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 장군과 두 형제가 급하게 상황을 마무리하고 별채를 나섰다. 유현이 홀로 남아 율과 마주 앉아 있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정적 속에 맑은 새소리가 흘러다녔다.

“전하, 소신의 가문은 정사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폐하께서도 나도 박 장군의 뜻을 존중한다.”

“전하, 박유신은 아직 몸이 좋지 않습니다. 생사를 오가다 이제 겨우 통증 없이 걸어 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먼 거리를 움직이는 건 위험합니다. 두고 가 주십시오. 뛰어난 호위를 보내겠습니다.”

“걱정 마라. 호위에게 시켜 유신이가 편하게 타고 갈 마차를 준비해 오라 했다.”

“전하를 호위하는 자입니다. 마차를 타고 어찌 호위를 하겠습니까.”

“내가 같이 탈 것이다.”

유신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황태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짐승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투는 변함이 없었다. 유현은 그가 알고 있던 황태자에 대한 모든 것들을 지웠다. 황태자는 황제보다 더 무서운 자였다.

“전하, 왜 유신이를 그냥 두십니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황궁에서 있었다면 목이 잘렸습니다.”

“하하하. 괜찮다. 죽었다 살아나더니 성질이 많이 누그러졌다.”

유현은 내색하지 못했지만 경악했다. 황태자에게 욕을 하고 상을 뒤엎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유신의 성질이 누그러졌다며 저렇게 기쁘게 웃는다. 대체 유신은 황궁에서 무슨 짓을 하고 살았던 것인가.

순간 유현은 자신이 큰 부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정상이 아니다. 유현의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뭔가. 대체 그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뭔가.

“전하, 혹여 남한성에 오신 연유가 박유신 때문이옵니까?”

율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박유신의 시신을 황궁으로 데려가려고 왔다.”

“몇 달간 남한성에 사람을 두어 살피시고. 역모의 수습이 채 되지도 않은 이 중요한 시기에 전하께서 직접 남한성까지 걸음 하셨던 모든 연유가 한낱 보초병이었던 박유신의 시신을 가져가기 위해서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그런데 기적처럼 박유신이 살아 있다. 그러니 데려간다.”

율은 단호했다. 순간 유현은 경악을 넘어 머릿속이 백지 상태가 되는 것 같았다.

“전하, 혹여 박유신을 호위가 아니라 측근으로 두려고 하십니까.”

“박유신은 내 사람이다.”

유현의 눈빛이 단호하게 바뀌었다.

“전하, 박유신은 결코 길들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사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걸어도 결코 누군가의 지배하에 들어가 목숨을 내걸고 싸우지 않습니다.”

“안다. 그래서 박유신에게 말했다. 내가 박유신의 사람이 되겠다고.”

유현은 태어나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는 황태자십니다.”

“알고 있다.”

유현은 한숨이 터졌다. 율에게 무례임을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전하, 박유신은 예법과 율법으로 엄격하게 통제되는 황궁에서 살지 못합니다!”

“알고 있다. 박유신은 황제에게도 황태자에게도 언행에 거침이 없다.”

유현은 당장 쫓아가 동생의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이 녀석이 황궁에서 사고를 쳤다! 그래서 몇 년간 나라 밖을 돌아다니고 돌아와 이름조차 바꾸고 살겠다고 한 것이다! 미친 것이냐, 박유신!

“전하, 박유신을 두고 가 주십시오! 소신의 가문을 대표하여 청하옵니다!”

유현이 진심을 다해 율에게 읍소했다.

“박유현, 말리는 연유가 가문의 안위 때문인가.”

“박유신이 제 명대로 오래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황궁에서 박유신을 건드릴 자는 없다.”

“전하, 박유신은 뛰어난 머리와 감탄을 자아낼 만큼의 무예를 합니다. 하지만 결코 길들지 않는 짐승입니다. 그런 자가 황궁에서 어찌 무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 화살받이가 되어 죽을 겁니다. 그것을 알기에 보낼 수 없습니다!”

율은 서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박유신의 뒤에 내가 있다. 황제가 될 황태자가! 누가 감히 나의 사람에게 화살을 겨눈단 말이냐. 누가 감히 예법과 율법 따위로 나의 사람을 판단해 입을 놀린단 말이냐.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다! 그 핏줄을 모조리 찾아내 도륙할 것이다!”

유현은 주먹을 쥐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보이지 않던 큰 조각이 이제야 보였다. 황태자는 사내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전하, 박유신은 사내이옵니다!”

율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따위가 대수더냐.”

율은 유유히 일어서 방을 나섰다.

굳어버린 유현은 움직이지 못했다. 박유신을 사내로 알고 있으면서도 연모하고 있다. 이 중요한 시국에 한낱 보초병이었던 자의 시신을 파내어 가져가겠다고 남한성까지 온 황태자가 살아 있는 유신을 놓아줄 리가 없다. 황태자는 미쳤다.

*

박 장군과 두 아들은 마루에 서서 활짝 열린 방 안을 보면서 움직이지 못했다. 유신이 장에서 무복을 마구잡이로 꺼내 뒤로 던지고 있었다. 유신의 살기가 엄청 났다. 방 안에 들어서는 모든 자를 죽일 것 같았다.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유관이 유겸에게 속삭였다. 유겸은 물끄러미 유신을 보다가 박 장군에게 말했다.

“아버지, 점심 후에 출발하시려면 준비를 서두르셔야 합니다. 유신이는 제가 혼내겠습니다.”

박 장군은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황궁으로 올라가는 길에 유신과 얘기를 해봐야겠다.

“유관아, 너는 가서 호위들을 준비시켜라. 점심 후에 곧장 출발할 것이다.”

박 장군과 유관이 나갔다. 유겸은 방에 들어서 방문을 닫았다. 상석에 앉은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뭔가를 찾고 있는 유신에게 여상하게 물었다.

“황태자를 죽여 주랴?”

놀란 유신이 확 돌아섰다.

“미쳤습니까?”

“남한성을 나간 후에 인적 없는 길목에서 죽이면 된다. 사람 하나 흔적 없이 죽이는 게 무에 어렵다고.”

유신이 피식 웃었다. 유신의 살기가 사라졌다. 유신이 털썩 앉아 다리를 쭉 폈다.

“됐습니다. 그딴 개자식 때문에 형님이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황궁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돌아올 겁니다. 아버지야 호위들이랑 알아서 오시겠지요.”

“그럼 두들겨 패주랴? 듣자 하니 황태자가 새벽에 찾아와 널 협박한 것 같은데.”

“하아. 형님도 저 감시해요?”

“새벽에 걱정돼서 가봤다. 안채에 없어서 찾다 보니 이 주변을 황태자의 호위들이 지키고 있더구나. 네 방까지 황태자가 쫓아왔다는 것을 알고 나도 순간 화가 나서 그것들 다 던져 버리려고 했다.”

“어떻게 잘 참으셨네요?”

유겸이 껄껄 웃었다.

“찬혁이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뭐래요?”

“네가 황태자를 죽일 것 같다고 황태자를 걱정하고 있더구나. 하하하.”

유겸은 그때 느꼈던 황당함이 떠올라 웃음이 터졌다. 최찬혁은 진심으로 황태자의 생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 근데 형님 최찬혁을 아세요?”

유겸이 물끄러미 유신을 보다가 툭 물었다.

“네가 봤을 때 최찬혁은 어떤 자냐? 황태자 곁에서 호위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유신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 새끼, 병신이에요. 호위를 한다는 놈이 정이 많아요. 기둥서방처럼 곱상하게 생겨서는 심성까지 곱상해요. 글렀어요, 그 새끼는.”

“좋구나. 심성이 곱고 정이 많은데 네가 보기에 인물까지 곱상하게 생겼다니 다행이 아니냐.”

유겸이 매우 흡족해했다. 유신은 기가 찼다.

“형님, 그 새끼는 황태자를 지켜야 하는 놈이에요.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족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어야 한다고요. 근데 그놈은 충직하기만 해요.”

“하하하하. 평가가 좋구나.”

“형님, 제가 귓구멍 막힌 황태자 때문에 열 받아 있는 상태입니다. 형님까지 귓구멍 막고 있을 겁니까! 제가 말을 어렵게 합니까. 왜 다들 제가 말을 하면 딴소리를 합니까!”

“황태자랑 갈 것 없다. 예정대로 요양을 떠나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으아아아악!”

유신이 고함을 질렀다. 분노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놀란 유겸의 두 눈이 껌뻑거렸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겠습니까! 아버지가 황태자랑 같이 가잖아요! 저 미친 황태자 새끼가 아버지한테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

유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신아, 설마 너 황궁에서 사고 쳤느냐?”

“형님, 사고는 저 개자식이 쳤어요! 저 개자식이! 저 새끼는 미쳤다고요! 한나라는 이제 끝이에요! 하나밖에 없는 황태자 새끼가 미쳤다고요!”

유신은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까지 터질 것 같은데 말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는 남색이다! 나에게 입맞춤을 했다! 미친 소리를 지껄이며 황궁에 가자고 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다른 이들은 몰라도 분명 형님과 무이 스승님은 황태자를 두들겨 팰 것이다. 죽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우리 가문은 몰살될 것이다.

유신이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던져져 있는 무복들을 끌어다 갰다

“하아. 됐습니다. 그냥 다녀올게요. 갈 때는 몰라도 올 때는 혼자 말 타고 달리면 보름 정도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겁니다.”

“안 된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다. 올 때 혼자 오지 말고 무이 대장과 함께 와라.”

“형님,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시면 그냥 혼자 오게 두세요. 보태지 마세요. 황태자랑 아버지 둘만으로도 미치겠어요. 스승님까지 옆에서 신경 쓰이게 하면 황궁에 도착도 못 하고 저는 죽습니다.”

유겸이 일어났다. 혹시나 싶어 무이를 함께 보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함께 가시니 유신이 위험에 빠질 일은 없다. 뛰어난 호위 무사들까지 함께 가니 걱정은 이쯤 하기로 했다.

유겸이 유신을 지나치며 토닥토닥 머리를 토닥거렸다.

“유신아, 아프면 움직이지 말고 연락해라. 내가 데리러 가마.”

유신은 코끝이 찡해졌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아하는 육포를 준비해 주마.”

유겸이 나갔다. 유신은 무복과 가슴을 동여맬 천이 개켜진 것을 내려다보다가 봇짐을 꼭꼭 묶었다. 막힌 혈이 뚫려서 그런지 몸이 빠르게 변했다. 단단하게 묶은 가슴 때문에 숨쉬기가 불편했다. 유신은 그것조차 화가 났다.

*

한낮의 햇살이 뜨거웠다. 마당에 황태자와 박 장군의 호위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다. 율은 박 장군과 함께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유겸과 유관이 다가섰다. 율은 주변을 훑었다. 박 장군의 호위가 서 있는 줄 제일 뒤에 유신이 서 있었다.

“박유신, 이리 와라.”

유신은 말없이 다가와 몇 발자국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상관을 대하는 호위의 자세였다. 하지만 유신답지 않았다. 율은 유신을 훑었다. 하얀 무복을 입은 유신이 봇짐을 들고 있었다. 말에 묶으려는 것이리라. 율이 다가서 유신의 봇짐을 뺏어 들었다.

“헉!”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유신이 고개를 들어 서늘한 눈빛으로 율을 노려보았다. 유신은 말투에 감정을 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전하, 주십시오.”

율은 곁에 서 있던 동호에게 봇짐을 넘겼다.

“너는 마차를 타고 간다.”

“말을 타고 호위하겠습니다.”

“내 몸이 허약하여 말을 탈 수가 없다. 그러니 마차에 함께 타서 호위해라.”

주변에 선 이들은 모두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그들은 박유신이 어떤 자인지 알고 있다. 어젯밤에 유신이 황태자에게 어찌하는지도 봤다. 불안한 박 장군이 유신을 말리려고 했지만 유현이 막아섰다.

“전하, 말을 타고 마차 곁에 붙어 달리겠습니다.”

“내 무섬증이 많아서 마차 곁에 말이 다가오면 경기를 일으킨다. 그러니 함께 타서 호위하라.”

유신은 심호흡을 했다. 보는 시선이 많다. 그러니 절대 선을 넘으면 안 된다.

“마차에서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달리겠습니다.”

“내 겁이 많다. 혼자 있으면 무서워 그러니 마차에 함….”

유신은 결국 폭발했다.

“작작 좀 하십시오, 전하! 이 찜통더위에 마차에 태워서 쪄먹겠다는 겁니까! 더워 뒈지겠는데 마차를 어떻게 탑니까! 말 타세요, 말!”

유신이 경악하는 동호의 손에서 봇짐을 낚아채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렀다. 걸어가면서도 욕을 멈추지 않았다.

“하하하하.”

율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경악하여 굳어 있는 박 장군에게 말했다.

“박 장군, 마차는 필요 없게 됐습니다.”

율은 웃으며 걸었다. 호위들이 서둘러 문을 나섰다.

유현이 박 장군의 앞에 서서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심각한 얼굴로 속삭였다.

“아버지, 절대 유신이를 황태자와 단둘이 있게 하지 마십시오! 돌아오실 때 유신이를 반드시 데리고 오셔야 합니다!”

박 장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