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계의 종말

평창동 본가에서 열린 가든파티는 ‘조촐하게’ ‘남들의 이목을 최대한 집중시키지 않는 선에서’ ‘쉽게 말해 서민적으로’ ‘그러나 대기업의 총수의 그것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는 퀄리티’라는 목표에 충실하게 사방이 모순으로 가득했다.

베르사유 궁전 앞마당에서 남사당패가 공연을 해도 이 정도로 어색하진 않을 텐데. 주한은 과유불급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혀를 내찼다. 성진은 주한보다 더한 반응이었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질린 얼굴이 되어선, 내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는 말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은 역시 태석뿐이다. 능숙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것을 사업 이야기로 이끌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과연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뭔가가 다르다, 고 주한은 생각했다.

주한이 부모님의 애물단지라면 태석은 그들의 자랑이자 회사의 자랑이었다. 조부로부터 이어 내려온 회사를 이만큼 키워낸 것이 권 회장이라면, 태석은 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킬 인물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현재 추진 중인 리조트 사업이 성공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리라.

유일하게 태석을 경계하라 일러준 것이 주한의 조부였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태석이 그의 눈 밖에 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부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주한에게 태석을 지켜봐야 한다며 신신당부했다.

유산과 함께 유언이 남겨지기도 했다. 태석을 살필 것.

거참, 노인네 노파심하고는. 그랬던 주한의 생각은, 하나둘 태석에 대한 비리를 알게 되면서 점차 바뀌었다. 검사로 일하고 있던 윤섭을 포섭해 본격적으로 뒷조사를 하면서 그동안 태석이 저질러온 깨끗하지 못한 사업적 수단들이 자료화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태석이 그들에게 비자금을 어떤 형태로 건넸는지를 밝혀내는 일뿐이다. 관건은 태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한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이제 성진은 멀미를 호소하고 있었다. 주한은 혜원의 한 톤 높아진 목소리를 들으며 차라리 멀미라도 일으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상식에 온 배우처럼 한껏 기분을 내며 주한을 끌고 다니는 혜원은 평소 이상으로 짜증을 유발했다. 당장 결혼 발표라도 할 듯이 들뜬 혜원은 물론, 둘을 그런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자신을 쏴서 없애고 싶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주한 씨가 형님이랑 얘기할 게 있다고 해서요.”

“벌써 편드는 거야? 이거 나중에는 눈 뜨고 못 봐주겠는데.”

그냥 지금부터 안 봐줬으면 했다. 주한은 오만상을 쓰려다 만 어정쩡한 얼굴로 이름 모를 남자와 악수를 나눴다.

기다렸다는 듯 뒤쪽에서 성진의 감탄이 들려온 것은, 저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간 은성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은성이? 와. 나 진짜 못 알아봤어.”

“그만큼 오랜만이니까요. 억지로 비행기 안 태우셔도 돼요.”

익숙한 목소리에 주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잠시 숨을 멈췄다.

검푸른 색 원피스는, 한눈에 시선을 휘어잡을 만큼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몸매를 여실히 드러내는 옷도 아니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시선을 끌어당기는 데가 있었다. 한쪽으로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단아했고, 평소와 달리 발그레한 뺨과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자칫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한 톤 밝게 살려 주었다.

그중 가장 강렬하게 주한의 뇌리에 새겨진 것은 귀밑으로 풍성하게 늘어진 귀걸이였다. 언젠가 주한이 은성에게 선물한 것이었으나, 평소 입고 다니는 옷이 옷인 탓에 착용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바로 그것.

어느새 기억 속으로 사라졌던 그 귀걸이가 주한의 머리를 쿵, 하고 내려쳤다. 강렬한 충격에, 주한은 은성을 눈앞에 두고도 잠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사이 성진과 짧은 인사를 마친 은성이 주한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아직 안 늦었지? 신은 게 이러니까 걷기가 좀 뭣해서.”

주한은 늦었다는 말도, 늦지 않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은성에게도 전염되었다. 사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오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도 도무지 괜찮은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혜원과 함께 서 있는 주한을 보자 그나마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했던 것마저도 깨끗하게 휘발됐다.

겨우 꺼낸 말이 신발이 이래서 발이 아프다, 는 것이었다. 꺼내고 보니 너무 뜬금없었나 싶었지만,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팠다. 발도 아프고, 옷도 화장도 어색했고, 집에 있는지도 몰랐던 가방을 신경 써서 들고 있느라 손목도 뻐근했다.

주한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은성은 화제를 바꿨다.

“우선 인사부터 드리고 올게.”

그제야 주한이 인상을 팍 구긴 채 은성을 붙잡았다.

“인사는 무슨. 네가 이 집 노비야? 오면 왔다, 가면 간다 꼬박꼬박 보고하게? 그냥 여기 있어. 발도 아프다며.”

또 무슨 일이 있어 이렇게 날이 섰는지 눈치를 살피는 은성을 보며, 주한은 속으로 욕지기를 삼켰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고 했던 건데 말이 험하게 나갔다. 왜 그랬는지는 주한조차 알 수 없었다. 지난 며칠이 머리가 너무 복잡했던 나머지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밥은 먹었냐, 고 물으려다 문득 은성을 보면 하는 얘기가 밥 얘기밖엔 없는 것 같아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주한 씨.”

슬그머니 주한의 팔을 잡아당기며 다가온 혜원이 말로는 주한을 부르며 은성을 쳐다보고 꾸벅 인사했다.

주한은 흘끗 은성을 쳐다봤다. 마치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한 것처럼 은성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이 꾸벅 고개를 숙일 뿐이다.

“여기서 뭐해요? 아직 인사드릴 분들 많이 계시는데.”

주한은 왜 호스트라도 된 것 마냥 인사를 다니느냐, 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보다, 은성의 앞에서 말 하나 허투루 내뱉을 수가 없어졌다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앉아 있어. 나중에 갈게.”

혜원과 함께 멀어지는 주한을 보며 은성은 밀려났다, 고 생각했다. 항상 진이 먼저였던 주한이, 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앞세우게 된 것이다. 그동안 진의 자리에서 진을 대신했던 은성은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그렇게 생각하자 혀끝으로 씁쓸했다. 가슴이 아팠다.

의자를 찾아가려던 은성은 하필 미경에게 발견되어 중앙 테이블에 붙잡혀 왔다. 태석은 하필이면 중앙 테이블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은성의 등장에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누구?’ ‘글쎄, 모르는 얼굴인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태석과 눈이 마주쳐 은성은 어색하게 인사를 꺼냈다.