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암자 안에서 죽심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꺄악!”'화들짝 놀란 희원은 걸음을 빨리하여 열린 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죽심아!”'“아기씨…….”'제일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눈물 맺힌 죽심의 축 처진 눈이었다. 그리고 죽심의 턱 밑에 깔린 날 선 검, 이어 검을 움켜쥔 커다란 손과 그 손의 주인인 반라의 사내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탄탄한 상체를 드러낸 남자는 6척을 훌쩍 넘는 장신이었다. 사내다운 턱 선에 우뚝 선 콧날을 사이에 두고 얇게 쌍꺼풀 진 눈매는 흡사 먹이를 눈앞에 둔 매의 눈처럼 날카로웠다. 못마땅한 감정이 역력히 드러난 남자의 비틀린 입매와 분노 서린 눈빛에 희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분이 바로 세자저하!’'한발 늦게 따라온 돌백이 놀란 눈으로 다가오자 희원은 그제야 세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나서려는 돌백을 말렸다.'“뒤로 물러나거라.”'“하오나…….”'“괜찮으니 뒤로 물러나.”'돌백이 하는 수 없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자 검을 든 세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누구냐? 누군데 허락도 없이 이곳에 발을 들인 것이냐?”'생긴 것만큼이나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였다. '희원은 고개를 돌린 채 땅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우선 그 검부터 치워 주시지요.”'희원의 말에 검날이 죽심이의 목젖에 더욱 가까워졌다.'“질문도 부탁도 사절이다.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내 질의에 답하는 것뿐이다.”'“에구머니나! 아, 아기씨…….”'세자의 드센 모습에 희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세자저하를 너무 우습게보았다. 사흘 정도면 충분히 낙담하여 진노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대로라면 사흘이 아니라 달포가 지나도 그대로일 것 같았다. '“반가의 여인이라 함부로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함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묻고자 하심에 부족할지는 모르나 저는 근방에 살고 있으며 아프신 어머니를 위해 백일기도를 드리러 왔습니다.”'“백일기도……. 산속에 파묻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작은 암자에, 그것도 묵언수행을 하는 땡중 둘밖에 없는 이런 초라하고 볼품없는 암자에 백일기도라…….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말이냐?”'예리한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 말에 말려든다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와 그럴 순 없었다. '희원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고개를 숙였다. '“어이하여 소녀를 의심하시는지 모르겠으나, 반가의 여인이 백일기도를 드릴 수 있을 만한 곳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암자에 불과하나 기도를 드리는 마음은 매한가지니 어찌 절의 크기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따박따박 말대답을 잘도 하는구나.”'“묻는 말에 대답하라 하신 것은 도령이십니다. 이제 검을 거두어 주시지요.”'“검을 거두어 줄 테니 당장 이곳을 떠나라. 이곳은 달포간 내가 쓸 것이다.”'“소녀, 이미 이곳의 스님들께 허락을 받아 놓고 들어온 것입니다. 반년이 넘게 준비하여 온 것을 도령의 억지 때문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지금…… 억지라 하였느냐?”'“그렇습니다. 도령은 주인 없는 절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주인 행세를 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힘없는 여인에게 칼끝을 겨누어 겁박부터 하시니 이를 억지라 하지 않으면 무어라 칭하겠습니까?”'죽심의 목을 겨냥한 검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하지만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다.'“아녀자가 사사로이 절을 찾는 건 국법으로 금지된 일이다. 그러니 돌아가라.”'희원도 물러서지 않았다.'“숭유억불(崇儒抑佛)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미 이 나라에 깊게 뿌리내린 신앙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백성들은 부처님을 보기 위해 절을 찾진 않습니다. 힘든 고비를 이겨내고자 혹은 닥쳐올 고비를 극복하고자 위안을 받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찾는 이가 더 많습니다. 악의 없는 그 행동마저 국법으로 다스린다면 이 나라 백성은 물론이요, 아녀자인 저도, 아녀자에게 검을 겨누고 나가라 엄포를 놓는 도령 역시 죄의 무게가 같지 않겠습니까?”'명의 눈썹이 비틀렸다. 억지라는 말을 들은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막힘없이 말대답을 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계집 따위가 날 훈계하려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