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침전 마당. 기다리던 황태자가 잡혀 오는 유신을 보며 웃었다. 최찬혁이 황태자 앞에서 유신을 놓아줬다. 유신이 일부러 허리를 확 숙였다. 꼴 보기 싫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 고개를 들어라. 근래 들어 네 얼굴 보기가 쉽지 않구나.”

“안 씻었습니다. 깔끔하신 태자전하 밥맛 떨어지실까 싶어 그럽니다.”

하하하. 황태자가 웃으며 유신의 턱을 잡고 세웠다. 유신이 고집스레 시선을 마주치지 않자 황태자가 얼굴을 가까이 내렸다. 식겁한 유신이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황태자가 웃으며 손을 내리고 바로 섰다.

“오늘도 고생이 많더구나.”

약 올리듯 웃음을 참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니 울컥 살의가 치솟았다.

“보셨습니까?”

“다 보지는 못했다. 내가 봤을 때는 이미 여인이 문을 넘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게 다 본 겁니다! 봤으면 들어오셨어야죠! 마음에 들면 데리고 들어가서 자면 되잖습니까! 그럼 제가 개고생 안 해도 된다고요!”

“싫다.”

황태자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저 얼굴이 정말 얄미웠다. 황태자만 아니면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아니, 왜 싫습니까! 내궁에 있는 그 많은 여인들이 다 태자전하의 여인이 되겠다고 밤마다 쳐들어와 난리인데! 그냥 마음에 드는 여인과 혼인을 하세요! 황태자는 원래 어릴 때 혼인을 해야 한다면서요! 지금까지 뭐 하는 겁니까 대체! 혼인이 싫으면 우선 여인과 잠이라도 자든지요! 대체 이게 밤마다 무슨 짓입니까!”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황태자가 능청을 떨었다. 사람 속 뒤집는 데 탁월했다. 대신들이 혈압이 터져 죽지 싶었다.

“다 싫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궁에 있는 여인들이 오십 명이 넘는다는데. 나라도 나이도 천차만별인데 그중에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까지 여기 쳐들어온 여인들 다 예뻤어요! 보지도 않으시고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혼자 자는 게 좋다.”

“그럼, 같이 있다가 자고 싶을 때 내보내면 되잖아요! 대체 밤마다 왜 이 난리냐고요!”

“요즘은 누우면 바로 잔다. 매일 숙면을 취해서 그런지 잠이 늘은 것 같구나.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몸도 가볍고 좋구나.”

미칠 것 같았다. 없던 두통까지 생기는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유신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만둬?”

“절. 대. 편안히 계시지 마십시오. 매일 밤마다 잘 주무시지 마십시오.”

유신은 제일 가까운 담장을 향해 뛰었다. 담장을 뛰어넘으려는데 목에 칼날이 닿았다. 최찬혁이었다. 유신이 확 돌아서자 최찬혁이 놀라 검을 거두었다. 유신이 황태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만둔다고요! 안 한다고요!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황태자가 손을 까딱였다. 최찬혁이 또 뒷목을 잡으려고 했다. 유신이 그 손을 피해 반대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괴물 최찬혁한테 잡혔고 언제나 그렇듯 황태자 앞에서 놓아줬다.

“그만둘 생각을 하다니 벌을 받아야겠구나.”

“제가 뭘 잘못했다고 벌을 받습니까!”

“계속하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매일 불침을 서거라.”

꼴도 보기 싫은데 황태자가 자는 것까지 봐야 하다니. 절대 사절이었다.

“싫습니다! 차라리 감옥에 가겠습니다!”

유신이 돌아서서 떨어져 있는 최찬혁에게 물었다.

“감옥이 어딥니까?”

“찬혁아.”

“싫습니다! 차라리 내 발로 지금 감옥에 들어가겠습니다! 궐 밖으로 나가지 못할 바에야 감옥에서 죽겠습니다! 꺼낼 생각 추호도 마십시오!”

유신이 뛰었다. 문을 넘는 것을 본 황태자가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찬혁아, 데리고 들어와라.”

감옥은 보지도 못하고 괴물 최찬혁에게 덜미가 잡힌 유신이 침전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황궁의 미친개

1.

12월의 겨울밤. 달도 없어 온 세상은 새카만 심해에 잠긴 것처럼 고요했다. 인적 없는 대로에 다닥다닥, 거대한 흑마가 안장도 없이 홀로 걸었다. 까만 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입에 거품이 그득한 흑마는 곧 쓰러질 듯했다. 흑마의 시선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저택만 향해 있었다.

히이이잉. 말의 거친 울음이 어둠을 갈랐다. 대답하듯 육중한 저택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안에서 뛰어나온 병사 2명의 횃불이 확인하듯 앞을 향했다. 푸르르륵. 말의 투레질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병사들이 말을 향해 뛰었다.

*

같은 시각. 저택의 반대편. 사람의 2배가 넘는 높은 담장을 검은 인영이 훌쩍 뛰어넘었다. 날듯이 뛰어넘은 검은 인영이 가볍게 착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다.

“젠장. 졸려 뒈지겠네. 하암.”

검은 인영이 검은 복면을 벗으며 하품을 했다. 윗몸이라도 일으키고 싶었지만 힘에 부쳤다.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담 넘는 데 다 써버렸다.

“이런 젠장. 그 새끼는 하필 겨울에 지랄을 떨어. 재수 없는 새끼. 여름이면 그냥 여기서 자도 되잖아.”

이대로 흙바닥에 누워 자고 싶었으나 겨울이었다. 따뜻한 방을 눈앞에 두고 눈이 얼어붙은 땅바닥에서 객사할 수는 없었다. 포근한 이불이 깔린 그의 방이 생각나자 저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젠장.”

절대 보이면 안 되는 자가 마루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겨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 자체가 무시무시했다. 다시 담장을 넘어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려는 찰나 중문을 박차고 병사가 뛰어 들어왔다.

“장군님!”

병사가 마루에 앉은 자를 향해 빠르게 보고했다.

“장군님의 흑마가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소대장님은 타고 있지 않았습니다! 중대장님과 대대장님이 주변을 수색하러 곧 출발한다고 합니다!”

“중대장과 대대장 오라고 해. 당장!”

“네, 장군님!”

병사가 왔던 것보다 빠르게 뛰어나갔다.

“박유신, 담장에 손이 닿는 즉시 네 명줄을 끊을 것이다.”

끼기기긱. 대장군의 거대한 활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살벌했다. 담장을 넘으려던 유신이 한숨을 쉬며 돌아서 담장에 기댔다.

전쟁터에서 한 번에 서너 명의 적들을 꿰었던 거대한 활이 겨누고 있는데도 유신은 하품을 하며 여유로웠다. 움직임 없던 화살촉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이라도 날아가 하품하는 입을 꿰뚫을 것 같았다.

중문으로 십여 명이 뛰어들었다. 곳곳에 있던 횃불에 불이 붙었다.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다.

“장군님!”

전쟁터에서만 드는 활을 대장군이 들고 있어 놀랐던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7일간 사라졌던 소대장이 나타났다.

“박유신, 너 이 자식아 대체 어디 갔었어?”

7일 만에 눈에 띄게 야윈 중대장이 달려가려 했지만 대대장이 팔을 잡고 말렸다. 장군의 활이 스치지도 못하는 건 오직 박유신 뿐이었다.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박유현은 부하들을 다 내보내고 중문을 닫고 있었다.

“아이고, 저 화살 떨리는 거 봐. 드디어 우리 아버지도 늙으셨네.”

담장에 기대있던 유신이 피식 웃으며 걸어 나왔다. 지친 목소리만큼 걸음도 무거웠다.

“기력 딸리시는 거 같은데 멧돼지라도 잡아드려요?”

박 장군의 활이 천천히 내려갔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유신의 모습에 다들 경악했다. 얼굴과 손과 검은 무복이 온통 피였다. 피에 젖었다 마르기를 여러 번 한 흔적들이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그것을 모를 수 없었다.

중대장, 박유관이 형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 유신의 온몸을 살폈다.

“어디냐? 어디를 얼마나 다친 것이야? 이거 뭐야? 칼에 베인 거야? 대체 어떤 새끼야!”

유관이 유신의 왼팔을 잡고 포효했다. 칼에 베인 무복 사이로 살이 찢겨 피가 엉겨 붙어있었다.

뒤늦게 정신이 든 유현이 주변을 살폈다. 충격에 굳어버린 아버지, 박 장군과 소름 돋게 서늘한 얼굴로 칼을 빼든 장남, 대대장. 당장이라도 무기고로 뛰어갈 것처럼 흥분한 셋째, 중대장. 아버지 박 장군을 닮아 거대한 덩치들의 형제들을 보며 둘째,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가 말려줄 수도 없는 지금 저 세 명이 흥분하면 큰일이었다.

“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서 유신이의 말을 들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란스러우면 어머니가 아실 것 아닙니까.”

‘어머니’란 말에 다들 동작이 정지됐다. 다행이었다.

“형님, 그 검은 넣으시고 얼른 아버지 모시고 들어가시죠. 이러다 어머니 아시면 어쩝니까. 그렇지 않아도 의식만 돌아오면 유신이부터 찾으시는데 이 모습 보시면 충격받으십니다.”

막내아들의 모습에 충격받은 아버지를 모시고 장남, 유겸이 방으로 들어갔다. 마루에 놓여있던 활과 화살통을 양손에 들고 유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관이라 하나 그도 기본적인 무술은 연마했다. 그런 그조차 한 손으로 들 수도 없이 무거웠다. 이것을 7일 내내 손에서 놓지 않던 아버지의 마음을 그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유관아, 아버지 활 서재에 가져다 놓고 와라. 유신이도 좀 놓고.”

억지로 유관의 손에 활과 화살통을 쥐여주고 유신과 마주 섰다. 가까이 보니 유신의 얼굴이 많이 수척했다. 7일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게 분명했다.

“유신이는 가서 씻고 오거라. 지금쯤 준비가 다 됐을 것이다.”

그가 부하를 시켜 부인에게 유신이가 왔다 전하라 했으니 목욕물부터 준비했을 것이다.

“형님이 잠시 맡아주십시오.”

유신이 허리에 띠처럼 감고 있던 자루를 풀어 유현에게 건네고 돌아섰다. 유신이 중문을 나서자마자 유관이 급하게 뒤를 쫓았다. 분명 채근하여 유신의 팔을 벤 놈을 알아내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 그놈의 팔은 양쪽 다 잘려나갈 것이다.

“박유관, 유신이 쫓아갔다가는 내일부터 밥상에서 고기를 보기 힘들 것이다.”

유관의 몸이 확 돌아 반대편으로 향했다. 형제보다 고기였다.

*

욕탕 앞에 서 있던 둘째 형수가 유신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형수님, 오늘도 감사합니다. 바람이 찹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십시오.”

마음씨 고운 둘째 형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유신을 아래위로 살피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형수님, 어서 들어가세요. 형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유신아, 설마 이거 다 피야? 대체 얼마나 다친 거야? 왜 그랬어? 아버님도 계시고 형제들도 있는데 왜 네가 이러는 거야?”

유신보다 나이가 많지만 어릴 적부터 놀이 친구였던 둘째 형수가 놀랐는지 예전 말투가 나왔다. 마음이 여린 둘째 형수가 펑펑 눈물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유신이 웃었다.

“형수님, 그만 울어요. 셋째도 울보 나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셋째를 임신한 형수의 두 아들은 형을 닮아 매우 똑똑했지만 형수를 닮아 매우 착했다. 그래서 큰형님과 셋째 형님의 말썽꾸러기 아들들 때문에 어릴 적에 많이 울면서 컸다.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온 거야. 왜 이렇게 말랐어. 빨리 들어가서 씻어. 얼른 밥상 차려서 방에 가져다 놓을게. 꼭 먹고 자, 유신아.”

“밥보다 잠이 더 급해요, 형수님. 그러니까 괜히 고생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주무세요. 밥은 내일 일어나서 먹을게요.”

밥상을 차리겠다며 고집을 피우는 둘째 형수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향긋한 향이 확 온몸을 덮쳤다. 따뜻한 열기가 좋았다. 유신이 눈을 감고 주변의 기척을 감지했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둘째 형님의 일 처리는 언제나 완벽했다.

유신이 옷을 벗었다. 다친 팔이 뻐근했다. 살짝 베인 것이라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욕통을 내려다보며 유신은 웃고 말았다. 둘째 형수가 또 이렇게 꽃잎을 잔뜩 뿌려놓았다. 향유도 섞어서 은은한 꽃 향이 가득했다. 말려도 소용없는 둘째 형수 때문에 유신은 오늘도 꽃 목욕을 해야 했다. 유신이 욕통에 몸을 담갔다.

“후우우우.”

긴 숨이 뱉어졌다. 상투를 풀었다. 일주일 내내 꽁꽁 묶여있던 머리카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유신이 두 손으로 풀어 내렸다. 머리까지 푹 물속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속에 잠긴 이 느낌은 언제나 좋았다.

“푸하.”

숨을 뱉으며 머리를 물 밖으로 내민 유신이 머리를 욕통에 기대려고 했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감고 있는 천을 풀기 시작했다. 어깨부터 가슴까지 칭칭 동여맨 하얀 천이 물을 잔뜩 머금어 풀기가 쉽지 않았다.

사르륵. 짓눌렸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하아아.”

항상 강하게 압박하듯 묶어 놓고 있기 때문인지 가슴의 천을 풀어내면 이렇게 큰 숨이 터져 나왔다. 유신은 느긋하게 목욕을 즐기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끝내야 했다.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박 장군의 넷째아들, 박유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부모와 형제, 그리고 둘째 형수뿐이었다.

*

유신은 방문을 열다가 흠칫 놀랐다. 서탁에 커다란 덩치의 머리 네 개가 모여 있었다.

“졸립니다. 회의는 다른 방에서 해주십시오.”

그들과 한 걸음 떨어져 앉은 유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삼 형제가 재빠르게 돌아앉았다. 경악하는 표정들이 가관이었다. 웃음이 터지려던 유신은 급하게 혀를 깨물었다. 분위기상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