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빙화궁의 아이

하얀 바둑돌을 움직이던 영보천존의 손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지략이 온몸을 긴장한 채로 서둘러 영보천존의 곁에서 사라졌다.

“누굴까?”

검은색 바둑돌을 내려놓지 않고 만지작거리며 태상노군이 툭 말 한마디를 던졌다. 침묵 속에서 돌을 내려놓는 소리만 나던 정적을 그가 깬 것이다.

“누가 감히 영보천존이 만들어 놓은 결계를 깨고 겁도 없이 들어왔을까 궁금해서 바둑에 집중이 안 되는데.”

태상노군은 기어이 검은색 돌을 다 내려놓아 버렸다. 영보천존은 한숨을 쉬며 흰색 돌을 내려놓았다. 그 궁금증에 대답이라도 하듯 지략이 연기와 함께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지략의 품엔 인간의 나이로 여섯, 일곱은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잠든 채 안겨 있었다. 아이의 옷을 보고 태상노군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빙화궁?”

아이의 옷은 빙화궁을 상징하는 어떠한 무늬도 없는 전통적인 하얀 복색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수련 신선의 표시인 오색 끈이 왼쪽 발목에 묶여 있었다.

어린 아이가 수련 신선이라니. 게다가 고작 수련 신선 주제에 영보천존의 결계를 어떻게 깨고 들어온 것일까? 신의 수발을 드는 허락된 궁인신선들 외에는 절대로 신들의 거주지인 대라천(大羅天)에 들어올 수 없었다.

영보천존이 매섭게 물었다.

“이 아이가 확실한 것이냐?”

“예.”

아이는 무거운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아랑곳 않고 세상 편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영보천존의 눈짓에 지략은 그가 앉아 있는 너른 바위에 조심스럽게 아이를 눕혔다.

“어디에 있었느냐?”

“상청(영보천존의 궁궐) 동굴에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아이는 너무도 깊게 자고 있어 깨우기라도 하면 울어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결계 밖을 살펴 보거라. 빙화궁 수련 신선 곁엔 항상 개인 호위가 따라 다닌다. 빙화궁 아이가 맞는다면 지금쯤 찾고 있을 것이다. 빙화궁의 호위가 맞는다하면 아이를 데려가라 하거라.”

“예.”

지략이 다시 사라지고 난 후, 태상노군은 신기한 듯 아이를 바라봤다.

“대라천(大羅天)에서 이런 아이를 본지가 오랜만이군. 정말 귀엽게 생겼네.”

태상노군은 아이를 오래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기어이 아이의 볼을 꼬집어보고 만지작거렸다. 그 바람에 아이가 꼼지락거리다가 둥글게 몸을 말며 영보천존의 곁으로 굴러와 멈추었다. 영보천존은 잠시 태상노군을 흘겨봤다. 아이를 내버려 두라는 뜻이었다. 솔직히 이런 아이를 본적이 없는지라 영보천존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뭐지 이 아이는?”

태상노군의 말대로 아이에게서는 답답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의 아이라면 신력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기도 없었다.

아이는 강아지 소리 같은 것을 내더니 더욱 영보천존의 옆으로 가까이 움직여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한기를 느끼는지 바르르 떨기도 했다. 새삼 넋을 잃고 보게 되는 순한 얼굴이었다.

“빙화궁의 아이들은 늘 그렇지 않았나? 신비로운 존재였고, 지금도 누가 어떻게 빙화궁의 아이가 되는지 아직도 비밀에 싸여 있으니까 말이야.”

영보천존은 겉옷을 벗어 아이를 덮어 주었다. 긴 속눈썹에 뽀얀 피부의 아이는 자꾸 눈을 잡아끌었다. 붉은 입술이 정말 작았다. 규칙적으로 숨을 쉴 때마다 얼굴로 쏟아져 내린 긴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빙화궁에서는 어떻게 나온 거지?”

태상노군은 작은 아이가 정말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의 허락이 없는 한 어떠한 신도 이 결계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데 작은 아이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결계 안으로 들어왔는지 그건 영보천존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화궁이 근래에 모습을 드러낸 지 꽤 되었지만 빙화궁의 성문이 열린 적은 몇 번 없었다. 빙화 궁주가 누군지, 원시천존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빙화 궁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그저 수련 신선인 아이만 몇 번 성 밖을 드나들었다는 보고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빙화궁은 어디에도 있으며 어디에도 없었다. 필요한 곳에 나타났다가 그 역할을 다하면 신기루처럼 또 사라졌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 빙화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신비로운 빙화궁의, 그것도 수련 신선인 아이가 그의 결계 안으로 들어 왔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 사색이 된 사내가 지략의 뒤를 따라 홀연히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잠든 아이를 보고서야 사내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했다.

“영보천존을 뵈옵니다. 허락도 없이 온 결례를 용서하옵소서.”

사내는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정법입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이냐?”

“송구하오나 저도 그 연유를 알지 못합니다. 궁에서 갑자기 사라지시는 바람에 그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흔적을 쫓아 왔으나 결계에 막혀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법은 신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고작 수련 신선인 아이를 향해 존대를 하고 있었다. 수련 신선의 표식인 오색 끈을 하고 있지만 빙화궁에서 정법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데려가거라.”

정법이 다가오는 사이 아이가 꼼지락거리더니 깨우지도 않았는데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늘어지게 입이 찢어져라 하품도 했다. 그리고 멍하니 영보천존도 보고 태상노군도 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정법을 발견하고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아이를 보는 이 모두 저절로 따라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아이는 정법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아이가 아빠를 보고 반가워 두 팔을 벌리듯 말이다. 정법은 아이의 아비처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냐?”

“송구하오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정법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수련 신선인 아이다. 빙화궁의 궁주도 아닌데 이름도 가르쳐 줄 수 없단 말이냐? 내 영역을 허락도 없이 들어온 값이라 생각하고 말해 보거라.”

정법은 계속 난감한 표정으로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아이가 물끄러미 영보천존을 보았다. 그러더니 방긋이 웃었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아이는 정법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영보천존과 태상노군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잘 있으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순식간이었다. 결계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무색하고 민망할 정도로 거침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빙화궁의 신선에게는 어떤 결계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군.”

영보천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선이기는 해? 내 생각엔 원시천존 급의 신의 존재가 아닐까 싶은데.”

한눈에 봐도 책을 좋아하게 생긴 태상노군이 빈정대듯 말했다.

신들의 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빙화궁. 빙화궁의 궁주, 그리고 그곳에 속해 있는 아이들. 한 마디의 이름으로 정의할 수 없는 신.

오래전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빙화궁에 대한 정보는 원신천존이 알려준 것이 전부였다. 원시천존도 빙화궁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어 전과 같이 또다시 혼돈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빙화궁에 대해 그다지 꼬치꼬치 알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의 소란이 일어난 며칠 후, 빙화궁에서 사신들이 영보천존의 궁에 왔다. 그 날 정법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사내가 제대로 된 복색을 갖추고 그의 궁을 찾아와 사과의 선물을 내밀었다.

“무엇인가?”

영보는 물었다. 오늘도 바둑을 두러 놀러 왔던 태상은 살랑살랑 부채를 흔들며 정법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빙화 궁주께서 사과의 선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영보는 물끄러미 정법을 바라보다가 정법의 뒤에서 하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밀고 있는 여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제각각 물건들을 들고 서 있었다.

“고작 작은 아이가 잠깐 다녀 간 일로 과한 것 같군.”

“궁주께서는 영보천존의 궁에 허락도 없이 빙화궁의 아이가 침범한 일에 대해 거듭 용서를 구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는 잘 있는가?”

“예.”

영보천존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물건들은 도로 가져가고, 아이를 내게 하루 보내 달라 하거라.”

정법이 놀라 그만 얼굴을 들고 똑바로 영보천존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