가된 느낌이었다.

“아무튼, 지수 작가가 맡아준다고 해서, 지수 작가한테도 너무 고맙지 뭐야. 내가 아주 어렵게 두 사람 맺었으니, 최고의 시너지 기대해도 되지?”

국장님의 말에, 그는 쑥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확인한 국장님은 내 쪽을 쳐다보며, 다시 한번 확인하듯 물었다.

“지수 작가, 기대해도 되지?”

“네….”

내 작은 목소리에, 국장님은 벌떡 일어서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둘이 인사는 제대로 한 거야? 왜 이렇게 내외해? 지수 작가. 왜 멀찍이 서 있어. 이리 가까이 와.”

“네….”

“지난주에 미팅 했다며, 그때 얘기 좀 했을 거 아냐.”

“네, 대충… 컨셉이랑 얘기 나눴어요.”

“그래, 그래, 둘이 얼른 친해져, 라디오는 원래 스텝들끼리 가족처럼 지내야 해, 알지? 워낙 자주 만나니까, 가족보다 더 가까워지는 사이라고. 그리고 빨리 친해져야 정현 씨 스타일에 딱 맞는 글이 나와. 얼른 서로 편해지도록 해. 지수 작가 이리 와, 얼른! 얼른 와서 악수해.”

국장님의 재촉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바라보는 눈이 많으니 싫다고 할 수도 없다. 마지못해 다가갔더니, 그는 날 향해 일어섰다. 그러더니 가볍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어쩌지 못해 가만히 서 있는데, 그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순간, 심장이 아래로 떨어져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예전엔, 늘… 내가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던.

어딜 가든 항상 꼭 잡고 다니던 손.

언제나, 먼저 다가와 내 손을 꼭 감싸던 그의 온기.

그 온기가 그대로….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동그랗고 짙은 눈동자.

내가 살며, 가장 깊게 들여다본 타인의 눈동자였던….

내겐 너무나 익숙한… 지난 7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너무나 그리웠던 눈빛.

그 전까지 냉정을 유지하던 나였는데. 그가 손을 잡는 순간,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을 놓고 평온하게 표정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