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의아해하는 예주에게 도영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예주 씨, 예주 씨가 스플릿 세컨드 콘서트 가고 싶어 했죠? 그래서 나 몰래 촬영장까지 빠져나가 티켓팅 했다가 실패했다고 했죠?”

“네.”

“근데 실패한 게 내 탓이라고 했죠?”

“아니, 그거야 그때는…….”

“하여튼, 예주 씨가 가고 싶어 했고, 특히나 나 때문에 그랬다니까 미안해서 인맥을 이용해서라도 티켓을 구해 주고 싶었어요.”

“…….”

“원래 이런 거 남한테 부탁해 본 적 없는데……, 처음으로 용기 내서 규형이한테 부탁을 했어요. 너희 콘서트 티켓을 구할 수 있겠냐고. 금액은 모두 지불하겠다고 했어요.”

그 흐름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왜?’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일단은 조용히 도영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흔쾌히 규형이가 부탁을 들어줬어요. 조건이 하나 있었지만.”

“그 조건이 뭔데요?”

“…….”

“뭔데 그래요. 말을 해야 알죠.”

“이거 들으면 예주 씨 속상할 텐데.”

“괜찮아요. 속상해 봤자 뭐 얼마나 심하겠어요.”

“그럼 말할게요. 규형이가 다윤이를 좋아하는지 다윤이와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마련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콘서트 있기 전에 셋이서 자주 만났어요. 피곤해도 티켓을 받아야 하니까 규형이가 원하는 대로 해줬어요. 아까 홍 실장님이 보여준 사진들도 다 규형이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찍힌 걸 거예요.”

“아…….”

“홍 실장님한테는 그 얘기를 말할 수가 없어서 그냥 일이 있어서라고만 둘러댄 거고요. 여하튼 그렇게 다윤이까지 같이 온다는 조건으로 규형이한테 초대장 세 장을 받은 거예요.”

“…….”

“기분 별로죠? 예주 씨, 규형이 좋아한다면서요.”

굳이 따지자면 속상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규형을 이성의 상대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철저하게 아이돌로서의 규형을 좋아했기에 그의 사생활에 일일이 기분 상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이, 아무리 이성적인 감정으로 좋아하진 않는다고 해도 그 상대가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힘이 빠진다. 예주는 다윤이 심증으로 말했던 것만으로도 환상이 깨어져 나가는 것 같았는데 도영의 입으로 직접 듣는 순간, 환상이 깨지다 못해 바닥에 내쳐진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얘기했다.

“제가 뭐라고. 전 아이돌 남규형을 좋아하는 거지, 남자 남규형을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요?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 아니라 이거죠?”

반색을 하는 도영이 순간 얄미웠다. 속상해도 티를 못 내는 이 상황도 짜증이 나는데, 거기에 도영이 밝게 미소까지 지으니 더 짜증났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그래요.”

“예주 씨가 규형이 좋아하는 게 그런 감정이 아니라서요.”

“그게 배우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자 도영이 생글거리던 얼굴을 굳히고 다소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왜 상관이 없어요.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러니까 왜요.”

“왜라니요. 내가 예주 씨 좋아하니까 그런 거죠.”

“네에?”

뜬금없는 고백에 예주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이유를 묻거나 따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경황이 없어 예주는 도영에게 “아, 피곤해라. 배우님, 그럼 쉬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미쳤어, 미쳤어.”

예주는 오랜만에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그러나 현실을 깨달으라는 듯 꼬집힌 볼은 아프기만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예주는 그대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씻지 않은 게 생각났지만, 내일 아침에 씻으면 된다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빨리 잠들어 방금 들은 목소리를 잊고 싶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방에 들어온 이후로 벌써 두 시간도 넘게 지났는데 예주는 눈만 말똥말똥했다. 도영의 고백 때문에 놀란 마음이 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옆에 아무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희진이도 여기 데려올걸…….’

어릴 적 자다가 집에 불이 난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때 혼자 방에 갇혔었다. 깜깜한 방 안에서 새어 들어오는 연기가 끔찍해 한쪽 구석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되긴 했지만, 예주는 그날의 공포가 너무도 커 그 이후 혼자서 잠들지 못했다.

불이 켜진 방 안에서도 어디선가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에 예주는 잠근 문을 풀고,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어둠이 가득한 거실뿐이었다.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고 마음먹으며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무서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예주는 거실로 나가 불을 켜고 소파에 몸을 뉘었다. TV를 틀고, 들고 나온 이불을 덮으며 이대로 곯아떨어질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이렇게 며칠만 지난다면 어느 정도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걱정과 달리 예주는 리모컨을 든 손을 멈추지 못했다.

“예주 씨, 일어날 시간이에요.”

“으음…….”

“지금 안 일어나면 늦어요.”

코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예주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앞에 보이는 도영의 얼굴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배우님, 뭐 하시는 거예요.”

“아침이라서요. 예주 씨 여기서 자고 있길래 깨운 건데요.”

“아으.”

늦은 새벽에 겨우 잠든 것 같았는데 눈떠 보니 아침이다. 세 시간도 채 못 잔 것 같았다. 게다가 소파에서 잤더니 몸이 찌뿌둥해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왜 여기서 자고 있었어요.”

“밤에 잠이 안 와서 TV 좀 보다가 그냥 잠들었나 봐요.”

“어제 졸려서 일찍 들어간 거 아니었어요?”

“……자다가 깨서 그래요.”

“아아, 그럼 얼른 씻고 아침 먹어요. 토스트긴 하지만 그래도 먹는 게 든든하고 좋을 거예요.”

그제야 도영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얼른 씻어야 해서 예주는 화장실로 향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함께 차를 타고 나오면서도 도영은 예주에게 말을 걸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예주는 “아, XX해야 하는데.”, “배우님, XX하세요.”, “배우님, 이것부터 먼저요.” 하며 그가 말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예주로선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말을 붙이려던 도영은 스타일리스트인 조 실장이 합류하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그리고 호칭도 ‘예주 씨’에서 ‘예주 매니저님’으로 바뀌었다.

“예주 매니저님, 이 부분 맞는지 대본 확인 좀 해주세요.”

“네.”

도영이 넘겨주는 대본을 받으며 그의 앞에 앉았다. 가져온 의상들을 행거에 걸며 한참이나 바쁘게 움직이던 조 실장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도영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목소리를 낮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주 씨, 오늘 왜 그래요?”

“뭐가요.”

“평소랑 다르잖아요. 혹시 어제 내가 말한 것 때문에…….”

“아니요? 잠을 잘 못 자서 그래요. 소파에서 자서.”

그의 입에서 고백의 ‘고’ 자라도 튀어나올까 무서워 말을 가로채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도영이 뭐라 말을 이으려는 순간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다윤이 들어왔다. 다윤은 예주의 옆에 앉으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언니, 어제 소파에서 잤어요? 많이 피곤하겠다.”

“……들었어요?”

“네, 들어오는데 언니 목소리가 들렸어요. 힘들면 차에 가서 좀 쉬어요. 아니면 내 대기실 가서 잘래요? 우리 매니저 오빠한테 비워 달라고 하면 되는데.”

“아니에요. 배우님 대본 봐줘야죠.”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이렇게 착해서 어떡해요.”

그러면서 다윤은 도영에게도 한소리 했다.

“오빠, 진짜 이기적이네. 예주 언니가 이렇게 피곤해하는데 거기다 대고 대본 맞춰 달라고 하고. 혼자서 대본도 못 보냐?”

“넌 좀 빠져.”

“싫어. 심심하단 말이야.”

“네 매니저한테 놀아 달라고 해.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

“내 마음이다, 뭐.”

도영의 핀잔에도 다윤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러면서 예주에게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