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이지숙입니다만?

한가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 내내 방콕 했던 탓에 몽롱한 정신 때문인지 어떻게 운전하고 있는 건지 몰랐다.

“하암… 토일월 이렇게 쉬면 얼마나 좋을까요?”

크큭… 말도 안 되는 성대모사를 한 제 자신이 웃겼다.

“아이고 느는 건 나이하고 주책밖에 없구나.”

집 밖에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이렇게 피곤한 건 나이 탓일까 싶어 괜히 서글퍼졌다.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아이돌 노래가 흘러나왔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입으로 흥얼거렸다. 아침이라 잘 풀리지 않는 목소리로 노래를 하니 한결 월요일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했다.

삑사리가 나든 말든 신경 안 쓰고 맘껏 부를 수 있어 좋았다. 다만, 이 차의 블랙박스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모래처럼 사라져야 했다. 상상을 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이 노래가 인터넷에 공개되는 것을 말이다.

“으으.”

상상만으로도 싫어 몸서리를 쳤다.

끼이이익!

갑자기 끼어든 SUV 차량이 저쪽 차선에서 넘어오는 트럭과 부딪쳤다. 평범했던 월요일 하루의 시작이 비범해지는 순간이었다. 15년 운전 경력 덕분일까. SUV 차량 직전에 겨우 멈춰 섰다.

“…아침부터 미친 거 아냐?”

육성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빵빵!

뒤에서 클랙슨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아니라고! 아 진짜… 경차라고 지금 무시하냐?

아침부터 놀란 가슴 진정할 새도 없었다. 블랙박스에서 8시 알림이 울렸다.

하필이면 월요일 아침부터 차 사고라니….

운도 더럽게 없다고 생각했다. 우측 깜빡이를 넣어 겨우 끼어들었는데, 정지 신호가 걸렸다.

“아, 정말… 운도 지지리도 없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신호가 유독 긴 사거리에서 멈춰 선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사고가 크게 난 모양인지 짧은 시간에 경찰차가 달려오듯이 왔다. 경찰은 아닌 듯한 남자가 차에서 급하게 내리는 것이 보였다. 슬림한 핏을 자랑하는 검은 슈트에 쉼표 머리를 한 남자의 얼굴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올. 내 스타일인데?”

빵빵!

뒤에서 클랙슨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갑니다. 가요.”

비록 경차이긴 하지만 출발이 재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백미러 뒤로 사고 현장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라디오에서는 다른 노래가 흥겹게 흘러나왔다.

***

사내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아 다들 쥐 죽은 듯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비서 팀은 더욱더 그랬다. 하윤슬 전무가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뒤였기 때문이었다.

“전무님 오늘 기분 되게 별로인 것 같은데…?”

“쉿! 조용히 해요. 그러다가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래요.”

최 과장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 파티션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가 입을 삐죽거렸다.

“이게 무슨 회사냐? 군대지… 상사 기분 달래 주는 기쁨조도 아니고….”

“그니까요. 그나마 차 비서가 있어 다행이죠 뭐.”

“도대체 차 비서는 어디서 스카우트해 온 거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힉!”

파티션 사이로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들리자 절로 입이 쏙 들어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내가 펄펄 나는 하윤슬 전무가 회의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

“이거 누가 작성했죠?”

카랑카랑한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회의 자료를 파티션에 신경질적으로 퍽 하고 내려쳤다. 다들 숨죽이며 최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색이 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 같았다.

“최 과장 입사한 지 얼마나 되었죠?”

“올해로 8년 차입니다….”

“8년… 월급 도둑이 따로 없네.”

“예?”

“도둑년이라고 하면 알아듣겠어요? 말귀도 못 알아먹나 봐요?”

“그… 그게….”

한번 걸리면 식겁 똥을 쌀만큼 아픈 구석을 콕콕 찌르는 그녀였다. 비서 팀에 있던 사람들은 혹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이걸 지금 PPT 자료라고 만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죄송? 나는 지금 하청업자들에게 개 쪽을 다 팔았는데! 죄송하다면 단가요?”

화가 얼마나 났는지, 그녀의 스모키 화장이 매섭게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표적이 된 최 과장은 그저 아무 말도 못 하고 죽상이 된 채 서 있었고, 비서 팀 모두 역시 숨소리라도 그녀를 거슬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숨죽이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과장급 월급받으면서 기껏 학생들이나 만들 법한 PPT 만드는 거 부끄럽지도 않나 보죠? 제 말 무시하는 거예요?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죠? 네?”

아니 말하면 말한다고 난리고, 조용히 하고 있으면 조용하다고 난리라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랐다.

“전무님. 부산 금융 단지 건으로 B 은행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차 비서 덕분에 겨우 마녀의 지랄 같은 잔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미처 한풀이를 다 하지 못한 하 전무는 최 과장을 매섭게 노려본 뒤 공포스러운 하이힐 소리를 내면서 전무실로 들어섰다.

“우와… 대박. 나 울어도 되는 거 맞지?”

사실 PPT 자료는 비서 팀에서 취합해서 다 같이 만들었지만, 최 과장이 대표로 전달한 것이었다. 김 대리가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다들… 나한테 너무한 거 아냐? 어째 말 한마디도 없을 수 있냐고. 흐엉.”

울상이 된 최 과장을 김 대리가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됐어. 차 비서밖에 없네, 차 비서 진짜 고마워.”

그녀가 자료를 복사하고 있던 은호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김 대리가 그녀의 팔을 잡고서 제지했다.

“은근슬쩍 차 비서한테 치근덕거리려고!”

“눈치도 빠르긴.”

은호는 복사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실을 나섰다. 그의 이름은 차은호. 작년에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해 온 의문의 남자였다. 사내에서는 마녀 조련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만이 하윤슬 전무를 다스릴 수 있다는 얘기였다. 큰 키에 서늘한 인상의 그는 매너도 좋아 사내 여직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어쩜 저렇게 뒤태도 완벽할까?”

“방금까지 마녀한테 당한 사람 맞아요?”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최 과장을 보고서 김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저 인물이 어떻게 마녀 밑에서 일하냐고.”

“마녀도 얼굴에는 약한가 보죠. 뭐.”

“그치? 저 얼굴을 보고서 화가 난다면 그건 사람 아니죠.”

“그치. 사람 아니지. 저 피지컬에 머리도 어쩜 저렇게 소름 끼치게 작어?”

“찬송은 그만하고 이제 업무 보죠? 아니면 또 마녀가 언제 날뛸지 모르니….”

김 대리의 말에 낙담한 최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 돌아갔다.

***

은호는 복사한 자료를 들고서 전무실을 들어가기 위해 노크를 했다. 그녀는 굉장히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통화 중이시면 나중에 오겠습니다.”

그녀의 안하무인인 태도는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은호가 먼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여전히 통화를 하면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조금 전의 자신의 말을 가로막은 것에 대한 유치한 분풀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이미 익숙해져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래서 부산 건은 어떻게 됐다구요?”

“하청업체 중 한 곳이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 같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그녀에게 건네자,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넘겨보았다.

“이걸 보고라고 하는 거예요? 당장 그 업체 빼세요!”

“부산은 업체끼리 워낙 결속력이 좋은 곳이라 이렇게 간단히 업체를 변경하게 된다면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차 비서. 사내에서 내 별명이 뭔지 알아요?”

“…….”

“마녀래요. 알고 있었어요?”

여전히 자료에 시선을 둔 그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묵묵부답인 그가 짜증이 났는지 자료를 탁 소리 나게 엎고서 말을 이었다.

“차 비서 별명은 마녀 조련사던데?”

“사사로운 것에 신경 쓰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라서 그런가?”

“…….”

“모르죠? 직원들은 차 비서가 내 주치의인 거. 그것도 정신과 쪽.”

비꼬아서 얘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지금 현재 발발한 그녀의 인격은 독불장군형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되지 않으면 주위 사람을 못살게 굴었고, 직원들에게 온갖 갑질을 해댔다.

“회장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사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