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운이 좋았다.
오로지 아이돌 스플릿 세컨드(split second)의 멤버 규형을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예주는 비타 엔터테인먼트에 이력서를 지원했다. 취직에 대한 간절함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면접을 보면서도 쉽게 합격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접을 보고 난 일주일 후, 새로 나온 공식 굿즈를 주문하고 어제의 음악 방송을 복습하고 있던 예주는 비타 엔터테인먼트로부터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세상에……, 진짜 됐어.’
유일한 덕질 동기, 고등학교 동창, 그리고 룸메이트까지 맡고 있는 희진과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비타 엔터테인먼트에서 잡일이라도 하고 싶다. 하루 종일 복사만 해도 좋으니 사무실에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은 볼 거 아냐.”
“쭈, 난 이미 취직해서 글렀으니 너한테 희망을 걸게.”
“그래, 열심히 응원해 줘.”
그런데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막상 합격을 통보받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곧 현실을 깨닫고 예주는 집 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어찌 될지 모른다. 첫 월급을 타기 전까진 비밀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희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희진아! 완전 대박 사건.”
-왜, 왜. 무슨 일 생겼어?
“어, 진짜 깜짝 놀랄만한 일이 생겼어. 들으면 기절할지도 몰라.”
-길 가다 남규형이라도 봤냐?
“볼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비타 엔터에 취직됐어.”
-……대박.
뒤이어 휴대폰 너머로 희진의 환호성이 들렸다. 마치 돌고래가 인사하는 것 같은 높은 소리였다.
-웬일이야 이게. 이건 만나서 축하해야 돼. 이렇게 전화로 할 게 아니야.
“오늘 일찍 올 거야?”
-당연하지. 칼퇴하고 갈게.
“알았어, 그럼 시간 맞춰서 먹을 거 시켜 놓을게.”
-응, 이따 봐.
통화를 마친 예주는 차근차근 할 일을 생각했다. 먼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가게에 전화를 해야 했다. 취직을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할 생각을 하니 짜릿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리고 출근할 때 무엇을 준비해 가야 하는지 리스트도 작성했다.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첫 출근에 무얼 준비해야 하는지 자세히 몰랐지만, 나머지는 이따 희진이 오면 물어볼 셈이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희진의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다. 거기엔 예주를 위한 알코올 함량 3%의 맥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켜 놓은 음식을 차리며 거실에 자리 잡은 둘은 “짠!”하고 캔을 부딪치며 예주의 취직을 축하했다.
“이렇게 좋은 날 우리 아가들을 안 볼 수야 없지. 얼른 틀어 봐.”
“어제 음방 나왔던 것 한 번 더 보자. 코디 미쳤어. 애들 완전 왕자님 만들어 놨잖아.”
TV 안에 여섯 명의 스플릿 세컨드가 등장했고 예주의 눈은 규형에게, 희진의 눈은 태양에게 고정되었다. 같은 그룹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멤버를 좋아한다는 게 어쩌면 다행이었다. 4분여의 시간이 지나고 TV 화면이 멈추자 희진과 예주는 멈췄던 손을 움직여 목을 축였다.
“아……, 쭈. 벌써부터 부러워.”
“출근 첫날 우리 규형이 만나면 어떡하지?”
“생각해 봐. 네가 신입이라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처리해야 할 잔업도 많아서 야근을 하고 있어. 다 퇴근하고 불 꺼진 사무실에 너 혼자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규형이가 들어오는 거야.”
“어우야!”
“규형이가 혼자 일하는 널 보고 말을 거는 거지. ‘새로 오셨나 봐요?’ 하고.”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냥 ‘네.’라고 하면 되나?”
“아니지, 누구냐고 물어봐야지. 그러면 규형이가 ‘날 모르고 있다니,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고 하면서 너에게 관심을 보이겠지. 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친구야. 진심으로 널 응원한다.”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마시며 희진과 예주는 남은 캔을 홀짝거렸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예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바탕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결혼까지 끝낸 둘은 정신을 차리고 현실적인 얘기를 나누었다.
“첫날 뭐뭐 챙겨 가야 하지? 칫솔이랑 치약, 필기도구, 휴지, 텀블러, 슬리퍼. 달력…….”
“이사 가? 첫날 뭘 그렇게 많이 챙겨 가려고 해.”
“그래도.”
“일단은 칫솔, 치약, 수첩, 펜 정도만 가져가. 나머지는 회사 분위기 보고 차차 가져가면 되고. 필기도구나 달력 같은 건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경우가 많고, 슬리퍼는 사무실에 신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먼저 파악하고 가져가. 의외로 좀 빡빡한 분위기의 사무실들도 있거든. 그리고 텀블러는…… 첫날 가져가도 쓸 일이 거의 없을 거야. 대부분 첫 출근이라고 같은 부서 사람들이 마실 것을 많이 사주거든. 그리고 탕비실 있을 테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나 너무 떨려.”
“알아서 잘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첫날부터 전화받으라고 하면 어쩌지?”
“교육도 안 시키고 첫날부터 전화받으라고 하는 회사는 양아치나 다름없지만. 그렇게 어려워 할 건 없어. 들은 대로 메모하고 담당자 통해서 다시 연락 주겠다고 하면 돼.”
희진은 대학교 졸업을 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취직을 해서 사회생활에 있어선 예주보다 선배였다. 지금 예주에겐 희진의 말이 진리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다독여 주는 희진이 고마워 예주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을 건넸다.
“희진아, 내가 첫 월급 타면 꼭 빨간 내복 사줄게.”
“레이스 없으면 거절할 거야.”
“응, 레이스 화려한 걸로 사줄게.”
***
일주일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출근을 위해 옷 몇 벌을 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며 예쁜 구두도 하나 장만했다.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 놓았던 돈이 아깝기도 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면 투자할 수 있었다.
준비한 것들을 챙겨 입고 단정한 모습으로 비타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예주가 도착한 곳은 2층에 위치한 인사과였다. 비타 엔터테인먼트는 내로라하는 대표 기획사는 아니었지만, 절대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 가수만 전담하는 것도 아니었고, 유명 배우 몇몇이 소속되어 있기도 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가수 파트, 정확히는 스플릿 세컨드와 관련된 부서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담당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후에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언젠가 TV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연예인을 보는 듯한 기분에 그가 왜 여기에 왔는지 눈치채지도 못했다.
“차예주 씨?”
“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난 홍수민 실장이에요.”
“네.”
TV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을 하고 싶긴 했지만, 긴장감에 쉽게 입이 떨어지진 않았다.
“예주 씨는 마케팅 부서에 지원하셨죠?”
“네.”
“음, 예상했을지 모르겠지만 배정 부서가 바뀌게 되었어요.”
“……네?”
“지금 급하게 매니저를 뽑아야 해서……. 혹시 매니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거절하셔도 돼요. 지원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거절하셔도 저희 쪽에서는 그 어떤 불이익도 주어지지 않을 거예요.”
막상 일하는 분야가 달라진다고 하니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어느 직장인과 같은 삶을 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매니저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예주를 보고 홍 실장을 말을 보탰다.
“일단 생각 좀 해볼래요?”
“매니저 일을 하게 되면 한 연예인만 쭈욱 맡아서 하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기간을 두고 로테이션이 되기도 하고……. 뭐, 해당 아티스트와 손발이 잘 맞는다고 하면 몇 년 동안 같이 할 수도 있고. 너무 힘들다고 하면 우리 쪽에서도 적당히 손을 써 주니까 그렇게 걱정하진 않아도 돼요.”
“아…, 그럼 해볼게요.”
예주는 당찬 얼굴로 홍 실장에게 말했다. 이건 순전히 욕심 때문이었다. 여기서 몇 년 동안 버티기만 하면 스플릿 세컨드의 매니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스플릿 세컨드는 아직 5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고, 적어도 몇 년만 버티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빠른 시간 내에 계산을 마치고 말을 건네자 홍 실장이 밝은 얼굴로 대답해 왔다.
미리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