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기 전 엘리어트의 시를 읽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라윤은 핸들을 잡고서 한동안 하늘에 대고 정신없이 기도를 했다. 방금 전 받은 둔탁한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 아직도 갈비뼈 근처가 얼얼했다. 하필이면 이렇게 바쁜 때 접촉 사고가 날 것은 무어란 말인가. 매장을 둘러보고 한시라도 빨리 보고를 올려야 했다.'“엘리어트 씨. 지금은 4월이 맞지만 여기는 황무지가 아니라 대도시거든요.”'라윤은 깊이 호흡을 들이마시고 핸들에 납작하게 붙이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겨우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 접전을 벌여야 할 차례이다. 뒤따라온 차에 들이받힌 운수 나쁜 운전자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잔뜩 약이 오른 상태일 것이니 몸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라윤은 천천히 차문을 열었다.'“이봐요! 눈을 어디다가 두고 운전을 하는 겁니까!”'‘이크!’'아니나 다를까 문을 열자마자 기차 화통과도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일순간 기가 죽은 라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잠시 반성하는 기미를 보인 그녀는 살짝 눈을 떠서 차 주인의 상황을 살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남자의 얼굴은 터져 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도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에,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히는 스타일의 평범한 일반 시민 같아 다행이었다. 일전에 그녀의 친구 채경이 깍두기 머리를 한 덩치 좋은 아저씨의 차를 들이받았다. 깍두기 아저씨는 그 접촉사고를 운명의 장난으로 여겼는지 열렬한 구애를 해 왔고 채경은 그를 따돌리느라 진을 빼야 했다. '‘혹시 이 남자도?’'남자는 보통 기준으로 봤을 때 괜찮은 생김새였고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주로 우연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그런 로맨틱한 상상에 빠져 있는데,'“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남의 차를 들이받은 거냐고요!”'라윤의 발칙한 상상을 알 리가 없는 상대 남자는 자신의 차 후미를 험악하게 노려보며 소리만 치고 있었다. 라윤의 입술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몽상에 갇혀 살다가 피 본 적이 한두 번이니?’'라윤은 이 긴박한 상황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의 세계에 빠진 자신에게 혀를 내두르고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남자는 과연 견적이 얼마나 나올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혼수상태에 빠진 듯 근심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지금 그게 말이 됩니까? 운전 중에 다른 생각이라니요! 이러니 여자들이 운전하면 욕을 얻어먹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도 집에서 솥뚜껑 운전이라도 하라고 하면 대단한 모욕을 받은 양 발끈하기나 하고, 내 참. 여자는 공간 감각이 남자보다 덜해서 운전에 서투르다는 걸 당최 인정하질 않으니.”'‘근데 가만있어 봐. 듣자듣자 하니 이 남자 뭐니?’'“이봐요. 말이 심하잖아요.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고, 물론 차가 상한 건 속상하겠지만 찌그러진 곳이야 고치면 될 거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